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영은 자기 영화 속 여자와 술을 마시고 싶다 | MovieLAB LAB

정가영 감독은 몇 년 만에 자기 영화 〈비치온더비치〉를 다시 보고, 주인공과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 여자를 연기한 사람도 정가영이었다. 직접 쓰고 연기한 인물인데도 다…

정가영은 자기 영화 속 여자와 술을 마시고 싶다 | MovieLAB LAB

정가영 감독은 몇 년 만에 자기 영화 〈비치온더비치〉를 다시 보고, 주인공과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 여자를 연기한 사람도 정가영이었다. 직접 쓰고 연기한 인물인데도 다시 보니 하는 짓이 웃기고 다음 말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감독과 주인공의 얼굴이 같다고 둘을 같은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이 감상이 재미있게 알려준다.

〈하트〉에서도 주인공의 이름은 가영(정가영)이다. 결혼한 남자를 좋아하게 된 가영은 자신과 가까운 성범(이석형)을 찾아가 연애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성범 역시 아내와 아이가 있는 남자다. 고민을 들어달라는 사람도, 듣고 있는 사람도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대화는 현명한 조언 한마디로 끝날 수가 없다.

정가영의 영화에선 이런 사람이 말을 멈추지 않는다. 옆에서 듣다 보면 말리고 싶기도 하고, 저런 말까지 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나기도 한다. 감독은 인물을 단정하게 정리해 소개하는 대신 말할 자리를 준다.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여러 마음이 들린다.

〈하트〉 — 전화하는 가영

조언이 필요해서 찾아온 걸까

연애 상담을 하면서 꼭 해결책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 편을 들어주거나, 말리더라도 조금 덜 엄격하게 말려주기를 기대할 때가 있다. 〈하트〉의 가영과 성범을 보면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만큼 왜 하필 이 사람에게 말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서로의 사정을 안다는 친밀함이 대화를 편하게 해주면서도 복잡하게 만든다.

성범은 가영의 말을 판단할 수 있는 완벽한 바깥사람이 아니다. 가영도 그가 어떤 처지인지 모르는 채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충고가 나오면 그 말의 옳고 그름 외에 말하는 사람의 사정까지 듣게 된다. 남의 마음을 정리해주려던 사람이 자기 마음을 들킬 수도 있다.

정가영은 대화에 생기는 긴장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긴장은 상대가 숨긴 엄청난 비밀을 밝혀내는 데만 있지 않다. 조금 더 말할지, 못 들은 척할지, 화제를 돌릴지를 고르는 순간에도 생긴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감추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인물이 자기 욕망을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시원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할 자유와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의 곤란함이 한 장면 안에 있다. 가영의 말이 재미있다가도 상대의 표정을 보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정가영은 말을 많이 하는 여자뿐 아니라 그 말을 받아내는 사람도 필요로 한다.

자기 얼굴로 연기한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밤치기〉에서 정가영이 박종환을 캐스팅하며 중요하게 본 것도 상대의 반응이었다. 주인공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있어야 했고,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 모습도 필요했다. 한 사람의 거침없는 대사만으로 술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다음 질문도 힘을 얻는다.

직접 연기하는 일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정가영은 〈하트〉를 찍은 뒤, 연기에 집중하느라 감독으로서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 있는 동안에는 모니터 뒤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놓친다는 것이다. 자기 얼굴을 쓴다는 편리함과 두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부담이 함께 있었다.

〈하트〉의 가영을 연기할 때는 자기와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인물의 이름과 얼굴이 감독의 것이라고 해서 모든 감정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쓴 사람도 막상 연기하려면 이해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영화 속 가영이 실제 정가영인지 따지는 질문만으로는 이런 작업을 놓치기 쉽다.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읽은 배우 제섭(최태환)이 가영에게 본인 이야기인지 묻는 대목도 그 궁금증을 돌려준다. 관객 역시 하려던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실제로 누구를 좋아했는지 알아내는 데 매달리면, 지금 눈앞에서 서로를 떠보는 사람들의 말은 뒷전이 된다. 정가영의 인물은 이력서보다 대화할 때 더 잘 보인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다른 영화가 된다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는 정가영이 주인공을 연기하지 않는다. 함자영은 전종서가, 박우리는 손석구가 맡았다. 두 사람이 데이팅 앱으로 만나면서 연애에 기대하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을 드러낸다. 감독은 배우에게 자리를 내주고, 자신이 쓰던 대화가 다른 목소리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됐다.

정가영은 다른 영화를 보다가 배우의 말이나 억양이 재미있으면 기억해두었다가 출연을 제안한다고 했다. 문장에 담긴 뜻만큼 누가 어떻게 말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같은 말도 머뭇거리면 부탁이 되고, 너무 자신 있게 하면 허세가 될 수 있다. 〈하트〉의 말맛에 관심이 갔다면 다른 배우를 만난 뒤의 대화도 들어볼 만하다.

그는 촬영이 진행되면서 전종서가 해석한 자영이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감독이 처음 상상한 모습에 배우를 맞추는 것만이 연출은 아니었다. 배우가 인물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일도 있었다. 자기 영화에 직접 출연해온 감독에게는 특히 구체적인 변화다.

정가영은 이 영화에 잠깐 등장할 생각도 했지만 장면의 분위기에 맞지 않아 접었다. 자신이 나오고 싶은 마음보다 완성될 장면을 앞세운 선택이었다. 자기 얼굴이 화면에 없어도, 인물들이 굳이 한마디를 더 하는 순간에는 여전히 이 감독의 관심이 남는다. 말을 끝내고 돌아서면 편할 텐데 상대의 대답이 궁금해서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정가영이 술을 한잔 더 나누고 싶어 할 만한 사람들이다.

감상 포인트

◆ 상담 상대를 고르는 마음 — 가영이 무엇을 고민하는지만큼 왜 성범에게 그 말을 꺼내는지 생각해보자. 서로를 아는 사이라는 조건이 조언을 단순하지 않게 만든다. 말의 내용과 두 사람의 관계를 함께 들으면 대화의 민망한 재미가 살아난다.

◆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 — 가영의 거침없는 말에만 집중하지 말고 듣는 사람의 반응도 보자. 상대가 바로 동의하지 않으면 질문하는 사람도 태도를 바꾸게 된다. 정가영이 대화에서 찾는 긴장은 말과 말 사이에도 있다.

◆ 영화 속 가영과 감독 정가영 — 이름과 얼굴이 같아도 인물의 행동을 감독의 실제 경험으로 단정하지 말자. 배우 제섭의 질문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자신도 같은 호기심으로 보고 있었는지 돌아볼 만하다. 실제 여부를 잠시 내려놓으면 장면 안의 관계가 더 잘 들린다.

◆ 같은 감독, 다른 목소리 — 〈연애 빠진 로맨스〉까지 이어 본다면 배우가 대사를 자기 말처럼 만드는 순간을 찾아보자. 말끝이나 억양에 따라 인물의 자신감과 망설임이 달라진다. 감독이 직접 연기하던 시기의 대화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관련 작품

◆ 〈하트〉 (2019, 정가영) — 연애 고민을 털어놓는 여자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따라간다. 누가 옳은 답을 내는지보다 서로에게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살피면, 상담처럼 시작한 말이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있다.

◆ 〈연애 빠진 로맨스〉 (2021, 정가영) — 전종서와 손석구가 정가영의 대화를 자기 목소리로 들려준다. 관계에 기대지 않으려는 말과 상대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마음이 어떻게 어긋나는지, 두 배우가 만드는 속도와 말맛으로 즐겨볼 만하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