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남편이 11년 만에 돌아왔다. 암에 걸렸으니 치료비를 보태달라고 한다. 〈파문〉의 요리코(츠츠이 마리코)에게 남편 오사무(미츠이시 켄)는 자기 아버지의 간병까지 떠넘기…
집을 나간 남편이 11년 만에 돌아왔다. 암에 걸렸으니 치료비를 보태달라고 한다. 〈파문〉의 요리코(츠츠이 마리코)에게 남편 오사무(미츠이시 켄)는 자기 아버지의 간병까지 떠넘기고 사라진 사람이다. 그런데 돌아온 남편 앞에서 요리코가 꺼내는 말은 밥을 먹을 것이냐는 물음이다. 당장 나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아내는 다시 끼니부터 챙긴다.
연출을 맡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이 침착함을 너그러운 마음의 증거로 삼지 않는다. 요리코에게는 화가 있다. 다만 그 화를 남편에게 곧바로 쏟아내는 대신, 혼자 기도하고 정원을 정리하며 가라앉히려 한다. 그러던 아내가 남편의 칫솔로 세면대를 닦는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이 작은 행동에 웃음이 나는 것은, 남편이 아직 모르는 아내의 마음을 우리가 먼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오사무는 자신이 돌아온 집에 너무 빨리 익숙해진다. 밥을 먹고, 소파에서 몸을 편하게 두고, 손톱을 깎는다. 미츠이시 켄은 남편의 이런 몸짓을 하나씩 보탰다. 감독은 음식 먹는 방식부터 소파에서 하는 행동까지, 배우가 내놓은 제안 덕분에 아내의 짜증을 부르는 인물이 더 선명해졌다고 설명했다.
밥을 먹거나 손톱을 깎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남편이 사라진 동안 요리코가 맡아야 했던 일들을 알고 보면 그 편안함이 얄밉다. 집을 비웠던 사람에게는 쉬운 복귀지만, 남아 있던 사람에게는 끝난 줄 알았던 일의 재개다. 돌봐야 할 가족이 돌아왔고, 생활의 순서도 다시 그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
요리코가 즉시 남편을 내쫓지 않는 이유도 사랑 하나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남편 명의인 집, 주변의 시선, 남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종교의 가르침이 얽혀 있다. 감독은 이런 조건들을 생각하며 요리코의 반응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속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은데도 입에서는 식사부터 챙기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오랜 습관은 화가 났다고 쉽게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칫솔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작다. 세면대는 깨끗해지겠지만 남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정은 그대로다. 대놓고 싸우지 못한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 만큼만 되갚는다. 영화는 이 행동을 멋진 복수로 부풀리지 않아 더 웃기다. 아내가 얼마나 화났는지를 모르는 남편의 태평함이 그 옆에 계속 남아 있다.
요리코의 하루에는 반복하는 의식이 있다. 생명수라 불리는 물에 기도하고, 돌과 모래로 꾸민 정원을 고르게 정돈한다. 겉에서 보면 혼자 사는 집을 정성껏 가꾸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자 이 차분한 일과만으로는 마음을 다잡기 어려워진다. 매일 반복하는 일이 위안이 되는지,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숙제가 되는지 구별하기 힘들다.
영화는 요리코가 물을 특별하게 여기게 된 배경에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놓는다. 가족의 안전을 걱정했던 기억과 집에 남겨진 시간이 그의 생활에 이어져 있다. 생명수를 믿는 태도를 그저 어리석다고 비웃기 전에, 요리코가 무엇에라도 의지하고 싶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보인다. 그렇다고 영화 속 종교가 실제로 그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남편의 치료비와 가족의 요구는 기도가 끝난 다음에도 기다리고 있다.
정원은 특히 묘한 장소다. 모래 위에는 물결 모양의 선이 있지만 실제 물은 흐르지 않는다. 손으로 고르고 다듬으면 한동안 그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가지런히 맞출 수 없는데, 요리코는 정원에서라도 자기 손으로 질서를 만든다. 집 안으로 남의 요구가 자꾸 밀려오는 동안, 정원을 돌보는 시간이 절실해 보이는 이유다.
마음을 눌러두는 모습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말다툼 사이로 물 위에 파장이 번지는 이미지가 끼어든다. 감독은 어릴 때 부모의 싸움을 보며 느꼈던 분노를 물결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단정한 집과 침착한 표정 아래에서 감정은 이미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물의 말에 맞춰 물결이 서로 부딪히는 화면은, 크게 소리 내지 않는 사람도 속으로는 얼마나 소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남편을 보며 함께 화를 내던 관객도 요리코를 끝까지 두둔하기는 어렵다. 아들 타쿠야(이소무라 하야토)가 장애가 있는 여자친구 타마미(쓰다 에리나)를 데려왔을 때, 요리코는 타마미를 차별한다.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줄 안다는 보증은 되지 않는다. 영화는 요리코의 고단함을 충분히 보여준 다음에도 이 행동을 감싸지 않는다.
이 장면이 있어 요리코의 이야기는 인내심 많은 아내와 철없는 남편의 대결로 끝나지 않는다. 그가 지키고 싶은 평온한 생활에는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기준도 들어 있다. 남편이 자기 뜻대로 살려는 모습을 못마땅해하면서, 아들의 삶은 자신이 바라는 모양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원한다. 요리코 역시 누군가와 함께 살려면 자기 기준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 곁에서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만드는 사람은 직장 동료 미즈키(키노 하나)다. 두 여자가 사우나에서 남자들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자, 옆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뜬다. 집에서는 삼키던 말을 이 자리에서는 할 수 있다. 누군가 아내답게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자기 말에 웃고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있다.
미즈키가 요리코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현명한 조언자는 아니다. 그에게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요리코가 곁을 지킬 차례가 온다. 한 사람이 계속 희생하는 관계와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내미는 관계의 차이가 여기서 느껴진다. 요리코에게 필요한 것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강함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있고, 상대의 사정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파문〉을 보고 나면 요리코가 화를 잘 참아주기를 바라기 어렵다. 그가 더 착해지면 남편의 식사와 집안일은 매끄럽게 돌아갈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유지되는 평온 속에 정작 요리코가 편히 쉴 자리는 있는지 묻게 된다. 남편의 칫솔로 몰래 화풀이하던 아내가, 이제는 남편 앞에서도 자기가 싫은 것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의 웃음에는 그 말을 기다리는 마음이 섞여 있다.
◆ 〈행복〉 (1965, 아녜스 바르다) — 한 남자가 자기 행복을 설명하는 동안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밝고 아름다운 가정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 안의 관계까지 공평한 것은 아니다. 〈파문〉의 남편에게 느낀 불편함을 다른 표정과 색채 속에서 마주할 수 있다.
◆ 〈모래의 여자〉 (1964, 데시가하라 히로시) — 모래를 퍼내는 일이 매일 되풀이되는 집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지낸다. 집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노동이 언제부터 사람의 삶 전체를 차지하는지 묻게 되는 작품이다. 정원을 고르는 요리코와 나란히 떠올리면, 단정하게 유지되는 공간 뒤에 어떤 몸과 시간이 필요한지도 달리 보인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