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톰(라르스 아이딩거)은 ‘죽음’이라는 곡을 연습한다. 작곡가 친구 베르나르트(로베르트 그비즈데크)와 연주자들이 함께 소리를 맞추는 동안, 그의 가족에게도 죽음이 다가오고 …
지휘자 톰(라르스 아이딩거)은 ‘죽음’이라는 곡을 연습한다. 작곡가 친구 베르나르트(로베르트 그비즈데크)와 연주자들이 함께 소리를 맞추는 동안, 그의 가족에게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어머니 리지(코리나 하르포히)도 병들었다. 무대에서는 죽음을 어떤 소리로 들려줄지 고민하지만, 집에서는 아픈 가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쉽지 않다. 〈다잉〉은 이 두 시간을 한 사람의 삶 안에 놓는다.
톰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을 섬세하게 듣는 능력과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꼭 나란히 자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언제 들어오고 어느 속도로 연주할지 정할 수 있는 자리와, 어머니의 다음 말을 막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자리는 다르다. 이 영화의 가족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자동으로 다정해지지 않는다. 오래 피했던 말을 꺼내기도 하고, 자신만의 곤란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톰과 리지는 식탁에서 오래 대화한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사랑했으리라는 기대를 그대로 둘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어머니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아들의 기억과 어머니 자신의 말이 마주한다. 아버지의 장례 뒤이고 어머니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다. 보통이라면 서로를 위로해야 할 자리에서, 두 사람은 관계의 가장 불편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 장면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것은 큰 소리를 내는 순간만이 아니다. 말을 듣고 곧바로 답하지 못하는 시간도 길게 느껴진다. 상대가 방금 한 말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신이 기억해온 과거까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식탁 앞에서는 과거의 일을 설명하는 문장과 지금 눈앞의 사람이 상처받는 일이 동시에 벌어진다.
아이딩거는 톰이 자신도 어머니처럼 차갑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순간을 인물의 모순으로 설명했다. 말의 내용만 들으면 거리를 두려는 사람인데, 얼굴은 그 말만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는 척하는 것과 실제로 아무렇지 않은 것은 다르다. 자신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그와는 다른 반응을 얻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듯 보인다.
관객도 누구의 말이 옳은지만 가르기는 어렵다. 리지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그 말을 듣는 아들이 아프다는 것은 함께 성립한다. 진실을 털어놓으면 바로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이 긴 대화를 견디는 동안 흔들린다. 무엇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일이 관계를 편하게 해주기보다 그동안의 거리를 더 정확하게 드러낼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식탁에 필요한 것은 감동적인 한마디를 기다리는 마음과 조금 다르다. 상대가 원하던 부모나 자식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한 뒤에도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장면이 곧장 끝나지 않는다. 관객 역시 불편한 말을 들은 다음에 남는 얼굴을 계속 보게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생략해왔던 관계의 시간이 여기서 길게 주어진다.
음악을 만드는 자리에서도 톰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베르나르트는 자기 작품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연주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의견과 감정이 얽힌다. 완성된 곡을 아름답게 들려주는 일 뒤에 사람끼리 조율해야 하는 시간이 있다. 관객은 음악을 배경으로만 듣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머문다.
연습 중 톰이 속도를 늦춰보자고 하는 대목이 있다. 작곡가는 처음에는 그 선택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느리게 연주하면서 달라진 소리가 생긴다. 머릿속에서 옳다고 생각한 방식과 함께 연주하며 발견한 방식 사이에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 사람의 곡이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몸을 통과하며 바뀐다.
이 장면은 앞선 식탁과도 흥미롭게 맞닿는다. 대화에서 지나간 말을 다시 꺼내는 일은 새로운 상처를 낼 수 있지만, 연습에서는 같은 구간을 다시 해보며 다른 결과를 만날 수 있다. 음악에는 멈추고 속도를 바꾸어 들어볼 기회가 있다. 삶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족에게 남은 시간은 리허설처럼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두 시간을 오가는 동안 연주의 아름다움과 일상의 곤란이 함께 커진다.
