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드레스를 만든 감독의 백화점 추억 | MovieLAB LAB

피터 스트릭랜드에게 백화점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가던 곳이었다. 어른들이 옷을 고르는 동안 아이는 카펫이 깔린 매장과 마네킹을 구경했다. 카탈로그를 넘길 때 나는 종이 소리,…

살인 드레스를 만든 감독의 백화점 추억 | MovieLAB LAB

피터 스트릭랜드에게 백화점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가던 곳이었다. 어른들이 옷을 고르는 동안 아이는 카펫이 깔린 매장과 마네킹을 구경했다. 카탈로그를 넘길 때 나는 종이 소리, 바깥보다 조용한 실내의 느낌도 기억에 남았다. 그 기억에서 훗날 사람을 해치는 붉은 드레스가 나왔다.

〈인 패브릭: 레드 드레스〉의 출발점은 먼 나라의 괴담보다 감독이 드나들던 상점에 가깝다. 새 옷을 입으면 조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손님을 지나치게 정중하게 대하는 판매원, 집에 가져오고 나니 낯설게 느껴지는 물건. 스트릭랜드는 이런 경험을 조금씩 이상하게 바꾼다. 옷 한 벌을 사는 일이 왜 이토록 불안해지는지, 그의 백화점에 들어가면 눈보다 귀가 먼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인 패브릭: 레드 드레스〉 — 거울 속 붉은 옷과 여성들

매장에서 발소리를 지웠더니

영화의 소리를 만들던 마틴 페이비는 여성 일곱 명에게 쇼핑할 때 나눌 법한 대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매장에 깔릴 배경음을 녹음하려던 작업이었다. 스트릭랜드는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바꿨다. 이미 넣어둔 효과음과 주변 소리를 덜어내고, 목소리를 음악처럼 쓰기로 했다.

현실적인 백화점이라면 옷걸이를 미는 소리도 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소리도 상당 부분 지웠다. 대신 사람들의 목소리를 키웠다가 낮추면서 매장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화면에는 손님과 상품이 있는데 귀에는 그 공간에서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소리가 들어온다. 특별히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전부터 평범한 쇼핑에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이 선택은 소리를 많이 넣어야 장면이 풍성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무엇을 들려줄지 못지않게 무엇을 안 들려줄지가 중요하다. 물건이 가득한 공간인데도 움직이는 소리가 비어 있으면, 관객은 그 조용함을 의식하게 된다. 스트릭랜드가 기억하던 백화점의 감각은 이렇게 음향 작업을 거쳐 공포의 일부가 됐다.

좋은 옷을 사고 싶었을 뿐인데

드레스를 사는 쉴라(마리안 장 바티스트)는 새 만남을 앞둔 은행원이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마음 편할 틈이 적은 그에게 옷을 고르는 시간은 작은 기대를 허락한다. 스트릭랜드는 쉴라를 탐욕스러운 소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가 좋은 옷을 입고 싶어 하는 마음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이 태도를 알고 보면 옷을 산 뒤 벌어지는 일을 욕심에 대한 벌로 정리하기 어려워진다. 쉴라가 원한 것은 특별한 권력이나 부가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날, 자신이 조금 더 괜찮아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드레스가 위험해질수록 그 바람까지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관객이 쉴라에게 마음을 두고 영화를 볼 여지가 여기서 생긴다.

감독은 여러 임시직에서 일한 경험도 영화에 가져왔다. 쉴라가 직장에서 겪는 불편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저주의 원인을 밝히는 데 곧바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 퇴근 뒤 이 사람이 왜 기분을 바꾸고 싶었을지 이해하게 한다. 괴상한 이야기를 만드는 감독에게도 인물이 보내는 평범하고 지치는 하루는 생략해도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인 패브릭: 레드 드레스〉 — 공중에 펼쳐진 붉은 드레스

진지할수록 이상한 판매원

판매원 럭무어(파트마 모하메드)는 옷에 관한 간단한 말도 유난히 길고 정중하게 한다. 친절한 응대처럼 들리는데 듣다 보면 무슨 뜻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스트릭랜드는 이 말투를 아무 뜻 없는 수수께끼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상점에서 쓰는 격식과 돌려 말하는 습관을 낯설 만큼 밀어붙였다.

