새집을 보러 가면 아직 들이지 않은 가구부터 떠오른다. 텔레비전은 어디에 놓고, 음악은 어느 자리에서 들을까. 〈타이페이 스토리〉의 아친(차이친)도 빈 아파트에서 살림을 그려본다…
새집을 보러 가면 아직 들이지 않은 가구부터 떠오른다. 텔레비전은 어디에 놓고, 음악은 어느 자리에서 들을까. 〈타이페이 스토리〉의 아친(차이친)도 빈 아파트에서 살림을 그려본다. 곁의 연인 아룽(허우샤오시엔)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 팔을 움직인다. 한 사람은 앞으로 살 방을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의 몸에는 오래전 익힌 동작이 남아 있다. 같이 집을 둘러본다고 같은 생활을 상상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친과 아룽은 오래 알고 지낸 연인이다. 그만큼 공유하는 기억이 많지만, 지금 무엇을 바라는지까지 저절로 통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은 달라질 생활을 기대하고 다른 사람은 익숙한 세계를 놓기 어렵다. 큰 배신이나 단 한 번의 다툼으로 관계를 설명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두 사람이 다르게 살아가는 날들을 보여주며, 이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아친은 부동산 개발 회사에서 일한다. 도시가 바뀌는 일이 그에게는 자기 삶을 넓힐 기회이기도 하다. 반면 한때 야구선수였던 아룽은 집안의 포목 일을 하며 과거의 친구들과 이어져 있다. 두 사람이 어디로 출근하고 누구를 만나는지만 보아도, 하루를 채우는 관심사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아친이 방 안에 놓을 물건을 말하는 모습은 그래서 사소하게 보이지 않는다. 살림을 갖추고 자기 공간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다. 그런데 아룽에게서 그 계획을 함께 꾸려갈 들뜸을 찾기는 어렵다. 어느 가구를 들일지 합의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남아 있는 셈이다. 둘이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다시 물어야 한다.
오래된 연인 사이에서는 그런 질문을 생략하기 쉽다. 가족 사정도 알고 옛 친구도 아니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안다고 느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지난날을 아는 것과 내일의 바람을 아는 것은 같지 않다. 이 영화의 대화가 자주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말을 전혀 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서로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많아서다. 익숙한 사람이기에 오히려 새로 묻지 않는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아룽에게 야구는 끝난 취미 정도가 아니다. 그가 잘하던 일이 있었고, 그 모습을 기억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더는 선수로 살지 않아도 그 시절의 자부심은 남는다. 지금 하는 일이나 앞으로의 계획이 막막할 때, 한때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리는 마음은 낯설지 않다.
허우샤오시엔의 아룽은 그 기억을 화려한 말로 과시하기보다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새 아파트에서도 무심히 야구 동작을 해보는 모습에는 익숙한 것에 기대는 편안함이 있다. 아친이 보려는 미래와 거리가 느껴지면서도, 그 동작을 그저 철없는 버릇으로 웃어넘기기는 어렵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아직 쓸모 있게 느끼게 해주는 기억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제는 그 기억을 둘이 같은 무게로 간직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아룽의 옛 영광이 아친의 새 생활을 마련해주지는 않는다. 그의 의리와 자부심을 이해해도, 아친에게 계속 기다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관객은 아룽이 왜 과거에 머무는지 짐작하다가도 그와 앞으로 살아야 할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곧 그 옆에서 계속 살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룽을 연기한 허우샤오시엔은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이기도 하다. 또 다른 감독의 화면 안에서,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한 남자로 서 있다. 이름을 알고 보아도 인물이 가진 답답함을 대신 풀어주지는 않는다. 말을 잘 골라 자기 심정을 설득해주는 주인공보다, 아친과 마주 앉아도 쉽게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연인으로 오래 남는다.
두 사람의 차이가 가장 구체적인 문제로 드러나는 것은 돈을 쓸 때다. 아룽은 경제적으로 곤란해진 아친의 아버지를 돕느라 저축을 쓴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지켜온 의리를 따르는 행동이다. 그러나 아친에게는 함께 생각하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드는 결정이 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도운 일이니 무조건 고마워해야 한다고 정리할 수 없다.
