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서는 이겼는데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1810년 포르투갈, 부사코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에 후퇴 명령이 내려진다. 웰링턴 장군(존 말코비치)은 적을 토…
전투에서는 이겼는데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1810년 포르투갈, 부사코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에 후퇴 명령이 내려진다. 웰링턴 장군(존 말코비치)은 적을 토레스베드라스의 방어선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 사이에 있는 지역은 비우고 식량과 물자를 없앤다. 적군이 진격해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게 하는 작전이다. 지도의 선을 뒤로 옮기는 명령이 주민에게는 살던 곳과 생계를 버리라는 말로 도착한다.
〈나폴레옹: 토레스전투〉는 그 명령 뒤에 길 위로 나온 사람들을 따라간다. 군인과 민간인, 어른과 아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모두 같은 이유로 걷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침략군에게 맞서려 하고, 누군가는 목숨부터 건져야 하며, 혼란을 자기 이익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다. 한 나라가 전쟁을 치른다는 말 아래에는 서로 다른 목적과 처지가 뒤섞여 있다. 영화는 토레스의 방어선에 도착하기 전에 그 차이들을 만나게 한다.
초토화 작전은 적의 보급을 끊는 전략이다. 하지만 파괴되는 마을과 경작지는 원래 누군가가 살고 먹거리를 길러온 곳이다. 프랑스군이 가져갈 수 없게 만들려면 주민도 그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 침략자를 막는다는 목적에 동의하는 것과 자기 생활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발레리아 사르미엔토 감독은 포르투갈의 이 전쟁이 처음에는 자신과 무척 먼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그를 끌어들인 것은 군사적 승부보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칠레의 군사 쿠데타 이후 망명했던 자신의 경험과 피란을 연결하면서 이 역사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먼 나라의 전쟁을 설명할 지식과 그 안의 사람에게 다가갈 감정은 서로 다른 경로로 마련됐다.
이 관점에서 보면 후퇴의 길은 결전을 기다리는 준비 구간으로 지나갈 수 없다. 군대에는 작전상 다음 목적지가 있지만, 주민에게는 떠나온 집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같은 길에 있다고 그 불확실성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이동을 볼 때 누구의 명령으로 움직이는지와 무엇을 남겨두고 왔는지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피란민을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평소의 지위와 욕망은 전쟁이 났다고 일시에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어디까지 의지할 수 있는지가 급해진다. 모두가 고통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도울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길이다.
웰링턴의 곁에는 화가 레베크(뱅상 페레)가 있다. 장군과 함께 있다고 화가가 자유롭게 대접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웰링턴에게 꾸지람과 모욕을 받는다. 전쟁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 일에도 그 그림을 그리게 하는 사람의 힘이 개입한다.
감독은 레베크가 실제 인물이며,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풍경을 그리는 정찰 업무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그림은 감상을 위한 풍경화이면서 군대가 땅을 파악하는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남기는 손과 전쟁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손이 같은 사람에게 속한다. 영화 속 화가를 보면 전쟁을 기록하는 일도 전쟁 바깥의 중립적인 자리에만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화면을 만드는 데에도 레베크의 그림이 쓰였다. 미술감독 이자벨 브랑쿠가 가져온 그림들을 참고해 넓은 풍경 속 작은 인물과 붉은색의 분포를 연구했다고 사르미엔토는 밝혔다. 영화 속에서 명령을 받는 화가가 영화 바깥에서는 풍경과 인물을 배치하는 단서를 준 것이다.
넓은 화면을 볼 때 그 안의 사람이 얼마나 작은지 살펴볼 만하다. 멀리서 군대의 움직임을 보면 전쟁의 규모를 알 수 있지만, 그 작은 사람에게도 제각기 하루가 있다. 풍경의 아름다움과 그 안을 통과하는 사람의 고단함이 함께 보일 때, 역사를 한 장의 장엄한 그림으로 정리하기가 어려워진다. 영화는 화가를 등장인물로 두면서 자신이 보여주는 전쟁의 모습에도 눈을 돌리게 한다.
