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루이(장루이 트랭티냥)는 오래전 사랑했던 여자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바로 그 여자다. 그를 찾아온 안(아누크 에메)은 알아듣지만, 기억이 흐려진 장루이는…
장루이(장루이 트랭티냥)는 오래전 사랑했던 여자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바로 그 여자다. 그를 찾아온 안(아누크 에메)은 알아듣지만, 기억이 흐려진 장루이는 눈앞의 방문객을 온전히 알아보지 못한다. 안에게서 자기가 사랑한 여자의 모습을 발견하면서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데까지 쉽게 가닿지 못한다.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의 재회에는 그만큼 안타깝고도 묘한 거리가 있다. 잊지 못한 사랑과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이 한자리에 놓인다.
장루이는 한때 자동차 경주 선수였다. 이제 노년의 그가 자꾸 안을 이야기하자 아들 앙투안(앙투안 시르)이 안을 찾아간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 남은 여자를 다시 만나게 해주려는 것이다. 클로드 를루치 감독은 1966년 〈남과 여〉의 두 연인을 반세기 넘게 지난 뒤 다시 마주 앉혔다. 같은 배우들이 같은 인물을 맡는다. 과거를 재연하기 위해 젊은 배우를 데려오는 대신, 옛 영화에 남은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함께 이 이야기를 만든다.
장루이의 말을 듣는 안의 처지는 단순하지 않다. 오랫동안 자신을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정작 지금의 자신은 낯선 사람처럼 마주해야 한다. 지나간 사랑을 그렇게 간직한 사람이니 기뻐해야 할까, 눈앞에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니 서운해야 할까. 그 두 마음이 딱 나누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만남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일과 현재의 상대에게 반응하는 일은 서로 다른 속도로 진행된다.
그래서 안이 누구인지 장루이가 맞히는지만 기다리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많은 부분이 남는다. 그는 옛 연인을 말하고, 안은 자신에 관한 그 이야기를 듣는다. 누구나 사랑이 끝난 뒤 상대에게 어떻게 남았는지 궁금해할 수 있지만, 보통은 이처럼 직접 들을 기회가 없다. 영화는 기억의 어려움을 재회의 장애물로 두면서 동시에 낯선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당사자 앞에서는 미처 하지 못했을 말이, 당사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누크 에메는 이 장면에서 장루이가 작은 몸짓까지 옛 안을 떠올리며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보면 닮았다는 말도 다르게 들린다. 다른 사람이 닮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서 달라진 모습이다. 젊은 날의 연인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과 세월이 지난 연인을 만나는 것은 같지 않다.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오늘의 얼굴을 저절로 알아볼 수 없다는 난처함이 두 사람 사이에 있다.
영화에는 〈남과 여〉의 화면이 돌아온다. 옛 연인의 이야기를 새 배우들이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두 배우가 젊었을 때 실제로 연기한 모습이 나온다. 인물의 과거를 보는 동시에 배우가 지나온 시간을 보게 되는 셈이다. 예전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자신이 그 얼굴을 처음 만났던 시절도 떠오를 수 있다. 처음 보는 관객이라도 이 두 얼굴에 분장만으로 만들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다.
이때 과거의 화면이 지금보다 아름다운지 겨룰 필요는 없다. 젊은 날의 장루이와 안에게 가능했던 몸의 움직임과, 오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들어 있다. 다시 만났다는 기쁨에 기대어 세월의 차이를 지워버리면 오히려 이 영화만이 가진 재료가 사라진다. 지금의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예전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다.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귀하다.
영화의 시작을 생각한 계기도 두 나이의 얼굴과 관계가 있었다. 를루치는 복원된 〈남과 여〉를 상영하는 자리에서 스크린보다 객석의 두 배우에게 눈길이 갔다고 했다. 서로를 보고, 동시에 화면 속 젊은 자신들을 보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을 다시 찍고 싶어졌다. 오래된 영화를 기념하는 일에서 현재의 영화를 만들려는 마음이 생긴 순간이다. 옛 화면은 잘 보관된 추억인 동시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새로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
두 주연만 세월을 건너온 것도 아니다. 첫 영화에서 아이들을 연기한 앙투안 시르와 수아드 아미두가 각각 장루이의 아들 앙투안과 안의 딸 프랑수아즈로 돌아온다. 그때 아이였던 사람들이 이제 부모 세대의 만남에 관여한다. 두 연인의 얼굴만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옆으로 옮기면 한층 긴 시간이 보인다. 부모의 사랑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도 자기 나이를 먹었고, 부모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재회 장면을 두 배우의 실제 감정이 흘러나온 기록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안과 장루이는 영화 속 인물이고 이들에게는 정해진 대사가 있다. 다만 를루치는 익숙한 장면을 반복하는 느낌보다 그 자리에서 처음 마주하는 느낌을 얻고자 했다. 충분히 연습해놓는 대신 촬영 중 대사를 건네며 두 배우의 반응을 담았다. 각본을 버린 즉흥극이라기보다, 각본의 말을 만나는 방식을 달리한 것이다.
