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부대에 들어갔는데 고참이 중학교 동창이다. 이보다 반가운 우연이 있을까. 〈용서받지 못한 자〉의 신병 승영(서장원)에게 말년 병장 태정(하정우)은 기댈 만한 사람이다. 태정…
낯선 부대에 들어갔는데 고참이 중학교 동창이다. 이보다 반가운 우연이 있을까. 〈용서받지 못한 자〉의 신병 승영(서장원)에게 말년 병장 태정(하정우)은 기댈 만한 사람이다. 태정도 다른 고참들에게 눈총을 받는 친구를 감싸준다. 다만 그가 알려주는 무사한 군 생활의 비결은 승영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당해도 일단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 친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두 사람 사이를 벌려놓기 시작한다.
친한 사람이 내 사정을 알아주면 낯선 곳도 견딜 만해진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잘못된 관행에 익숙해지라고 권한다면 어떨까. 승영에게 태정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친구이면서, 따르고 싶지 않은 질서의 선배다. 어느 쪽도 거짓이 아니라서 이 관계는 좀처럼 간단해지지 않는다.
승영은 고참의 군화에 광을 내서 가져다주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 시켰다는 사실이 그 일을 해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부대에서는 오히려 그런 승영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통한다. 모두가 해온 일을 왜 혼자 못 받아들이느냐는 눈길이 그를 향한다. 따져 묻는 사람이 생기자 잘못된 관행보다 그 사람 때문에 벌어진 소란이 먼저 눈에 띈다.
태정은 이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덜 힘든지 안다. 친구를 감싸려면 다른 고참들에게 할 말도 있어야 하고, 승영이 계속 부딪치면 자신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친구에게 조심하라는 충고에는 두 마음이 함께 담긴다. 승영이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자신이 익힌 방식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태정은 이 두 얼굴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나누지 않는다. 친구를 챙기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군기를 잡는다. 친근함을 믿고 마음을 놓았다가도 그 말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다시 보게 된다. 태정이 유난히 악해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 영화는 그 둘이 한 사람 안에서 얼마나 무리 없이 공존하는지 보여준다.
승영은 자신이 고참이 되면 나쁜 관행을 바꾸겠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고, 응원하고 싶은 다짐이다. 그러나 후임 지훈(윤종빈)이 들어오면서 그 다짐은 구체적인 사람을 대하는 문제가 된다. 후임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생각과 매일 그를 상대하는 일 사이에는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다.
영화는 지훈을 승영의 선의를 증명하기에 알맞은 후임으로 만들지 않는다. 친절을 받았다고 언제나 기대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될 리 없다. 승영은 위에서 받는 압박과 후임 때문에 생기는 답답함 사이에 놓인다. 그때 후임에게 편하게 지내라고 했던 말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까. 말로 내세운 원칙이 실제 관계에서 시험받는다.
이 대목을 보며 승영도 결국 똑같은 사람이라고 서둘러 결론짓기는 어렵다. 처음의 문제 제기가 틀렸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옳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자기가 불편해지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게 된다. 태정에게서 듣기 싫었던 충고가 자기에게 편리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괴롭다.
승영에게서 태정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태정 역시 한때는 신병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다. 익숙해지는 동안 무엇을 받아들였을까.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요구하게 되었을까. 지훈이 들어온 뒤에는 처음부터 당연해 보이던 고참의 태도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영화는 부대 안의 과거와 제대한 태정의 일상을 오간다. 군복을 벗은 태정은 승영의 방문을 반기지만은 않는다. 승영에게는 꼭 해야 할 말이 있고, 태정에게는 이미 지나간 시간처럼 보인다. 같은 부대에서 지냈다는 사실이 두 사람에게 같은 기억을 남긴 것은 아니다.
승영은 친구가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곁에 머문다. 태정이 대화를 피하려 할수록 승영의 말과 행동은 더 불안하게 느껴진다. 군대 안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령이 정해줬다면, 밖에서는 친구의 요청을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친한 사이니까 자연히 통할 것 같던 대화가 자꾸 어긋난다.
과거의 부대 장면으로 돌아가면 그 어긋남에 다른 이유가 보인다. 누군가는 보호받았다고 생각한 관계에서 눈치를 보았을 수 있고, 도와주었다고 믿는 사람은 상대가 여전히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영화는 한 번의 설명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다. 지금 말을 꺼내기 어려운 사정을, 둘이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찾아가게 한다.
각본과 연출을 맡고 지훈으로도 출연한 윤종빈은, 부조리에 저항하는 인물을 무조건 멋있게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승영에게 공감한다고 해서 그를 주제에 맞춰 움직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덕분에 관객은 승영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그와 함께 있는 자리를 불편해할 수 있다. 영화는 그 불편함을 쉽게 해소해주지 않는다.
바로 그때 태정이 멀리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힘든 시절을 다 지난 일로 두고 싶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는 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런데 상대는 아직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듣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대화를 끝내면, 말을 하려고 찾아온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
승영이 할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돌아가게 될까 봐 마음이 쓰인다. 태정이 그 만남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아서 더 그렇다. 처음 승영에게 필요했던 것은 낯선 부대에서 자신을 알아봐줄 친구였다. 부대 밖에서 다시 만난 지금은 자기 말을 끝까지 들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알고 지낸 시간만으로는 그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의 만남을 아프게 한다.
◆ 친구에게 하는 말과 후임에게 하는 말 — 태정이 승영을 대할 때 친근함과 권위가 어떻게 함께 드러나는지 보자. 명령조로 말하는 순간만 찾을 필요는 없다. 걱정과 충고 속에도 상대가 따르기를 바라는 방식이 담겨 있으며, 승영은 바로 그 다정함 때문에 더 난처해질 수 있다.
◆ 군화에 광을 내는 일 — 승영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관행을 주변 병사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자. 시키는 사람뿐 아니라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의 반응도 중요하다. 어떤 일이 옳은지 묻는 말이 어떻게 분위기를 깨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볼 수 있다.
◆ 지훈이 들어온 뒤의 승영 — 후임에게 잘해주겠다는 다짐과 후임 때문에 곤란해졌을 때의 태도를 함께 보자. 원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동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승영을 처음부터 위선자로 단정하기보다, 자신의 불편을 누구에게 떠넘기게 되는지 따라가면 관계의 변화가 더 아프게 다가온다.
◆ 과거가 끼어드는 현재의 만남 — 군대 장면이 나오기 전과 후에 태정과 승영의 대화가 어떻게 달리 들리는지 살펴보자. 과거는 단순히 사연을 보충하는 자료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는 끝난 일과 다른 사람에게는 말해야 할 일이 같은 자리에서 부딪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 〈공동경비구역 JSA〉 (2000, 박찬욱) — 친해진 병사들이 소속과 규율 때문에 그 관계를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다. 함께 웃는 얼굴을 충분히 본 뒤에도 제도의 경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어 볼 만하다. 군복 안에 있는 개인의 마음을 아는 일과 그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일의 차이를 두 영화에서 살필 수 있다.
◆ 〈파수꾼〉 (2011, 윤성현) —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호의와 힘의 차이가 어떻게 엉키는지 보여준다. 장난이라고 여긴 행동을 다른 친구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친하다는 믿음 때문에 어떤 말을 듣지 못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왜 무너졌는지 묻는다는 점에서 곁에 놓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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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