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매일 내려온다. 다만 내 차례가 왔을 때 무엇이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더 플랫폼〉의 시설에서는 층마다 두 사람이 살고, 음식이 가득 실린 거대한 식탁이 위층부터 …
음식은 매일 내려온다. 다만 내 차례가 왔을 때 무엇이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더 플랫폼〉의 시설에서는 층마다 두 사람이 살고, 음식이 가득 실린 거대한 식탁이 위층부터 차례로 내려온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먼저 먹는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먹고 남긴 것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이곳에 들어온 고렝(이반 마사게)에게 식사는 곧 눈치와 계산이 된다. 지금 먹을 수 있는 양, 위층에서 먹어치웠을 양, 아래로 내려보내야 할 양이 다르다. 식탁은 그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 감독은 복잡한 사회를 설명하기에 앞서, 누가 먼저 먹느냐는 간단한 규칙 하나로 방 안의 공기를 험악하게 만든다.
고렝과 방을 쓰는 트리마가시(조리온 에길레오르)는 시설의 생활에 익숙하다. 처음 온 사람이 납득하려고 묻는 일들을, 그는 이미 받아들여야 할 조건으로 여긴다. 고렝에게는 이상한 일이 트리마가시에게는 일상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불편한 것은 나이와 성격이 달라서만이 아니다. 한쪽이 아직 따져보려는 일을 다른 쪽은 오래전에 그만둔 듯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들을 넓은 사회 속에 흩어놓지 않는다. 두 침대와 바닥의 큰 구멍이 있는 방에 함께 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라도 피해서 지낼 곳이 많지 않다. 여기에 음식이 내려오면 긴 이야기를 나눌 여유마저 줄어든다. 지금 손을 뻗어야 한다. 곧 식탁이 다음 층으로 떠날 테니까.
남이 먹고 흐트러뜨린 음식을 보고도 기다릴 수 없다는 상황은 설명보다 먼저 몸에 닿는다. 먹기 싫다는 감정과 먹어야 한다는 필요가 충돌한다. 고렝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듣고 있을 때와, 그 앞에 실제로 식탁이 멈췄을 때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달라진다. 말로 세워둔 원칙을 지키려면 당장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설에서는 매달 무작위로 층을 배정받는다. 낮은 층에서 굶주렸다고 다음 달도 반드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지금 음식이 넉넉하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똑같이 생긴 방에서 눈을 떴는데, 식탁에 도착할 음식의 양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이 설정 덕분에 영화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처음부터 서로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나눌 수 없게 만든다. 오늘 아래층에 있는 사람도 나중에는 먼저 먹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 이전의 배고픔을 어떻게 기억할까. 자신처럼 굶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언제 다시 굶을지 모르니 지금 실컷 먹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배고팠다는 같은 경험에서 정반대의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이 시설을 더 막막하게 만든다.
그래서 숫자가 바뀔 때마다 방을 다시 보게 된다. 침대도 구멍도 익숙한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는 조건이 달라진다. 좋은 자리를 얻은 것이 개인의 능력 덕분인지 따질 여지는 크지 않다. 영화가 먼저 보여주는 것은 그 자리에 놓인 뒤 어떻게 행동하는가다. 위층과 아래층의 차이는 멀리 떨어진 두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생활의 차이가 된다.
먹을 것을 조금씩 남기면 아래층에도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어렵지 않다. 실행은 훨씬 복잡하다. 내가 덜 먹어도 바로 아래 사람이 더 먹으면 그다음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약속할 수 있는 범위는 좁은데, 음식이 지나가야 할 길은 길다.
고렝이 이 상황을 바꾸려 할수록 영화의 관심도 달라진다. 한 사람이 착하게 행동하는 데서 끝낼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하고, 거절당했을 때도 다음 행동을 정해야 한다. 좋은 뜻을 이해시키는 말과 상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말은 언제나 같지 않다. 생존이 걸린 사람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일이 어떤 표정과 목소리를 갖게 되는지, 그 과정 자체가 스릴러의 긴장을 만든다.
감독은 시설 밖 세계의 시대와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바깥의 정체를 추리하는 데 정신이 팔리기보다, 안에 갇힌 사람들의 행동을 보게 하려는 선택이다. 덕분에 이 방의 구조는 오래 기억된다. 옆 사람과는 식사를 다툴 수 있고 위아래로는 말을 건넬 수 있지만, 음식이 내려오는 순서는 혼자 바꿀 수 없다.
〈더 플랫폼〉의 식탁은 처음에는 기괴한 볼거리다. 그러나 몇 차례의 식사가 지나면 그 위의 음식보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신경 쓰인다. 지금 이 층에 얼마나 남았느냐가 누군가에게는 불평거리이고, 더 아래에서는 하루를 버틸 수 있느냐의 문제다. 식탁이 바닥 아래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식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야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 처음 온 사람과 오래 머문 사람의 대화 — 고렝과 트리마가시가 같은 규칙을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들어보자. 고렝에게는 설명이 필요한 일이 트리마가시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그 차이를 따라가면 잔혹한 규칙이 일상이 되는 과정이 단순한 악인의 성격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 식탁에 남아 있는 흔적 — 음식의 양뿐 아니라 먼저 먹은 사람들이 남긴 상태도 살펴보자. 아래층 사람은 메뉴를 고르기 전에 위층의 식사를 떠안는다. 화면에 없는 사람들의 행동이 음식의 모양으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이 식탁은 층 사이를 잇는 중요한 장치다.
◆ 새로운 층에서 맞는 아침 — 층이 바뀌었을 때 방의 외형과 인물의 처지 중 무엇이 달라졌는지 보자. 공간은 익숙한데 식사의 전망은 바뀐다. 같은 인물을 다른 조건에서 다시 보게 하는 이 반복이 영화의 불편한 재미를 만든다.
◆ 설득이 부딪히는 거리 — 위아래 층에 말을 건넬 때 상대가 실제로 따를지 확인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가까운 사람과의 약속도 멀리까지 전달되지는 않는다. 연대를 말하는 대사의 내용과, 그 말을 주고받는 공간의 제약을 함께 보면 갈등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 〈괴물〉 (2006, 봉준호) — 가족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대응 절차가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더 플랫폼〉이 닫힌 시설의 규칙을 통해 행동의 한계를 보여준다면, 〈괴물〉은 도시 곳곳을 달리는 가족을 통해 그 답답함을 전한다. 살아남으려는 사람의 급박함과 그를 다루는 제도의 속도가 어떻게 어긋나는지 비교해볼 만하다.
◆ 〈카트〉 (2014, 부지영) — 해고에 맞선 마트 노동자들이 함께 행동하는 과정을 다룬다.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처음부터 마음과 사정까지 같지는 않다. 생존의 필요가 누군가를 경쟁하게 만들고 또 누군가를 모이게 한다는 점에서, 〈더 플랫폼〉의 막막한 식사 뒤에 다른 형태의 공동 행동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