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녹음할 수 없는 목소리를 듣는 일 | MovieLAB LAB

음향 기사에게 들리지 않는 대사를 살려 달라는 의뢰가 온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배우는 세상을 떠났고, 대사는 애드리브여서 대본을 펼쳐도 알 수 없다. 〈허밍〉의 성현(김철윤)에…

다시 녹음할 수 없는 목소리를 듣는 일 | MovieLAB LAB

음향 기사에게 들리지 않는 대사를 살려 달라는 의뢰가 온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배우는 세상을 떠났고, 대사는 애드리브여서 대본을 펼쳐도 알 수 없다. 〈허밍〉의 성현(김철윤)에게는 장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맡겨진 셈이다. 배우 미정(박서윤)과 함께 촬영했던 기억도 자꾸 되살아난다. 목소리 대역을 맡은 민영(김예지)이 녹음실에 찾아오지만, 작업을 이끌어야 할 감독은 오지 않는다. 무엇을 녹음할지부터 두 사람이 알아내야 한다.

영화를 끝내기 위해서는 소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성현이 기억하는 것은 대사의 내용만이 아니다. 일을 하던 미정, 먹으며 말하던 미정, 녹음 중 흥얼거리던 미정이 있다. 정확한 문장을 찾아야 하는 작업 옆으로 문장만으로는 옮기기 어려운 기억이 따라온다. 〈허밍〉은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남아 있는지 묻는다.

대본에 없는 말

미정은 정해진 대사를 자기 생각과 입에 맞게 바꾸어 연기하던 배우였다. 당시에는 현장에서 바꿀 수 있었던 말이, 나중에는 누구도 정확히 되풀이할 수 없는 말이 된다. 화면에는 연기한 사람이 남아 있지만 그 입에서 나온 문장을 확정할 방법이 없다. 후시녹음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찍힌 장면을 다시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 두 사람이 가진 자료의 차이가 있다. 성현은 미정과 작업했던 시간을 기억한다. 민영은 자신이 목소리를 입힐 영화 속 인물을 이해하려 한다. 한쪽이 실제로 만났던 사람과 다른 쪽이 연기해야 할 역할은 겹치면서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성현의 기억만으로 연기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민영의 상상만으로 과거가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부스 안의 작업을 지켜볼 때는 그 차이를 기억해 둘 만하다. 두 사람이 같은 화면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다. 미정이 무엇을 말했을지 생각하는 일에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는 마음과, 이 장면의 인물이라면 어떻게 말할지 짐작하는 연기가 함께 들어간다. 목소리를 대신하는 일이 단순한 흉내에 머물 수 없는 까닭이다.

영화는 현재의 대화 사이로 성현의 기억과 과거에 함께 찍은 영화의 장면을 놓는다. 미정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누구의 기억인지, 어떤 영화 안의 모습인지 살피게 된다. 같은 얼굴이 돌아와도 그 얼굴을 만나는 자리는 달라진다. 죽은 사람에 관한 완성된 설명을 받기보다, 서로 다른 경로로 남은 흔적들을 마주하게 되는 구성이다.

김밥을 먹으며 말하는 사람

미정이 김밥 속을 조금씩 빼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이 행동에 대해 박서윤은 김밥이 너무 커서 대사를 자연스럽게 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속을 덜어 내고 입에 넣으면 먹으면서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별도의 성격을 강조하려고 준비한 버릇은 아니었다.

이 작은 사정은 기억 속 사람을 바라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정에게는 나중에 남을 대사와 이미지보다 당장 먹으며 말해야 하는 몸이 있다. 입에 맞지 않는 크기를 조절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행동은, 죽은 인물이라는 설정만으로는 떠올리기 어려운 생활의 구체성이다. 성현이 기억하는 미정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붙어 있다.

