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는 아내를 사랑한다. 아이들과 보내는 휴일도 좋고, 새로 만난 여자와의 사랑도 좋다. 자신이 행복해진 만큼 누군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아녜스 …
프랑수아는 아내를 사랑한다. 아이들과 보내는 휴일도 좋고, 새로 만난 여자와의 사랑도 좋다. 자신이 행복해진 만큼 누군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에서 곤란한 것은 이 남자의 말만이 아니다. 행복한 가족처럼 보이는 풍경과 밝은 음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남편은 만족스러워 보이지만, 아내도 같은 마음일까. 영화는 그 차이를 쉽게 드러내주지 않는다.
꽃이 피어 있고, 부부는 두 아이와 함께 숲으로 나들이를 간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흐른다. 행복한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화면 안에 넉넉하다. 프랑수아는 목수이고 아내 테레즈는 집안일과 바느질로 생활을 꾸린다. 특별히 호화로운 생활도 아니다.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쉬는 날에는 함께 밖에 나가는 삶이다. 그래서 이 가족의 모습은 손에 닿을 법한 행복으로 보인다.
이 자연스러움에는 흥미로운 캐스팅이 있다. 프랑수아를 연기한 장클로드 드루오의 실제 아내와 아이들이 영화에서도 그의 가족으로 나온다. 화면에 보이는 가족과 카메라 앞에 선 가족이 겹친다. 그렇다고 이들의 실제 생활을 담은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바르다는 이 친숙한 얼굴들을 허구의 부부 관계 속에 놓았다. 관객이 믿기 쉬운 가족의 모습으로, 그 믿음을 점검해야 하는 이야기를 시작한 셈이다.
가족사진이라면 웃는 얼굴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고 넘어갈 수 있다. 영화에서는 그다음 시간이 계속된다. 프랑수아는 우체국 직원 에밀리와 가까워지고, 두 사람의 만남도 그의 생활에 들어온다.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애정은 여전하다고 그는 여긴다. 앞서 본 휴일을 거짓 행복으로 지워버리기는 어렵다. 이 남자는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근거로 자기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믿을 수 있다.
프랑수아에게 새로운 사랑은 기존의 사랑에서 얼마를 떼어주는 일이 아니다. 아내를 사랑하던 마음은 그대로 두고 에밀리를 향한 마음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런데 아내가 어떤 마음일지까지 남편이 대신 설명하려 한다. 아내가 여전히 사랑받는다는 것과 아내가 이 관계를 원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다.
이 차이를 붙잡으면 외도를 들킬까 조마조마하게 보는 영화와는 다른 긴장이 생긴다. 프랑수아는 숨기고 거짓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정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태도다. 그러나 사실을 말해준다고 상대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의무까지 생기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알리는 일과 함께 결정하는 일 사이에서, 프랑수아는 앞의 것으로 뒤의 것까지 해결하려 한다.
그를 단순히 거짓말쟁이로 보면 놓치는 불편함이 여기에 있다. 프랑수아가 행복하다는 말은 진심일 수 있다. 바르다는 그 진심을 듣는 쪽에서도 편안할 것이라고 보증하지 않는다.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연인인 한 사람이 각자의 관계를 오가며 만족할 때, 아내와 연인은 그가 정한 관계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에는 모두의 목소리가 들어 있지 않다.
이쯤에서 영화가 색을 어둡게 바꾸고 불길한 음악을 들려주면 판단은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색채는 그렇게 친절한 표지판이 되어주지 않는다. 꽃과 옷과 풍경이 보기 좋게 어울리고,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검정 대신 붉고 푸르고 흰 색면이 들어온다. 인물들의 관계를 곱씹다가도 그 색에 눈이 간다. 꺼림칙한 일을 이해하는 동안에도 아름다움을 즐기는 감각은 작동한다.
그 때문에 화면을 보는 즐거움까지 조금 불편해진다. 프랑수아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사는 풍경은 좋아 보일 수 있다. 영화는 관객에게 부부 관계에 대한 판단과 화면에 대한 호감을 동시에 안긴다. 한쪽을 얻으면 다른 쪽은 저절로 정리되는 구성이 아니다. 예쁜 가족사진에 담기지 않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잘 나온 사진에 먼저 끌린다.
바르다가 만든 아름다움은 인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된 뒤에도 남는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을 읽는 방식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이 가족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처럼 보였던 ‘행복’에, 이제 누가 그렇게 부르는지 묻게 된다. 프랑수아가 느끼는 만족을 온 가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가.
불편한 인물을 불편한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많다. 〈행복〉에서는 화면에 끌리는 마음과 인물에게 동의할 수 없는 마음이 함께 간다. 그 어긋남을 직접 겪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재미다. 프랑수아를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떤 삶을 행복해 보인다고 판단하는지 자신의 눈도 돌아보게 된다.
◆ 꽃과 옷의 색 — 인물의 옷과 꽃, 주변 풍경의 색이 어울리는 방식을 살펴볼 만하다. 보기 좋은 가족의 모습을 세심하게 만드는 화면이 프랑수아의 말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느끼게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 장면 사이에 들어오는 색 — 장면이 바뀔 때 검정 대신 붉고 푸르고 흰 화면이 들어온다. 이야기의 분위기만 따라가기보다 그 색이 눈에 주는 즐거움도 느껴보면, 내용과 화면에 대한 반응이 꼭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가족을 연기하는 가족 — 드루오의 실제 아내와 아이들이 영화에서도 그의 가족으로 출연한다. 휴일을 함께 보내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더라도 실제 부부의 사생활을 재현한 영화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편이 좋다.
◆ 행복을 설명하는 사람 — 프랑수아가 자기 감정을 설명할 때 아내의 마음까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어보자. 자신이 사랑한다는 말과 상대가 그 관계에 동의한다는 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드러난다.
◆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1962, 아녜스 바르다) —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사람의 상태를 짐작하는 습관을 흔든다. 〈행복〉의 보기 좋은 풍경과 함께 읽을 만하다.
◆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1977, 아녜스 바르다) — 두 여성이 자기 삶을 결정하고 서로 돕는 이야기를 따른다. 다른 사람이 대신 설명하던 행복에서 스스로 말하는 삶으로 관심을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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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