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안으로 돌을 던진다. 돌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뒤늦게 돌아온다. 〈일 부코〉의 탐험가들은 아직 보지 못한 공간을 그렇게 가늠한다. 관객도 잠깐의 기다림에 동…
구멍 안으로 돌을 던진다. 돌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뒤늦게 돌아온다. 〈일 부코〉의 탐험가들은 아직 보지 못한 공간을 그렇게 가늠한다. 관객도 잠깐의 기다림에 동참한다. 화면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이, 소리는 저 아래에도 공간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영화가 동굴로 데려가는 방법은 먼저 내부의 장관을 펼쳐 보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는 1961년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의 비푸르토 동굴 탐사를 다룬다. 탐험가들이 내려가는 곳은 환하게 조명이 설치된 관광 동굴이 아니다. 빛이 닿지 않는 부분은 검게 남아 있다. 관객에게 전체 구조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안내도가 먼저 주어지지 않으므로, 지금 보이는 벽과 그 너머를 쉽게 구별하기 어렵다. 깊이는 숫자를 듣기 전에 기다림과 어둠으로 다가온다.
탐험가들은 잡지의 종이에 불을 붙여 아래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작은 불빛이 내려가는 동안 잠깐 볼 수 있었던 것이 다시 사라진다. 이때 종이는 읽는 물건이면서 공간을 알아보는 도구다. 한 장의 종이로 동굴 전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 불이 내려가는 경로만큼은 따라갈 수 있다. 영화의 관찰도 이렇게 조금씩 진행된다. 새로운 부분을 봤다는 사실이 나머지 어둠까지 안다는 뜻은 아니다.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탐험가의 헬멧에 붙은 조명이 중요해진다. 고개를 돌리면 빛의 방향도 바뀐다. 방금 보였던 면이 사라지고 다른 면이 나타난다. 그 사람의 작은 움직임이 관객에게 보이는 공간의 범위를 바꾸는 셈이다. 눈에 잘 보이도록 동굴을 정리해놓고 사람을 넣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이 어디를 보는지에 따라 화면이 달라진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과 촬영감독 레나토 베르타는 이 제한을 유지하려 했다. 베르타는 헬멧 조명을 준비했고, 지상의 모니터에서 동굴 아래로 내려간 촬영팀의 화면을 확인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뀌는 빛에 맞춰 조리개를 조정해야 했다. 촬영의 수고를 알고 나면 어둠이 단순히 빛이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환히 채우지 않기로 한 선택이 화면을 만든다.
그 선택은 관객의 역할도 바꾼다. 어둠을 해소해줄 다음 장면만 기다리는 대신, 지금 들리는 것과 잠깐 보인 것을 연결해야 한다. 돌이 닿는 소리, 조명이 비춘 벽,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각자 머릿속에서 맞춰본다. 화면 밖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일이, 이 영화에서는 인물의 비밀을 추측하는 대신 공간을 상상하는 일이 된다.
영화에는 동굴과 다른 방향으로 뻗는 건축물이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텔레비전은 밀라노의 피렐리 타워를 보여준다. 북쪽 도시가 높이를 늘려가는 동안 탐험가들은 남쪽 땅 아래로 들어간다. 위로 올라가는 건물과 아래로 내려가는 몸의 방향은, 같은 시대 안에 서로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한다.
이 대비를 감독은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기와 연결했다. 도시와 일자리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던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남쪽 동굴의 어둠을 찾는 탐험이 마음을 끌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 속 탐험가들에게 경제 성장에 반대하는 대사를 맡기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과 텔레비전의 영상이 나란히 놓일 뿐이다. 관객은 두 방향의 차이를 보고 시대와 사람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잡지에 실린 유명인의 얼굴도 그 시대를 동굴 안으로 가져온다. 종이에는 정치인과 영화배우의 사진이 있다. 지상에서 얼굴과 이름을 널리 알리는 인쇄물이 아래에서는 잠깐의 빛이 된다. 유명인의 삶을 설명하는 기사보다 종이가 타며 어디까지 내려가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눈길을 끌기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쓰임이, 사람들이 자리를 옮기는 동안 달라진다.