군대를 따라가는 마르티리우(소라이아 샤베스)는 성을 팔며 살아남는다. 배우는 그를 병사들에게 잠시 행복한 시간을 주고 그들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다른 피란민보다 전쟁을 쉽게 견디는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같은 참상을 보고 있으며, 그 와중에 자신의 생활을 이어가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마르티리우와 포스터 소령(마르셀루 우르제게)이 욕조에 함께 있는 장면에는 노래가 있다. 샤베스는 이 장면을 촬영하며 감독이 욕조 주위를 도는 카메라와 마르티리우의 노래를 더했다고 회고했다. 노출된 몸에만 시선이 멈추는 장면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보내는 시간과 분위기를 함께 담은 선택이었다.
이 작은 휴식은 행군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시간이 있다고 전쟁이 잠시 멈추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계속 이동하고 버티는 사람에게도 감각과 욕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피란민이라는 말로 한데 묶으면 잘 보이지 않는 개인의 생활이 노래 한 곡이 흐르는 동안 구체적인 시간을 갖는다.
여기서 배우가 역할을 위해 상상한 과거와 영화가 알려주는 사실은 나눌 필요가 있다. 마르티리우가 전쟁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는 열려 있다. 지금 하는 일만으로 그 사람의 일생을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그를 전쟁의 피해를 설명하는 사례로만 두지 않는 이유도 그런 여백에서 찾을 수 있다. 살아남는 사람은 고통을 겪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자기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라울 루이스가 준비하던 기획을 그의 사후 사르미엔토가 이어받아 연출했다. 감독은 루이스가 남긴 대본 수정과 음악 선택 등을 존중했지만, 그가 만들었을 영화를 대신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연출의 관심이 피란과 여성들의 삶으로 향했다는 설명은 영화의 많은 인물이 단순한 주변인으로 물러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
한 사람의 임무만 좇으면 다른 인물의 사연은 잠깐 멈춰선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전쟁을 치르는 시간이 곧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마르티리우는 노래하고, 주민들은 길을 간다. 장군이 계산하는 승패와 나란히 놓일 때 그 일들은 전쟁 중에도 계속해야 하는 생활이 된다.
토레스의 방어선은 군대가 도달하려는 장소이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사람이 같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관객에게 남는 궁금증도 어느 군대가 이길 것인가만은 아니다. 그 승리를 위해 지금 떠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영화가 길 위의 사람들에게 머무는 시간만큼, 승리라는 말에 담기지 않는 몫을 생각하게 된다.
◆ 승리 뒤에 내려지는 후퇴 명령. 군사적으로 필요한 선택이 주민의 생활에는 어떤 상실이 되는지 함께 보자. 불타거나 비워진 땅을 적의 보급로이자 누군가의 삶터로 볼 수 있다.
◆ 웰링턴과 레베크. 명령하는 장군과 그림을 남기는 화가의 관계에 주목하자. 전쟁을 기록하는 사람에게도 요구와 제약이 있다는 점이 보인다.
◆ 넓은 풍경 속 사람의 크기. 전쟁의 규모가 드러나는 화면에서 사람들이 어디에 놓이는지 살펴보자. 장엄한 풍경을 보는 일과 그 길을 실제로 건너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겹친다.
◆ 마르티리우의 노래. 욕조의 장면이 행군과 전투 사이에 어떤 다른 시간을 만드는지 보자. 전쟁 속 인물을 생존의 절박함뿐 아니라 잠시 누리는 친밀함으로도 만날 수 있다.
◆ 〈도뷔시〉(2023, 올레스 사닌) — 군대에서 싸운 대가로 자유를 약속받았던 남자가 배신을 겪고 권력에 맞선다. 명령하는 사람이 내건 목적과 그 명령을 몸으로 수행한 사람이 얻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이어서 살펴볼 수 있다.
◆ 〈그날은 오리라〉(2017, 허안화) — 일본군 점령기의 홍콩에서 교사와 그 어머니가 항일 활동에 얽혀든다. 역사적 저항 속에서 가족을 걱정하고 사람을 옮기는 구체적인 일을 맡은 이들에게 시선을 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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