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남극의 추위보다 유람선에서 함께 지낼 사람들이 더 걱정이다. 모르는 사람과 계속 마주치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여행이라니. 딸 비(엠마…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남극의 추위보다 유람선에서 함께 지낼 사람들이 더 걱정이다. 모르는 사람과 계속 마주치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여행이라니. 딸 비(엠마 넬슨)가 원해서 가족 여행에 동의했지만 출발 전부터 피곤하다. 그런데 〈어디갔어, 버나뎃〉에서 결국 홀로 남극에 가는 사람은 그다. 그토록 여행을 꺼리던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시애틀에서 남편, 딸과 사는 버나뎃은 이웃과 자주 부딪히고 사람 만나는 일을 피한다. 하지만 늘 이렇게 집 안에 머물던 사람은 아니다. 한때는 독창적인 설계로 인정받던 건축가였다. 오랫동안 일을 쉬는 사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까다롭고 다루기 어려운 이웃으로 더 익숙해졌다. 이 영화는 사라진 엄마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면서, 그가 다시 하고 싶어진 일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한 사람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과 자기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소란스러운 가출을 통해 들여다본다.
버나뎃은 사람을 피한다고 조용히 지내지는 않는다. 시애틀의 도시 계획과 이웃들의 태도에는 할 말이 많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눌 대화는 부담스러워하면서, 온라인으로 고용한 비서에게는 갖가지 부탁과 불만을 길게 전달한다. 현실에서 피하고 싶은 일이 늘어날수록 멀리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일도 많아진다.
그 말들을 듣다 보면 버나뎃에게 세상을 향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공간과 생활방식을 그는 예민하게 본다. 문제는 그 관찰을 가지고 무언가 만들 곳이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점을 찾아내는 눈은 여전히 바쁜데, 자기 아이디어를 실제로 펼칠 일은 멈춰 있다. 그래서 건축가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도시를 향한 긴 불평도 조금 다르게 들린다. 지어보고 싶은 마음이 갈 곳을 잃었을 때, 주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더 잘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비와 함께 있을 때의 버나뎃은 이웃 앞에서와 다르다.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신디 로퍼의 노래를 함께 부른다. 사람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엄마가 딸과는 같은 노래에 마음을 싣는다. 그러다 눈물을 보인다. 누군가와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사람에게도 지금의 생활이 버거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짧은 변화 안에 들어 있다.
비는 엄마가 말썽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함께 노래하고 대화하던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버나뎃을 걱정하거나 못마땅해할 때 같은 결론에 곧장 도착하지 않는다. 비에게는 그들이 보지 못한 엄마가 있다. 딸이 엄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엄마에 관한 설명을 남들에게만 맡기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이렇게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버나뎃을 보여준다. 이웃에게는 날카롭게 말을 쏟아내던 사람이 딸 앞에서는 자기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드러낸다. 함께 노래하는 즐거움 속에서도 눈물이 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면 다음번의 까칠한 말도 가벼운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웃긴 말을 거침없이 하는 연기와 지친 마음을 내보이는 연기가 이어지면서, 소동을 일으키는 버나뎃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집안의 갈등이 커지던 중 버나뎃이 온라인 비서에게 맡긴 일은 국제 범죄와 연결되고, FBI 조사까지 시작된다. 남편 엘진(빌리 크루덥)은 아내를 입원시키려 한다. 버나뎃은 그 계획을 피해 집을 나선다. 가족에게는 갑작스러운 실종이지만, 관객은 그가 무엇을 피해 떠나는지 알고 있다.
연출을 맡은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마리아 셈플의 원작 소설을 옮기면서 중요한 선택을 했다. 소설에서는 딸이 여러 기록을 통해 엄마의 행방을 되짚지만, 영화는 버나뎃의 곁에 더 오래 남는다. 감독은 관객이 다른 인물들의 설명만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가 갈등을 겪는 모습을 직접 보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배우가 화면에서 오래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선택 덕분에 버나뎃은 찾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실종자로만 남지 않는다. 그가 집을 떠나기 전에도 자기 나름의 말과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관객은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행동에 이르기까지 따라온 시간이 있다.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궁금증과 함께, 그곳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
이동이 주는 즐거움도 커진다. 집과 동네를 벗어나기 어려워하던 사람이 훨씬 먼 곳으로 간다. 현실적으로 많은 조건이 필요한 여행이고 소동도 만만치 않지만, 영화는 그 이동을 유쾌하게 밀어붙인다. 처음에는 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떠올리며 여행을 걱정하던 버나뎃이, 새로운 장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된다는 변화가 중요하다. 무엇이 싫은지 말하던 사람에게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가 생긴다.
버나뎃은 남극에서 새로운 건축 작업에 마음이 움직인다. 오랫동안 쉬었다고 해서 설계에 대한 관심까지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한때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칭찬을 다시 듣는 것과, 지금 실제로 일을 해보고 싶어지는 것은 다르다. 과거의 경력은 다른 사람들이 감탄할 이야기지만 새 작업은 자신이 시간을 쓰고 선택해야 할 일이다. 그는 그쪽으로 움직이고 싶어진다.
이 변화가 반가운 이유를 대단한 재능의 귀환으로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일을 다시 한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갈등과 불안이 전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걱정에 대답하느라 분주했던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일을 말하게 된다. 가족에게도 이제는 엄마가 어디 있는지에 더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들어야 할 이유가 생긴다.
딸과 함께 부르던 노래를 떠올리면 이 가출이 가족을 버리는 결심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버나뎃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있고, 다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주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일에 돌아가면, 비와 나눌 이야기도 늘어날 것이다. 다음에 함께 있을 때 엄마가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을 얼마나 신나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 〈파이널 포트레이트〉 (2017, 스탠리 투치) — 화가가 초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 거듭 손보는 시간을 따라간다. 재능을 인정받은 예술가라도 실제로 만드는 일 앞에서는 확신과 불만 사이를 오간다. 버나뎃의 화려한 과거보다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에 관심이 갔다면, 창작 중인 사람의 하루에 더 가까이 머물 수 있다.
◆ 〈패터슨〉 (2016, 짐 자무쉬) — 버스 운전사는 일상의 짧은 틈에 시를 쓴다. 남극까지 가는 큰 이동 없이도 자기만의 작업을 이어가는 인물이다. 창작의 규모와 생활 조건이 전혀 다른 두 영화를 함께 보면, 무엇을 만드는 시간이 한 사람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