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긴 독백을 조금 나누거나 고치고 싶었다. 대사를 해야 할 자신도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왜 그 자리에서 길게 말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허밍〉에서 미정(박…
배우는 긴 독백을 조금 나누거나 고치고 싶었다. 대사를 해야 할 자신도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왜 그 자리에서 길게 말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허밍〉에서 미정(박서윤)의 독백을 준비하며 오간 이야기다. 영화의 감독 이승재는 그 대사만큼은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촬영장에서 감독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배우의 생각도 달라졌다. 그 말에는 세상을 떠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박서윤은 그 사정을 듣고 대사를 다시 살펴보니 어떤 마음으로 쓴 것인지 알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뜻을 모르는 문장을 외우는 일과 누군가 대신 전할 말을 이해하는 일은 다르다. 영화 속에서는 한 인물의 독백이지만, 그것을 찍기까지 감독과 배우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있었다. 이승재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와 배우에게 맡기는 일이 가까이 만난 순간이다.
〈허밍〉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배우 미정이 등장한다. 녹음기사 성현(김철윤)은 미정의 목소리가 제대로 담기지 않은 영화를 마무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미정 대신 후시녹음을 할 배우 민영(김예지)이 찾아오면서, 현재의 녹음실과 지난 촬영의 기억이 이어진다. 목소리를 다시 채우는 작업이 남은 사람의 기억까지 건드리는 영화다.
박서윤이 회고한 리딩 과정은 토론에 가까웠다. 배우가 생각을 말하면 감독도 바꿀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긴 독백을 두고 의견이 갈렸던 일도 그 과정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끝내 자기 대사를 지켰다는 결과만은 아니다. 배우가 왜 이 말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감독에게 분명한 문장도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할 사람에게는 낯설 수 있다.
다른 부분에서는 배우 자신에게서 출발해도 좋았다. 박서윤은 미정을 연기하면서 너무 자신처럼 보이지 않는지 감독에게 물었고, 이승재는 그래도 괜찮다고 답했다. 세상을 떠난 인물이라는 설정을 계속 의식하기보다, 그 장면 안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연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감독이 놓치고 싶지 않은 말과 배우가 자유롭게 채워도 되는 모습이 한 영화 안에 함께 있었다.
김밥을 먹으며 말하는 미정의 모습에는 이런 여유가 남아 있다. 박서윤은 김밥이 너무 커서 대사를 하기 어려워 속을 조금 빼고 먹었다고 했다. 특별한 성격을 보여주려고 미리 설계한 행동은 아니었다. 먹으면서 말해야 하는 배우의 현실적인 어려움이 미정의 생활로 들어간 셈이다. 그 작은 행동 덕분에 미정은 누군가가 그리워하는 대상이기에 앞서 자기 방식으로 먹고 말하는 사람으로 다가온다.
이승재가 〈허밍〉을 생각한 계기에는 동네 시장이 있었다. 2022년 여름, 집 근처 성대시장이 큰 침수 피해를 겪었다. 상인들은 그 뒤 다시 가게를 열었다. 감독은 큰 재해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누군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모습에 마음이 갔다고 말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들도 자신이 살던 집 근처에서 찾았다. 네 해 동안 보아온 곳들이었다. 익숙한 길은 촬영하기 편한 배경 이상이 될 수 있다. 같은 장소를 오가며 다른 모습으로 보았던 시간이 감독에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승재는 그 경험이 장면을 구상하는 데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허밍〉에서 지나간 촬영을 떠올리는 과정은 이 장소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장소는 남아 있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은 더는 만날 수 없다. 성현이 기억하는 미정의 모습과 현재의 녹음실을 오가는 동안, 과거는 이미 끝난 사건의 설명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 해야 하는 작업 안으로 계속 들어온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신 녹음하는 일은 없는 부분을 기술적으로 메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감독이 시장에서 보았던 재개의 모습과 영화 속 작업을 나란히 놓을 수도 있다. 한 번 잃은 것을 모두 되돌릴 수는 없어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다시 할 일이 생긴다. 〈허밍〉은 그 일을 거창한 극복의 선언보다 녹음실에 찾아가고 소리를 듣는 시간으로 보여준다. 익숙한 동네에서 시작한 영화가 개인의 기억과 일하는 사람의 하루를 가까이 놓는 방식이다.
감독이 중요한 장면으로 꼽은 것은 성현이 미정의 허밍을 듣는 순간이다. 주변의 소리를 녹음하는 중에 미정이 허밍을 한다. 평소 성현이라면 제지할 법한 상황이지만, 그날은 끝까지 들어준다. 일에 필요한 소리를 담으려던 시간에 다른 소리가 들어온다.
긴 독백은 감독과 배우가 의견을 나누며 끝까지 지킨 말이었다. 그 말과 함께, 주변의 소리를 녹음하다 잠시 귀 기울인 허밍도 영화에 남는다. 관객은 미정이 전하는 말뿐 아니라, 노래를 흥얼거리던 모습도 기억하게 된다.
◆ 긴 독백을 말하는 배우 — 미정이 길게 말하는 대목에서 문장의 내용과 배우가 말을 이어가는 호흡을 함께 들어보자. 감독에게 중요했던 말을 배우가 이해한 뒤 연기했다는 사정을 알면, 대사를 전달하는 일이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맡는 일이었다는 점도 생각할 수 있다.
◆ 김밥을 먹으며 말하는 모습 — 미정이 김밥을 먹는 행동과 대사가 어떻게 함께 이어지는지 보자. 먹기 불편했던 배우가 찾아낸 방법이 인물의 일상으로 남았다. 슬픔의 대상이라는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던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 미정의 연기와 민영의 후시녹음 — 과거 촬영에서 미정이 말하는 장면과 현재 녹음실에서 민영이 목소리를 더하는 장면을 구별해 들어보자. 한 사람의 빈자리를 다른 배우의 목소리로 채우려 할 때, 두 사람의 말은 얼마나 같고 다르게 들리는가. 영화 한 편을 마무리하는 작업에 서로 다른 사람의 시간이 들어온다.
◆ 허밍을 끝까지 듣는 성현 — 주변 소리를 녹음하던 성현이 미정을 제지하지 않는 순간에 주목해보자. 일의 목적만 생각하면 멈출 수도 있었던 소리가 이어진다. 나중에 미정의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작업과 함께 떠올리면, 당시에는 사소했던 선택의 무게가 달라진다.
◆ 〈허밍〉 (2024, 이승재) — 소리가 제대로 남지 않은 영화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기억을 만나는 영화다. 감독과 배우가 어떤 말은 지키고 어떤 행동은 현장에서 발견했는지 생각하며 보면, 미정의 말과 몸짓을 더 가까이 살필 수 있다.
◆ 〈오마주〉 (2021, 신수원) — 오래된 영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통해 먼저 영화를 만들었던 여성들의 흔적을 좇는다. 남은 화면과 소리를 손보는 일이 기록 너머의 사람을 알아가는 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허밍〉의 녹음실과 함께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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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