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고 부르는 가족의 목소리도 믿지 않는다. 정글에 남겨진 잡지와 바깥세상의 소식도 적이 꾸민 속임수라고 생각한다. 오노다(젊은 시절 엔도 유야, 중년 츠다 칸지)에게는 전쟁…
돌아오라고 부르는 가족의 목소리도 믿지 않는다. 정글에 남겨진 잡지와 바깥세상의 소식도 적이 꾸민 속임수라고 생각한다. 오노다(젊은 시절 엔도 유야, 중년 츠다 칸지)에게는 전쟁이 끝났다는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들어온 증거가 자신이 믿는 이야기를 바꾸지 못한다.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은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필리핀 루방섬에서 전쟁을 계속한 군인의 실화에서 출발한다. 아서 하라리 감독은 이를 역사에서 영감을 얻은 허구라고 설명했다. 영화가 따라가는 것은 남들보다 오래 버틴 사람의 기록만이 아니다. 한 번 받아들인 명령이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고, 끝내 그 세상으로 돌아갈 길까지 막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오노다는 정보전 훈련을 받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목숨을 지키고 임무를 계속하라는 가르침을 얻는다. 타니구치 소령(이세이 오가타)은 자결을 금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버티도록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젊은 군인에게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그 말만 떼어놓고 들으면 생명을 지켜주는 지시처럼 들린다.
그러나 살아남아야 할 목적은 임무에 묶여 있다. 언제 끝내도 되는지 자신이 판단할 수 없다면 생존의 방법을 스스로 찾는 것과 삶을 선택하는 것은 멀어진다. 오노다는 현장에서 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면서도, 그 현장이 더 이상 전쟁터인지에 대해서는 오래전의 답을 유지한다.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판단력을 쓰지만 명령 자체를 다시 판단하지는 못한다.
정글의 생활은 이 모순을 몸으로 보여준다. 비를 견디고 몸을 숨기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 당장 필요한 일을 해내지 않으면 다음 날도 없다. 관객은 그가 매일 버티는 수고를 알아가고, 함께 남은 병사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게 된다. 그 걱정이 생기는 동안에도 전쟁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오노다의 젊은 시절과 중년을 서로 다른 배우에게 맡긴다. 얼굴은 달라지고 몸에는 시간이 쌓이는데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다는 변화와 같은 명령을 지키고 있다는 지속이 한 인물 안에 겹친다. 오래 살아남은 결과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점점 무겁게 다가온다.
이 섬은 아무 소식도 닿지 않는 완벽한 고립지가 아니다. 라디오가 있고, 귀환을 권하는 목소리와 인쇄물이 도착한다. 그런데 오노다와 동료는 방송을 들으면서도 전쟁이 계속된다는 쪽으로 해독한다. 정보를 받는 행동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이 갈라진다.
적을 경계하는 군인에게 속임수를 의심하는 태도는 임무의 일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항복을 알리는 말까지 모두 적의 작전으로 취급하면 의심을 끝낼 방법이 없어진다. 사실을 부정할 때마다 기존의 믿음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지 않고, 더 교묘한 적에 맞서는 판단으로 살아남는다. 그래서 새로운 소식이 올 때마다 바깥으로 한 걸음 나가는 대신 정글 안에 남을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
라디오 앞의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외치는 인물들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들은 것을 검토하고 자신들이 아는 상황에 맞춰 설명하려 한다. 문제는 결론이 바뀔 수 없다는 데 있다. 관객에게는 전쟁의 끝을 확인하는 정보가 그들에게는 전쟁을 지속할 근거가 된다. 같은 소리를 들으며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무는 셈이다.
함께 남은 동료의 존재도 이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곁에 사람이 있으면 고립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지만, 서로의 판단이 옳다고 확인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 공동생활의 친밀함과 잘못된 확신은 분리되지 않는다. 관객은 동료를 잃는 일을 슬퍼하면서, 그들이 함께 지킨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계속 생각해야 한다.
