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노래를 부르는데, 왜 내 노래라고 할까 | MovieLAB LAB

노래가 끝나면 박수를 받는다. 그런데 그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 말하는 순간에도 같은 박수가 이어질까. 〈러덜리스〉의 샘(빌리 크루덥)은 세상을 떠난 아들이 남긴 노래를 부르기 …

아들의 노래를 부르는데, 왜 내 노래라고 할까 | MovieLAB LAB

노래가 끝나면 박수를 받는다. 그런데 그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 말하는 순간에도 같은 박수가 이어질까. 〈러덜리스〉의 샘(빌리 크루덥)은 세상을 떠난 아들이 남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좋은 곡을 알아본 젊은 음악가가 다가오고, 함께 연주할 사람들이 모인다. 아들의 음악 덕분에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지만, 정작 아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무대가 즐거워질수록 이 침묵이 신경 쓰인다.

샘은 대학의 총격 사건으로 아들 조쉬(마일즈 헤이저)를 잃었다. 한때 잘나가던 광고업계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배에서 살며 하루를 버틴다. 그러던 그에게 아들의 데모 녹음이 담긴 상자가 온다. 생전에 함께 나누지 못했던 음악을 뒤늦게 듣고 익힌다는 출발은 애틋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애틋함을 곧바로 믿고 끝까지 가게 두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노래가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뜻일 수 있는지 묻는다.

전자레인지의 문이 열리면 다른 날이다

샘이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대목에는 짧지만 선명한 시간의 변화가 있다. 피자를 가져와 술을 따르고 전화 연결을 끊은 뒤, 전자레인지를 여는 동작이 다른 날의 피자로 이어진다. 집은 어질러져 있다. 하루를 넘겼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그동안 달라진 생활은 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끼니와 술이 날짜를 대신한다.

이 편집은 슬픈 표정을 오래 보여주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상실을 느끼게 한다. 밖에서는 날이 지나가는데 집 안의 사람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샘에게 시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을 구별해줄 일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가 다시 음악을 듣고 연주할 때 생기는 변화도 이 반복과 비교하며 볼 수 있다. 한 곡을 익히는 데 쓴 시간에는 이전과 다른 일이 남는다.

녹음 속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그 노래를 직접 부르는 일도 같지 않다. 처음에는 남겨진 것을 받아들이던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호흡과 손을 움직여야 한다. 이미 끝난 녹음을 다시 재생할 수는 있어도 아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샘의 노래에는 그 간격이 남는다. 아들의 창작물을 이어가면서도 아들에게 곡의 뜻을 물어볼 수 없는 사람의 연주다.

윌리엄 H. 메이시 감독은 노래가 조쉬의 목소리를 전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귀에 남는 팝송을 원했고, 웃음과 짓궂은 면도 담으려 했다. 조쉬는 단지 잃어버린 아들이라는 설명만으로 머물지 않는다. 아버지가 몰랐던 취향과 말투를 노래로 남긴다. 관객 역시 샘이 슬퍼하는 이유를 듣는 동시에, 샘과는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을 듣게 된다.

작은 상품들이 진열된 가게에서 카운터 뒤에 앉은 남성

연주가 잘될수록 함께할 사람이 늘어난다

샘의 노래에 끌린 퀜틴(안톤 옐친)은 함께 음악을 하자고 나선다. 샘에게는 아들과 연결된 사적인 곡이지만, 퀜틴에게는 지금 해보고 싶은 음악이다. 두 사람이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부터 다르다. 이 차이가 합주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나중에는 서로에게 무엇을 알려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로 돌아온다.

두 사람과 동료들이 밴드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여유와 장난도 있다. 차고 연습에 샘이 늦게 들어오자 퀜틴이 그의 지각을 노래에 끼워 넣는 순간이 그중 하나다. 곡은 죽은 사람이 남긴 물건인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을 거는 수단이 된다. 샘이 대답하고 반응해야 할 상대가 눈앞에 있다. 아들과의 관계를 혼자 되짚을 때와 달리 다른 사람의 시간에 맞춰야 한다.