여기서는 누구를 돕느냐만큼 누구와 의논하느냐도 중요하다. 가족에게 잘하는 사람을 좋은 동반자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행동 때문에 내 계획이 바뀐다면 사정은 복잡해진다. 아룽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와 아친이 새로 만들고 싶은 생활이 같은 돈을 두고 부딪친다. 서로 돈의 액수를 몰라서 벌어지는 갈등이 아니다. 어디까지 과거의 관계를 책임지고, 언제부터 두 사람의 삶을 우선할 것인지가 다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추상적인 사랑의 크기를 재지 않는다. 한 사람이 낸 돈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아친의 실망은 연인을 덜 사랑한다는 증거로 읽기 어렵다. 그와 함께 살고 싶었으니 그 결정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가까운 관계에서 소외되는 느낌은 상대가 나쁜 뜻으로 행동했을 때만 생기지 않는다.
에드워드 양은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을 통해 타이베이의 과거와 미래, 그 사이의 변화를 이야기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아친과 아룽이 다른 삶을 바라게 된 데에는 개인의 성격뿐 아니라 그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도시의 변화도 있다. 어떤 일은 새로운 기회가 되고, 어떤 경험은 예전만큼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다. 도시가 바뀌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아친을 미래, 아룽을 과거라고 외워두고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그러면 아친이 일하는 동안 느끼는 불안도, 아룽이 놓지 못하는 관계에 대한 마음도 단순해진다. 화면의 두 사람은 변화를 설명할 표지판보다 복잡하다.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은 사람도 앞날을 확신하지 못하고, 익숙한 세계에 남으려는 사람도 편안하지 않다.
이 영화의 도시를 오래 보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새 건물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말만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아친과 아룽이 함께하기 어려워진 까닭을 따라가다 보면, 생활이 바뀌는 속도를 연애가 미처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 외에 함께 정해야 할 것이 이렇게 많다.
처음의 빈 아파트로 마음이 돌아간다. 살림을 채우면 누군가 살 집이 되겠지만, 물건을 갖춘다고 두 사람의 미래까지 마련되지는 않는다. 그 방에서 아친이 기대하던 생활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면 아룽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이해하는 만큼, 아친의 말을 조금 더 듣고 싶어진다.
◆ 빈 아파트를 보는 두 사람 — 아친이 말하는 물건들과 아룽의 야구 동작을 함께 보자. 같은 공간 안에서도 관심이 향하는 곳이 다르다. 이후 두 사람이 각자의 일과 관계를 이어가는 모습을 볼 때, 처음부터 어긋나 있던 기대를 떠올릴 수 있다.
◆ 아룽에게 남은 야구 — 옛 선수라는 정보만으로 그를 과거에 갇힌 사람이라고 정리하지 말고, 그 기억이 지금의 아룽에게 어떤 자부심을 주는지 살펴보자. 이해할 만한 마음과 함께 살기 어려운 태도가 한 사람 안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도움의 결과를 감당하는 사람 — 아친의 아버지를 돕는 결정에서 돈을 주는 사람과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을 함께 보자. 선의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관계의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순서가 드러난다.
◆ 각자가 일하는 장소 — 회사와 포목 일을 오가는 두 사람의 생활을 비교해보자. 같은 도시에서 산다고 같은 기회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을 소개하는 배경처럼 보이던 장소가, 상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 〈화양연화〉 (2000, 왕가위) — 이웃으로 사는 두 사람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가까워진다. 두 영화 모두 집과 일상의 장소가 관계를 제한하지만, 오래된 연인과 새로 가까워지는 이웃의 망설임은 다르게 느껴진다.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디까지 다가가는지 비교해볼 만하다.
◆ 〈하나 그리고 둘〉 (2000, 에드워드 양) — 한 가족의 여러 세대가 각자의 관계와 선택을 겪는다. 가까운 사람이라도 상대의 삶을 전부 알 수 없다는 관심이 더 넓은 인물들 사이로 이어진다. 한 연인의 시간에서 가족의 서로 다른 하루로 시선을 옮겨볼 수 있다.
──────────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