그래서 배우가 먼저 우스워하거나 이상한 사람임을 표시하면 장면의 힘이 줄어든다. 럭무어는 자기 말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손님이 잠시 망설여도 정해진 의식처럼 판매를 이어간다. 관객에게 웃음이 날 때와 불길한 느낌이 들 때가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은 그 진지함 때문이다.

의상도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생활에서 온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의상감독 조 톰프슨은 쉴라의 평범한 외투와 매장 직원의 화려한 차림을 함께 준비했다. 쉴라에게는 특별한 날을 위해 고른 옷이지만, 매장 안에서는 그 옷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부터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 옷을 사러 온 사람이 낯선 규칙을 따라야 하는 방문객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소리의 정체를 알아도 무서울 수 있다

스트릭랜드의 〈버베리안 스튜디오〉에는 공포영화의 소리를 만드는 작업실이 나온다. 음향기사 길더로이(토비 존스)는 이탈리아 영화의 후반작업에 참여한다. 관객에게 보이는 것은 그 공포영화의 잔혹한 장면이 아니라 채소를 자르고 부수며 효과음을 만드는 과정이다. 비명과 뒤섞여 들리는 폭력의 소리에 이렇게 소박한 재료가 쓰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고 소리의 정체를 안 순간부터 영화가 우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손이 다루는 것이 채소임을 알아도, 비명과 함께 들으면 보이지 않는 폭력을 상상하게 된다. 스트릭랜드는 채소의 소리를 후반작업에서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익숙한 재료를 그대로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관객이 들을 소리로 다시 빚은 것이다.

〈인 패브릭〉의 웅성거림에도 비슷한 즐거움이 있다. 사람 몇 명이 쇼핑 이야기를 나눴다는 설명만으로는 영화 속 매장의 기분을 다 알 수 없다. 어떤 소리와 섞고 무엇을 지우느냐에 따라 그 대화는 불안한 공간을 만든다. 스트릭랜드의 영화를 보고 나면 평범한 물건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떠올리는 능력만큼, 그 물건을 오래 보고 들어온 사람의 호기심이 궁금해진다. 카탈로그를 넘기던 아이의 귀가 살인 드레스의 영화를 만드는 데까지 쓰였다는 사실도.

감상 포인트

◆ 보이는 움직임, 들리지 않는 소리 — 백화점 장면에서는 화면에 있는 물건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들어보자. 자연스러운 공간이라면 들릴 법한 소리가 빠져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채울 때 매장의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필 수 있다.

◆ 드레스를 고르기 전의 하루 — 쉴라의 직장과 집을 옷을 사는 장면과 함께 보자. 새로운 차림을 원하는 마음이 허영이라는 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 인물의 사소한 기대를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이 이 공포영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볼 만하다.

◆ 럭무어의 진지한 응대 — 판매원의 말투와 표정을 함께 살펴보자. 듣는 사람에게는 이상한 말인데 말하는 사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배우가 웃음을 미리 알려주지 않을 때 생기는 묘한 우스움과 불안을 느낄 수 있다.

◆ 채소로 만드는 공포 — 〈버베리안 스튜디오〉에서는 소리를 만드는 손과 완성된 소리를 함께 보자. 재료를 아는 것만으로 소리의 효과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 감독이 왜 일상적인 감각을 영화의 재료로 삼는지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입구다.

관련 작품

◆ 〈인 패브릭: 레드 드레스〉 (2018, 피터 스트릭랜드) — 붉은 드레스의 저주와 백화점의 일상이 만나는 영화다. 드레스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따라가면서, 옷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태도에도 귀를 기울이면 공포와 유머를 함께 발견할 수 있다.

◆ 〈버베리안 스튜디오〉 (2012, 피터 스트릭랜드) — 공포영화의 후반작업실에서 일하는 음향기사를 따라간다. 눈앞의 작업과 귀로 듣는 결과 사이의 차이를 다룬다는 점에서, 백화점의 소리를 새로 만든 감독의 관심을 이어서 살펴보기 좋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