공연이 이어지는 몽타주는 음악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밴드의 시간을 앞으로 보낸다. 감독은 곡을 충분히 들려주면서도 이야기가 멈추지 않도록 이 구성을 골랐다고 밝혔다. 관객은 곡의 일부만 듣고 넘어가기보다 노래를 알아가면서, 그 노래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도 함께 보게 된다. 합주가 쌓이는 만큼 샘이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 늘어난다.

퀜틴이 쓰는 곡이 조쉬의 곡과 다른 소리를 내는 점도 귀 기울일 만하다. 음악을 만든 이들은 악기 구성과 보컬의 소리, 리듬을 달리해 두 사람을 구별했다. 새 친구는 떠난 아들을 똑같이 재현해주지 않는다. 자기 음악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다. 샘이 아들의 곡을 부르면서 얻은 관계는 아들을 기억하는 데만 쓰일 수 없다. 퀜틴에게도 자기 노래로 걸어갈 다음 시간이 있다.

야외에서 남성과 마주 선 긴 머리의 여성

좋아하는 노래에 관해 모르는 것이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 샘의 침묵 때문에 앞서 들었던 노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사실이 드러나는지는 미리 밝히지 않는 편이 좋다. 다만 이 영화의 변화는 처음의 감동이 가짜였다고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노래를 듣고 좋다고 느낀 일은 이미 일어났다. 그 뒤에 알게 된 사실과 처음의 감정을 어떻게 함께 받아들일지가 남는다.

노래를 만든 사람을 모른 채 함께 연주하는 동료에게도 사정이 있다. 샘에게는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이야기여도, 함께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연주하는지 판단할 정보가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슬픔을 피하려고 숨긴 것과 동료가 속았다고 느끼는 일을 한쪽의 마음만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솔직한 설명을 요구한다.

조쉬를 알았던 케이트(셀레나 고메즈)의 혼란도 이 음악의 바깥에 남겨둘 수 없다. 각본가들은 그녀가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대목을 중요하게 짚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의 기억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같은 사람을 잃었어도 슬픔의 모양과 말할 수 있는 범위는 다를 수 있다. 케이트가 느끼는 불편함은 샘의 노래가 성공하는 것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샘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듣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공연 장면의 의미가 달라진다. 노래가 좋아서 모인 사람, 함께 연습한 사람, 그 곡의 주인을 알았던 사람은 같은 객석에서도 다른 것을 듣는다. 박수는 곡에 대한 반응일 수 있지만 샘이 말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동의일 수는 없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노래 밖의 말이기도 하다.

〈러덜리스〉의 노래를 다시 들을 때에는 멜로디뿐 아니라 그때 샘이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까지 떠오른다. 아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던 아버지가 자기 이름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영화는 그 질문을 음악을 멈추는 방식이 아니라, 계속 음악을 듣게 하는 방식으로 남긴다.

감상 포인트

1. 날짜를 건너뛰는 전자레인지 집 안의 시간 변화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자. 같은 음식과 술이 이어지는 생활에서 샘이 잃은 것은 사람뿐 아니라 하루를 나누던 일들이다. 이후 연습 시간이 생길 때의 차이도 느껴볼 만하다.

2. 노래 안으로 들어오는 지각 농담 퀜틴이 샘의 지각을 노래로 놀리는 순간을 눈여겨보자. 아들이 남긴 음악에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들어온다. 추억을 듣던 샘이 누군가의 장난에 반응해야 하는 변화다.

3. 조쉬의 곡과 퀜틴의 곡 악기와 보컬, 리듬을 비교해보자. 샘이 만난 젊은 음악가는 아들과 닮은 자리만 차지하지 않는다. 자기 소리를 내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음악이 구별해준다.

4. 노래를 듣는 사람의 사정 샘의 감정과 더불어 동료와 케이트의 반응을 보자. 곡의 사연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같은 공연의 의미가 달라진다. 박수를 받는 것과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게 된다.

관련 작품

〈싱 스트리트〉(2016), 존 카니 가정과 학교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소년이 밴드를 만든다. 함께 곡을 만들고 연주하는 시간이 실제 관계를 바꾼다는 점을 이어볼 수 있다. 러덜리스가 남겨진 노래에서 출발한다면, 이들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노래로 만든다.

〈크레이지 하트〉(2009), 스콧 쿠퍼 술에 기대어 살아가는 컨트리 가수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생활을 돌아본다.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능력과 무대 밖에서 관계를 지키는 일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기 좋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