탐사대 역시 각자의 이름과 사연으로 관심을 모으지 않는다. 출연한 이들은 실제 동굴 탐험가들이다. 감독은 이미 아는 장소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마치 처음 발견한 것처럼 환호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역사적 탐사를 다루되 그날의 감정을 흉내 내는 연극보다, 동굴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익숙한 행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덕분에 관객은 누가 가장 용감한지 골라내기보다 여러 사람이 탐사를 지속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영웅 한 명의 얼굴에 집중되지 않는 시간에는 벽과 빛, 내려갈 길도 함께 들어온다. 목적지에 도착해 환호하는 순간만으로 탐사의 가치를 정하지 않으므로, 내려가는 중간의 동작들도 결과를 위한 준비로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영화는 그 과정에 머무를 시간을 준다.
지상에는 늙은 목동(니콜라 란자)이 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던 영화는 목동과 가축이 있는 산으로 돌아온다. 그는 짐승들을 부르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풍경 안에 퍼진다. 탐험가들이 아직 알아가는 산에서 목동은 이미 생활하고 있다. 한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새로 조사할 대상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날마다 머무는 곳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과 가축, 장소 사이에 익숙해진 관계다. 탐험가가 깊이와 구조를 알아보는 방식과 목동이 짐승을 부르는 방식은 다르다. 하나는 측정해 기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곳에서 살아온 몸에 배어 있다. 어느 한쪽만으로 산을 다 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목동의 몸이 쇠약해지는 과정은 동굴 탐사와 나란히 진행된다. 영화는 지상의 몸과 지하의 공간을 번갈아 보게 한다. 감독은 사람의 내부와 산의 내부를 연결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 생각을 반드시 수수께끼의 해답처럼 적용할 필요는 없다. 다만 화면이 동굴에서 목동에게 돌아올 때, 탐사가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두 가지 시간을 오가면 동굴의 깊이를 재는 일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내려간 거리와 별개로 한 사람의 몸은 달라지고, 산에서 들리던 목소리도 다르게 들린다. 탐험의 진전만을 기다리던 시선에 어떤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지 살피는 시간이 더해진다. 큰 발견이 없는 지상의 장면도 지하의 장면 사이를 채우는 휴식으로만 남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소리는 이 두 공간을 이어 생각하게 한다. 소리가 난다고 그 주인이 곧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돌을 던진 뒤 보이지 않는 바닥을 상상했던 것처럼, 목소리를 듣고 화면에 보이지 않는 사람과 장소를 떠올린다. 눈앞에 드러난 것만 좇던 관객에게 들리는 것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긴다. 〈일 부코〉의 탐험은 그런 감각의 변화 속에서도 진행된다.
1. 돌을 던진 뒤의 기다림 돌이 사라진 순간과 소리가 돌아오는 순간 사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공간의 크기와 깊이에 대한 짐작은 시작된다. 설명을 듣기 전에 자기 귀로 지하를 가늠하는 시간이 생긴다.
2. 고개와 함께 움직이는 빛 탐험가의 헬멧 조명이 어느 면을 밝히고 어디를 검게 남기는지 살펴보자. 같은 공간도 몸의 작은 움직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전체를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는 촬영이 관객에게 무엇을 상상하게 하는지 느낄 수 있다.
3. 화면 속 건물과 타는 잡지 텔레비전 속 높은 건물과 동굴로 내려가는 불붙은 종이의 방향을 비교해보자. 시대의 변화는 긴 설명 대신 사람들이 보는 영상과 손에 쥔 인쇄물로 들어온다. 같은 이미지라도 어디에서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4. 지상으로 돌아올 때의 목소리 동굴 탐사 중간에 목동과 가축의 장면이 돌아오는 방식을 살펴보자. 탐사의 성과와 별개로 지상에서도 한 사람의 시간이 흐른다. 그를 단순한 배경으로 두지 않을 때 산을 알아가는 방식도 여러 가지로 보인다.
〈네 번〉(2010,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칼라브리아의 목동과 염소, 나무를 따라가며 생명의 변화를 바라보는 영화다. 사람의 일에서 시작한 관심이 동물과 식물로 옮겨가는 과정을 비교할 수 있다. 배경처럼 보였던 존재에게 시간을 내주는 감독의 시선을 더 넓게 만날 수 있다.
〈잊혀진 꿈의 동굴〉(2010, 베르너 헤어조크) 프랑스 쇼베 동굴의 벽화를 카메라에 담고 오래전 그곳에 그림을 남긴 사람들을 생각한다. 말과 해설로 상상을 이끄는 방식은 〈일 부코〉와 다르다. 두 영화가 동굴의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각각 어떤 감각으로 다가오게 하는지 견주어볼 만하다.
이 글은 AI의 도움을 받아 자료 조사와 집필을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