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덜리스〉를 연출한 윌리엄 H. 메이시는 작곡가 이프 바즐레이에게 풍성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원한다고 말했다. 돌아온 구상안에는 우쿨렐레와 작곡가의 가성으로 부른 소리가 들어 있…
〈러덜리스〉를 연출한 윌리엄 H. 메이시는 작곡가 이프 바즐레이에게 풍성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원한다고 말했다. 돌아온 구상안에는 우쿨렐레와 작곡가의 가성으로 부른 소리가 들어 있었다. 메이시는 자신이 생각한 음악이 들리지 않아 당황했다. 바즐레이는 그 목소리를 첼로라고 생각하고 믿어달라고 했다. 완성될 음악을 서로 다른 소리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 연기한 배우도 첫 장편을 연출하면서는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메이시에게 음악은 좋아하는 대상이었지만, 영화에 필요한 음악을 동료에게 설명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리를 판단하는 일은 새로웠다. 우쿨렐레 녹음에서 앞으로 들어올 악기의 소리를 떠올려야 했다.
〈러덜리스〉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 샘(빌리 크루덥)이 남겨진 노래를 부르며 젊은 음악가와 밴드를 만드는 영화다. 노래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 노래를 둘러싼 사람들의 사정이 함께 움직인다. 메이시가 만들어야 했던 것은 좋은 음악이 흐르는 배경만이 아니었다. 화면 속 사람들이 지금 그 곡을 연주하고 있다고 믿게 할 소리와 몸, 곡이 흐르는 동안에도 바뀌는 관계가 필요했다.
처음에 메이시는 배우이자 음악가인 사람들을 모아 밴드를 만들고, 영화에서도 모든 곡을 라이브로 연주하게 하려 했다. 음악을 함께 만든 찰턴 페터스가 그를 말렸다. 결국 곡을 먼저 녹음하고 촬영 현장에서 재생하는 방식을 택했다. 좋아하는 밴드를 실제로 꾸리는 상상과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방법 사이에서 동료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현장 소리를 모두 버린 것은 아니다. 배우들이 미리 녹음한 음악에 맞춰 연주할 때에도 소리를 녹음했다. 후반 작업에서는 심벌과 드럼의 타격음, 기타 줄을 건드리는 소리 같은 일부를 사전 녹음과 섞었다. 메이시는 그 결과가 실제 연주처럼 느껴진다고 회고했다.
이 과정을 알고 공연 장면을 보면 귀에 들리는 음악과 눈앞의 몸 사이를 더 살피게 된다. 노래의 선율을 듣다가 악기를 건드리는 손에 눈이 가면, 하나의 곡으로 들리던 음악이 여러 사람의 행동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소리와 동작이 함께 다가올수록 그 순간 사람들끼리 연주를 맞추고 있다는 감각이 강해진다. 작은 타격음은 음악의 완성도와 다른 방식으로 현장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메이시의 배우 경험도 새 과제를 만난다. 한 사람의 연기가 설득력을 얻는 데에는 대사와 표정뿐 아니라 그 몸에 붙어 들리는 소리도 관여한다. 음악가는 곡을 만들고 배우는 연주를 익히며, 음향 작업자는 따로 기록된 재료를 이어준다. 관객이 한 밴드의 공연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에는 여러 동료의 일이 겹쳐 있다.
메이시는 좋은 곡이 시작되자마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음악영화를 볼 때 아쉬웠다고 말했다. 〈러덜리스〉에서는 곡을 충분히 듣게 하면서 이야기도 앞으로 보내고 싶었다. 여러 순간을 음악에 맞춰 이어 붙이는 몽타주는 그 두 가지를 함께 해볼 방법이었다.
클럽 공연을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카메라가 크게 원을 그리며 움직이도록 구상했다. 그는 이 부분을 사전에 그림으로 정리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찍어야 했으므로 한꺼번에 촬영할 수도 없었다. 따로 찍은 화면들이 음악의 흐름 안에서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곡이 끊기지 않은 채 화면이 바뀌면 관객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과 연주가 계속된다는 감각을 함께 받는다. 한 번의 공연을 지켜보는 것과 여러 차례의 만남을 지나가는 일이 겹친다. 인물 사이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찾으면서도, 귀는 아직 같은 음악 안에 머물 수 있다.