박서윤은 미정을 연기할 때 자신의 모습이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아 감독에게 물었고, 그렇게 해도 된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승재 감독이 배우에게 허용한 여지는 극중 미정이 대사를 자기 말로 바꾸는 태도와도 나란히 놓인다. 실제 배우와 배역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두 경우 모두 정해진 글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말하는 사람의 몸과 습관이 들어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뒤늦게 대사를 복원하는 과제는 처음보다 더 까다롭게 느껴진다. 대본의 빈칸을 채운다고 그날의 입과 호흡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 관객은 성현과 민영이 맞는 문장을 찾을지 궁금해하면서, 그 작업이 무엇을 되살릴 수 있고 어디까지는 닿을 수 없는지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멈추게 하지 않은 노래

미정이 허밍을 하는 것은 주변의 소리를 녹음하던 때다. 원래의 성현이라면 작업을 방해하는 소리를 제지했을 텐데, 그날은 끝까지 듣는다. 감독은 이 장면을 성현이 미정을 기억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꼽았다. 녹음해야 할 환경음 사이에 들어온 사람의 노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대사를 알아내려는 현재의 성현과 이때의 성현 사이에는 듣는 목적의 차이가 있다. 후시녹음에서는 어떤 단어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허밍에는 해독할 문장이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들을 수 있고, 오래 기억할 수도 있다. 뜻을 알아내는 일과 누군가의 소리를 곁에서 듣는 일이 서로 다른 경험임을 이 장면이 보여 준다.

제목을 이 순간과 연결하면 소리의 결함만 보던 관심이 조금 옮겨 간다. 잘 들리지 않는 대사 때문에 작업은 막혔지만, 성현의 기억에는 또렷한 말이 아니었던 소리가 남아 있다. 무엇을 했다는 설명보다 어떻게 함께 있었는지가 오래 남는 경우다. 영화가 소리를 다룬다는 사실은 음향 장비나 녹음 기술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얼마 동안 들어 주는가 하는 문제로 다가온다.

녹음실도 오래 남아 있지는 않는다

성현이 지키는 낡은 녹음실은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있다. 목소리를 보관하고 다시 작업하는 장소 자체가 계속 있을지 알 수 없다. 미정의 부재와 공간의 불안이 겹치면서,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더 잠정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두 사람이 만나 말을 나누는 지금도 언젠가 지나간 시간이 될 것이다.

감독은 침수 피해를 입은 동네 상인들이 다시 가게를 여는 모습을 보고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영화에 그 재난을 그대로 옮겼다는 뜻은 아니다.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문을 열고 일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출발점이었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면, 비어 있는 대사를 붙잡고 녹음실에 남은 두 사람의 작업에도 눈길이 간다.

〈허밍〉은 돌아올 수 없는 배우의 자리를 다른 배우가 맡는다는 곤란한 조건에서 시작한다. 민영의 목소리가 미정의 삶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 역할을 이해하고, 누군가가 기억을 꺼내며, 아직 남아 있는 장소에서 함께 듣는다. 빈자리를 없애지는 못해도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

감상 포인트

◆ 성현의 기억과 민영의 연기. 둘이 같은 장면에서 무엇을 알아내려 하는지 비교해 보자. 실제 배우를 기억하는 일과 영화 속 역할을 이해하는 일이 협업 안에서 만난다.

◆ 김밥을 먹으며 이어지는 말. 속을 덜어 내는 작은 행동이 대사의 호흡과 어떻게 함께하는지 보자. 미정을 사연 속 인물 이전에 먹고 이야기하던 사람으로 만날 수 있다.

◆ 주변 소리 사이의 허밍. 환경음을 녹음하다 성현이 노래를 끝까지 듣는 순간에 귀를 기울여 보자. 단어를 확인하려는 현재의 작업과 다른 방식으로 한 사람을 듣는 장면이다.

◆ 현재의 녹음실과 과거의 촬영 현장. 장면이 바뀔 때 같은 인물이 누구의 기억 또는 어떤 영화 속에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시간의 이동이 성현이 아는 것과 관객이 보는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든다.

관련 작품

◆ 〈오마주〉(2021, 신수원) — 사라진 영화의 소리를 복원하던 감독이 앞선 여성 영화인의 흔적을 찾아간다. 기술적인 복구가 사람을 기억하는 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함께 볼 만하다.

◆ 〈아무도 없는 곳〉(2021, 김종관) —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만남을 통해 기억과 상실을 더듬는다. 듣는 사람에게 남는 것이 정확한 사건의 내용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어서 생각하게 한다.

이 글은 자료 조사와 집필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