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만 하고 살 수 있다면 | MovieLAB LAB

소리꾼 이지선은 노래방을 운영하며 판소리를 배운다. 손님들이 노래할 곳을 마련하는 일과 자신이 소리하는 일이 하루하루 함께 이어진다. 〈수궁〉에는 이렇게 생활을 꾸려가며 노래를 …

노래만 하고 살 수 있다면 | MovieLAB LAB

소리꾼 이지선은 노래방을 운영하며 판소리를 배운다. 손님들이 노래할 곳을 마련하는 일과 자신이 소리하는 일이 하루하루 함께 이어진다. 〈수궁〉에는 이렇게 생활을 꾸려가며 노래를 놓지 않는 여자들이 나온다. 무대에 서는 모습만 보았다면 알기 어려웠을 사정이다. 좋은 소리를 내려면 오래 배워야 하고, 오래 배우려면 그동안 살아갈 방도도 있어야 한다.

영화의 중심에는 명창 정의진이 있다. 그는 아버지 정광수에게서 이어받은 양암제 수궁가를 다음 세대에 전하려 한다. 제자들은 있지만 그 소리를 온전히 이어갈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유수연 감독은 스승의 절박함과 제자들의 생활을 함께 따라간다. 노래를 가르쳐줄 사람이 있고 배우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그 마음만으로 전승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현실이 드러난다.

네 시간을 부르기 위해 필요한 것

정의진은 네 시간이 넘는 수궁가 완창 공연을 준비한다. 오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목소리로 이어가는 일이다. 영화 속 그는 여든을 앞두고 있다. 이제껏 지켜온 소리를 계속 들려주고 싶다는 바람에는, 자신이 부르지 못하게 된 뒤의 걱정도 들어 있다. 공연을 잘 마치는 일과 이 소리가 앞으로도 불릴 수 있게 하는 일이 함께 걸려 있다.

양암제 수궁가는 정의진의 집안이 이어온 소리다. 영화가 다루는 위기는 판소리 전체가 당장 사라진다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이 몸으로 익히고 오래 불러온 구체적인 소리를 누가 다음에 이어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름만 남아 있는 전통과 실제로 부르는 사람이 있는 전통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제자에게도 자기 생활이 있다

영화 속 젊은 소리꾼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같지 않다. 새로운 관객에게 닿으려고 다른 음악과 국악을 결합하는 사람이 있고, 일을 병행하며 배움을 이어가는 사람이 있다. 스승이 바라는 전승의 모습이 하나여도 제자들의 하루를 같은 모양으로 맞출 수는 없다. 각자가 소리를 계속하려고 찾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이지선의 노래방도 그 방법 가운데 하나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사람과 판소리 무대에 서려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공연장에서 만나는 예술가에게는 공연 밖의 직업과 책임이 있다. 그 일을 해내야 배움을 계속할 수 있지만, 일을 하는 시간에는 소리만 할 수 없다. 서로를 버티게 하는 두 일이 동시에 시간을 나눠 가져야 하는 셈이다.

유수연은 처음에는 전승을 스승에게서 제자로 내려가는 일로 생각했지만, 전수자들과 지내며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영화가 제자들의 생활에 시간을 쓰는 이유를 이해하게 하는 말이다. 스승이 가진 소리만큼 그 소리를 받아 살아갈 사람의 사정도 중요하다. 배우는 사람에게 무엇을 더 바랄지 묻기 전에, 그가 이미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광대의 딸이라는 말을 숨기지 않고

정의진을 소개할 때에는 아버지 정광수의 이름이 따라온다. 누구에게 배웠는지가 중요한 소리의 세계에서 그 관계는 예술의 계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소리꾼이 천대받았던 시절의 기억도 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소리가 자랑스러운 사람에게, 세상이 그 직업을 낮춰본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을까. 〈수궁〉의 여성 소리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훌륭한 스승에게 배웠다는 이력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삶을 전한다.

유수연이 촬영을 돌아보며 특별히 기억한 사람은 소리꾼 조영숙이다. 조영숙은 아버지가 소리하는 광대였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감독은 그 당당함에 놀랐다고 회상했다. 누군가에게는 감추고 싶은 출신일 수 있는 것을, 그는 자기 입으로 분명하게 밝힌다. 그 말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대신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런 자기소개는 전통의 가치를 설명하는 긴 말보다 가깝게 다가온다. 소리가 귀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그 소리를 하던 사람이 자기 삶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다르다. 후자에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다. 누구에게서 배웠고, 누구를 기억하며 지금도 부르는지 알게 된다. 지켜야 할 유산이라는 말에 가려졌던 소리꾼의 자부심이 드러난다.

젊은 제자들이 다른 음악을 시도하고 자기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도 그 자부심과 멀지 않다. 물려받은 것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에 앞서, 자기 목소리로 사람들 앞에 서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지선의 노래방과 정의진의 완창 준비를 함께 담는 영화는 그 욕심을 품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 보여준다. 무대가 끝나면 돌아가야 할 일상이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다.

〈수궁〉에는 오래 불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잘 알려진 이름이 되기까지 무엇을 견뎠는지 듣다 보면, 그들이 자기 일을 감추지 않고 말하는 당당함이 반갑다. 소리를 물려준 아버지를 자기 입으로 소개하던 조영숙의 말처럼, 그 삶을 작게 여기지 않겠다는 마음이 남는다.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것은 노래하는 법만이 아닐 것이다. 소리꾼으로 사는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마음도 함께 전해졌으면 한다.

감상 포인트

◆ 완창 공연을 준비하는 명창 — 정의진의 공연 준비를 한 차례 무대의 성패로만 보지 말고, 다음 세대에 소리를 전하려는 바람과 함께 살펴보자. 긴 시간 한 작품을 부르기 위해 쌓아온 몸의 훈련이 있다. 그 능력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일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 소리꾼의 다른 일터 — 이지선이 노래방을 운영하며 소리를 배우는 생활에 주목해보자. 무대 밖의 일이 예술과 무관한 시간만은 아니다. 배움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벌이이면서 연습과 시간을 나눠 써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일상을 공연 장면보다 넓게 볼 수 있다.

◆ 제자마다 다른 방법 — 젊은 소리꾼들이 자기 소리를 이어가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는지 보자.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거나 일과 배움을 병행하는 방식에는 각자의 조건이 반영된다. 스승의 소리를 아끼는 마음이 같아도 살아가는 방법까지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보인다.

◆ 자기 삶을 말하는 소리꾼 — 여성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노래 사이에 들어가는 배경 설명으로만 듣지 말자.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그 일을 하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직업을 말하는 마음도 달라진다. 노래하는 목소리와 자기 삶을 들려주는 목소리를 함께 들을 때 한 사람을 더 가까이 알게 된다.

관련 작품

◆ 〈원스〉 (2007, 존 카니) — 생업과 음악을 함께 이어가는 두 사람이 만나 노래를 만든다. 함께 작업하려면 재능 외에도 시간과 공간, 비용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물려받은 소리를 지키는 사람들과 지금 새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어떤 현실적인 조건이 필요한지 나란히 생각해볼 수 있다.

◆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2000, 아녜스 바르다) — 버려진 것을 줍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활과 이야기를 듣는다. 같은 행동을 해도 이유와 사정은 제각각이다.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기 쉬운 사람들을 만나 각자의 삶을 듣는 방식이, 〈수궁〉의 서로 다른 소리꾼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