그 안에서 배우들이 한 팀으로 보이는 일도 중요했다. 메이시에 따르면 바에서 벌어지는 부분은 대체로 이야기 순서에 따라 촬영했다. 밴드 멤버를 맡은 출연자들은 촬영 뒤에도 함께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다음 날 일을 해야 하니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실제로 함께 연주하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감독에게는 그 즐거움이 다음 날의 촬영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돌볼 책임도 있었다.
화면 속 연주가 들뜰수록 샘을 그 무리 가운데서 보게 된다. 혼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곡을 맞추는 사람으로 보인다. 메이시는 음악을 길게 듣게 하면서 그 얼굴 곁에 다른 연주자들을 놓았다. 한 곡을 좋아하게 되는 동안 그 곡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눈에 익는다.
각본가 제프 로비슨은 촬영 중 메이시와 나눈 대화를 기억했다. 샘이 술집에서 나와 술에 취한 채 자전거를 타다가 밴에 부딪히는 장면을 찍은 뒤였다. 메이시는 웃으면서 자신들이 코미디를 만드는지 드라마를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크게 웃길 수 있는 몸의 행동이 슬픔 속에서 생활하는 인물에게 일어난 순간이었다.
메이시 자신도 유머를 특정 지점에 농담으로 삽입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장면의 분위기가 진지함에서 가벼움으로 움직이는 감각에 가까웠다. 인물이 겪는 일이 무거워도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 같은 무게로 보이지는 않는다. 관객은 웃음이 난 뒤에도 그 행동을 한 사람의 처지를 다시 떠올릴 수 있다.
로비슨과 케이시 트웬터가 쓴 각본에 참여한 메이시는 이야기에 더 큰 위험과 갈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고쳐 쓰는 과정에서 영화의 중요한 전환이 생겼다. 음악을 좋아하고 인물에게 마음을 주는 관객에게도, 그 마음을 다시 살펴볼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공연 장면의 즐거움도 영화의 다른 감정과 따로 떼어놓기 어렵다. 연주가 좋아질수록 사람들을 더 보고 싶어지지만 그들이 겪는 일이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래가 끝난 뒤 어떤 얼굴이 남는지, 방금 즐겁게 듣던 마음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
◆ 소리와 손이 만나는 순간 — 밴드의 연주를 들으며 악기를 다루는 손과 몸의 박자를 함께 보자. 하나의 곡으로 들리던 음악이 여러 사람이 맞춰가는 행동으로 느껴진다. 소리의 매끈함과 몸의 현장감이 어떻게 함께 오는지 살펴볼 만하다.
◆ 음악은 이어지고 화면은 바뀔 때 — 공연을 연결한 부분에서 화면이 바뀌어도 귀가 어떤 흐름을 붙잡고 있는지 느껴보자. 시간의 변화는 눈에 보이고 곡의 지속은 귀에 남는다. 그 사이에 인물들이 얼마나 가까워 보이는지도 달라질 수 있다.
◆ 샘 곁의 다른 연주자들 — 샘이 노래할 때 옆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옮겨보자. 혼자 부르는 곡과 밴드 안에서 부르는 곡은 관계의 크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음악이 좋아지는 즐거움에 함께할 사람이 생긴다는 감각이 더해진다.
◆ 자전거 장면의 웃음 뒤에 남는 것 — 샘의 우스운 행동을 본 뒤 그 사람의 상태를 다시 생각해보자. 행동 때문에 웃는 순간과 인물이 걱정되는 마음이 꼭 따로 오지는 않는다. 영화가 가벼워졌다가 다시 무거워지는 감정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러덜리스〉(2014), 윌리엄 H. 메이시 — 배우와 음악가, 음향과 편집의 선택이 한 밴드의 공연으로 모인다. 노래를 듣는 즐거움이 커질 때 인물을 바라보는 마음도 어떻게 달라지는지 따라가볼 수 있다.
〈싱 스트리트〉(2016), 존 카니 — 소년들이 밴드를 꾸리며 서로의 연주와 모습을 바꿔가는 영화다. 혼자 좋아하던 음악이 함께 만드는 음악이 될 때 생기는 들뜸을, 〈러덜리스〉의 밴드와 나란히 느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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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무비랩이 검토·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