오노다에게 섬은 적을 피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장소다. 그러나 주민들에게는 이미 전쟁 뒤의 일상을 살아가는 집이다. 같은 땅을 밟고 있어도 무엇이 위협이고 무엇이 평범한 생활인지 다르게 판단한다. 그 차이는 머릿속의 착각으로 끝나지 않는다. 군인이 계속 총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오노다가 필리핀 여성 이네즈(안젤리 바야니)를 죽이는 장면이 있다. 죽은 이를 묻으며 시신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그가 적이라는 말로 묶어두었던 대상이 한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그 표정을 읽는 일과 죽음을 그의 성장에 필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해야 한다. 깨달은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대가를 치른 사람은 이미 말을 할 수 없다.
카메라가 오노다 곁에 오래 머물기 때문에 이 구별은 더 필요하다. 우리는 그의 배고픔과 고독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된다. 반면 그를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주민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게 본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수록 한 사람의 사정이 가까워지는 영화의 힘은, 바로 그 때문에 화면 밖으로 밀려난 사정도 돌아보게 한다.
실제 사건에서 희생된 주민의 유족들은 오노다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이야기에 반대해왔다. 그 증언을 영화의 장면과 똑같은 기록으로 합칠 수는 없지만, 영화를 읽는 자리에는 함께 놓을 수 있다. 정글에서 오래 버틴 일을 얼마나 대단하다고 느꼈는지와 별개로, 그 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계속되는 위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오노다를 찾아오는 젊은 여행자 스즈키(나카노 타이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섬에 들어선다. 군대가 보낸 병사도, 같은 임무를 이어받은 후임도 아니다. 스스로 여행을 택한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일본을 떠나 낯선 땅에 왔지만, 자신이 왜 여기 있으며 언제 떠날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르다.
이 만남을 앞선 훈련과 나란히 놓으면 영화의 긴 시간이 새로 보인다. 젊은 오노다는 자기 판단으로 행동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 뒤 수많은 일을 스스로 해냈다. 그런데 이제 만난 청년은 그런 지시를 받을 필요 없이 움직인다. 오노다가 지켜온 자립에는 빠져 있던 선택이 청년의 여행에는 처음부터 들어 있다.
여행자는 정글 밖에서 시간이 계속 흘렀다는 사실을 사람의 모습으로 가져온다. 인쇄물이나 방송을 해석하던 때와 달리, 오노다는 자기 앞에 나타난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임무의 언어로만 처리해온 바깥세계가 구체적인 얼굴을 얻는다. 그의 오랜 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것이 더 많은 정보만은 아니었음을 이 만남에서 생각하게 된다.
〈오노다〉를 보고 남는 것은 버티는 힘에 대한 감탄과 그 힘이 향한 곳에 대한 불편함이다. 둘 중 하나를 먼저 지울 필요는 없다. 몸은 놀랍도록 오래 견딜 수 있고, 그동안 판단은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있다. 가족의 목소리조차 거짓말로 들리던 사람 앞에 낯선 청년이 나타났을 때, 마침내 같은 세계에서 대화할 가능성이 열린다.
◆ 살아남으라는 말에 붙은 조건 — 타니구치가 목숨을 지키라고 하는 동시에 무엇을 계속하라고 명령하는지 보자. 생존의 기술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과 임무를 끝낼 수 있는 권한의 차이가 드러난다.
◆ 라디오를 듣고 나누는 해석 — 바깥 소식이 들리지 않는 상황인지, 들었지만 기존의 믿음에 맞춰 바꾸는 상황인지 구별해보자. 같은 정보가 관객과 인물에게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
◆ 군인 곁에서 멀어지는 주민의 시간 — 오노다의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이 무엇을 잃는지 함께 보자. 인물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일이 그 행동의 결과를 덮지는 않는다.
◆ 스스로 온 청년과 명령으로 온 군인 — 두 사람이 섬에 들어온 이유를 비교해보자. 여행자를 단순한 구조자로만 보면 놓치기 쉬운, 움직임의 자유와 선택의 차이가 보인다.
◆ 〈들불〉(1959, 이치카와 곤) — 필리핀에 남겨진 일본 병사의 굶주림과 방랑을 따라간다. 살아남으려는 몸의 절박함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함께 바라본다는 점에서 이어 볼 만하다.
◆ 〈씬 레드 라인〉(1998, 테렌스 맬릭) — 태평양전쟁의 전투와 병사들의 내면을 자연의 풍경 안에 놓는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찍으면서, 인물의 고통과 주변 세계를 어떤 거리에 두는지 비교할 수 있다.
이 글은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공식 자료와 인터뷰를 대조해 사실관계를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