실제 영화음악을 쓴 로렌츠 당엘의 소리는 이런 차이를 관객의 귀에 전달해야 한다. 곡이 좋다는 인물의 말만으로는 장면이 성립하지 않는다. 달라진 연주를 듣고 조금 전과 무엇이 다른지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잉〉에서 음악이 길게 자리를 얻는 것은 이야기를 잠시 멋지게 꾸미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인물들이 말로 나누기 어려웠던 감정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직접 들어보게 한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연주가 곧 연주자의 삶도 잘 풀린다는 보증은 아니다. 베르나르트의 괴로움은 작품의 성과와 간단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듣는 사람이 감동했다는 사실만으로 만든 사람의 문제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영화는 예술이 주는 기쁨을 충분히 들려주면서도 그 기쁨에 사람의 삶 전체를 맡기지는 않는다.
톰의 여동생 엘렌(릴리트 슈탕엔베르크)은 다른 리듬으로 하루를 보낸다. 술과 불안정한 관계가 그의 생활을 흔든다. 가족이 같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이야기로 정돈되기보다, 각자가 자기 곤란을 안고 따로 움직인다. 톰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엘렌의 하루도 거기에 맞춰 준비되지는 않는다.
엘렌이 오빠의 공연 도중 구토하는 장면은 그 어긋남을 거칠게 드러낸다. 한쪽에서는 오래 준비한 음악이 울리고, 다른 쪽에서는 몸이 견디지 못한다. 엘렌이 이 순간을 일부러 망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 난감하다. 공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것과 몸이 그 사정을 따라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매티아스 글래스너 감독은 비극적인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 우스움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하며 이 장면을 예로 들었다. 영화의 웃음은 슬픔과 무관한 농담을 중간에 넣는 방식만으로 나오지 않는다. 인물은 진지하고 상황은 절박한데, 현실은 그 진지함에 맞는 품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관객은 웃음이 나다가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수치와 곤란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아름답게 정리된 가족의 모습을 기대하면 〈다잉〉의 인물들은 여러 번 그 기대를 어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이 보기 좋게 행동할 때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차가운 말을 하고, 상대의 중요한 순간을 망치고, 자기 감정을 잘 모르는 때에도 따라간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인지 판단하는 마음과 이 사람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엇갈린다.
그 엇갈림을 지나고 나면 제목의 죽음은 삶을 정리하는 단정한 결론으로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병들고 떠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일을 하고, 잘못된 말을 한다. 톰이 곡의 속도를 바꾸며 새로운 소리를 찾듯 관계도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 변화에는 지휘봉 하나로 맞출 수 없는 사람이 여럿 있다. 〈다잉〉은 그 불완전한 사람들 곁에서 아름다운 소리와 난감한 침묵을 모두 듣게 한다.
◆ 식탁에서 말이 끝난 뒤 — 톰과 리지의 긴 대화에서 답변 사이의 시간을 보자. 솔직한 말이 나왔다고 곧바로 이해가 따라오지는 않는다. 말의 내용과 그것을 듣는 얼굴 사이의 차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낸다.
◆ 차갑다는 말과 눈물 — 톰이 자기 감정을 설명하는 말과 얼굴이 같은 방향인지 살펴보자. 스스로를 단정하는 문장으로 다 표현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 모순을 보면 인물을 차갑거나 따뜻한 한쪽으로만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 느려지는 연습 — 연주의 속도를 바꿀 때 귀를 기울여보자. 의견으로 다투던 것과 실제로 소리를 다시 내보는 일은 다르다. 같은 곡에서 다른 감정이 생기는 순간을 직접 듣는 즐거움이 있다.
◆ 공연과 엘렌의 몸 — 음악이 흐르는 자리에서 엘렌에게 생기는 곤란을 함께 보자. 중요한 일을 준비한 사람과 몸을 가누기 힘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있다. 웃음과 안쓰러움이 어느 지점에서 겹치는지 느껴볼 만하다.
◆ 〈가을 소나타〉 (1978, 잉마르 베리만) —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딸이 재회해 오래된 상처를 말한다. 음악을 표현하는 능력과 가족에게 사랑을 전하는 능력이 어긋나는 모습을 〈다잉〉의 식탁 및 연주 장면과 비교할 수 있다.
◆ 〈다가오는 것들〉 (2016, 미아 한센러브) — 철학 교사 나탈리가 가족과 일상의 변화를 겪으며 자기 삶을 다시 꾸려간다. 죽음과 이별이 찾아와도 생각하고 일하는 하루가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어볼 만하다. 극적인 화해 외에 삶이 달라지는 방식에도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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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