아누크 에메는 감독이 때때로 대사를 속삭이고 새로운 생각을 보태면 그에 반응하며 연기했다고 밝혔다. 상대의 말을 이미 외웠다는 것과 지금 그 말을 듣는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안은 오래전의 장루이를 알고 있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오늘의 장루이는 처음 만난다. 촬영 방식도 그 낯섦을 살리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반세기의 친숙함이 있다고 해서 모든 대화가 익숙할 수는 없다.
그렇게 재회에 머무르는 시간은 줄거리를 빨리 진행시키려는 마음을 늦춘다. 다시 사랑하게 되는지, 기억이 돌아오는지를 곧바로 확인하고 싶어도 두 사람은 우선 말을 나누어야 한다. 과거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과 지금 함께 있을 수 있는지는 다른 일이다. 영화가 옛 사랑을 불러온 까닭도 예전과 똑같은 순간을 다시 만드는 데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두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다.
〈남과 여〉의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프랑시스 레의 선율만으로도 두 연인을 떠올릴 수 있다. 이번 영화에는 옛 음악뿐 아니라 그가 새로 쓴 곡도 들어갔다. 니콜 크루아지유와 칼로제로의 목소리가 함께하고, 칼로제로는 편곡에도 참여했다. 예전 노래를 다시 들려주는 일과 지금의 소리를 보태는 일이 나란히 진행된다. 두 얼굴 사이를 오가는 화면과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익숙한 선율이 반갑다고 해서 장루이와 안의 현재가 모두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안은 여전히 자신을 충분히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 앞에 있다. 음악이 불러오는 기억과 눈앞의 관계를 함께 생각할 때, 추억에 잠기는 즐거움에도 약간의 망설임이 생긴다. 아름다웠던 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오늘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의 만남을 시작하게 할 수는 있다.
영화는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을 정확히 셈하기보다 지금 함께 있는 시간을 내준다. 젊었을 때의 사랑을 끝까지 유지했는지 심판하는 자리도, 기억의 상태로 사랑의 크기를 측정하는 자리도 아니다. 장루이가 이야기하는 여자와 그 말을 듣는 여자는 같은 사람이지만 같게 보이지 않는다. 그 간격을 곁에서 견디며 말을 이어가는 안이 있다. 그토록 그리워한 사람이 찾아왔다면, 과거를 모두 되찾기 전에도 오늘 새로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안 — 장루이가 옛 연인을 말할 때 듣고 있는 안의 처지를 함께 생각해보자. 그리워했다는 말과 알아보지 못하는 반응이 동시에 주어져, 재회의 기쁨을 한 가지 감정으로 정리하기 어려워진다.
◆ 옛 영화와 지금의 얼굴 — 젊은 시절의 화면에서 현재로 돌아올 때 같은 배우의 얼굴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보자. 단순히 나이를 비교하기보다 두 시기에 가능한 대화와 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만하다.
◆ 이제 어른이 된 아이들 — 앙투안과 프랑수아즈를 연기하는 배우들도 첫 영화의 아역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두 연인에게 흐른 시간이 다음 세대의 얼굴에도 함께 남아 있다.
◆ 옛 선율에 더해진 소리 — 프랑시스 레의 음악과 새 목소리들을 들어보자. 예전 영화를 기억한다면 반가움이, 처음 만난다면 지금 두 사람의 분위기가 먼저 올 수 있다. 두 방식 모두 영화의 현재에 들어가는 길이다.
◆ 〈비포 선셋〉 (2004, 리처드 링클레이터) — 처음 만난 밤으로부터 9년이 흐른 뒤 두 사람이 파리에서 재회한다. 같은 배우의 시간이 인물의 시간에 겹친다. 오래전의 인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생략할 수 없는 오늘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2020, 오키타 슈이치) —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모모코의 현재에 젊은 시절과 마음속 목소리들이 찾아온다. 과거를 품은 노년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다른 배우가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방식과 같은 배우의 옛 영상을 쓰는 방식의 차이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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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