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예쁜데, 시가 써지지 않는다 | MovieLAB LAB

시를 배우러 갔더니 사과부터 보라고 한다. 이미 아는 사과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시 보라는 것이다. 〈시〉의 미자(윤정희)는 문화센터에서 처음 시 쓰기를 배운다. 꽃…

꽃은 예쁜데, 시가 써지지 않는다 | MovieLAB LAB

시를 배우러 갔더니 사과부터 보라고 한다. 이미 아는 사과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시 보라는 것이다. 〈시〉의 미자(윤정희)는 문화센터에서 처음 시 쓰기를 배운다. 꽃 장식이 있는 모자를 좋아하고 옷을 곱게 차려입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것에 관심이라면 원래 많았다. 그런데 예쁜 것을 발견하는 일과 그것을 자기 말로 쓰는 일은 다르다. 미자는 주변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그즈음 미자는 손자 종욱(이다윗)이 또래 소녀를 성폭행한 가해자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해 소녀는 세상을 떠났다. 함께 살며 밥을 챙겨주던 아이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이창동 감독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과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을 한 사람의 생활에 놓는다. 꽃과 나무를 바라보면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적으려는 사람의 마음에는 외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미자의 시가 어려운 것은 좋은 표현을 몰라서만이 아니다.

사과 한 알을 보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

시 수업의 강사는 실제 시인인 김용택이 연기한다. 그의 설명은 어떻게 멋진 문장을 만들지보다 사물을 어떻게 볼지에 가깝다. 김용택은 실제 강연을 녹화한 자료에서 수업 대사가 나왔다고 밝혔다. 늘 곁에 있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세히 보라는 가르침이다.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사과도, 표면의 색과 모양을 살피며 보려면 시간이 든다.

미자에게 그 시간은 낯설고 반가운 것이다. 손자를 돌보고 생계를 위해 일하느라 오가던 길에서 이제는 다른 것을 찾는다. 꽃이 피어 있다는 정보와 그 꽃을 한동안 보고 있는 경험은 같지 않다. 노트에 적을 만한 것을 찾다가 멈추고,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라 다시 바라본다. 관객도 미자가 무엇을 보려고 하는지 기다리며, 그동안 빨리 지나쳤을 풍경 앞에 조금 더 머문다.

그런 미자는 단어를 잊어가기 시작한다. 알츠하이머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는다. 새로 보고 느낀 것을 말로 옮기고 싶은 시기에, 익숙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영화는 이 설정을 시 쓰기의 기적적인 효능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언어를 잃는 어려움과 언어를 찾는 노력이 나란히 이어진다. 단어 하나가 생각나지 않아 머무는 시간도, 한 줄을 쓰려고 오래 생각하는 시간도 미자의 하루에 속한다.

윤정희의 미자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 취향을 지닌 사람으로 보인다. 곱게 차려입는 모습은 형편이 어려운 노년 여성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잘 떠올리기 힘든 구체성이다. 미자를 고통받는 사람으로 이해하면서도, 그가 좋아하는 색과 옷까지 잊지 않게 한다. 영화의 무거운 사정을 안 뒤에도 이 사람이 처음 시 수업을 찾아갔을 때의 기대를 기억하고 싶어진다.

식당 창가 탁자에서 중년 여성과 소년이 마주 앉아 있다

어른들은 해결할 일을 말하고, 미자는 한 아이를 생각한다

가해 학생들의 보호자들은 사건을 수습할 방법을 논의한다. 돈을 모아 합의하려는 이야기가 오간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아이들의 앞으로의 생활이다. 이미 한 아이의 삶이 끝났는데 대화는 살아 있는 가해자들의 미래를 지키는 쪽으로 진행된다. 미자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손자를 키우는 보호자라는 사실이 그를 이 논의 밖에 둘 수 없게 한다.

여기서 미자가 처음부터 다른 어른들보다 옳은 사람이라고 정해두면 그의 곤란함을 놓치기 쉽다. 미자에게도 지키고 싶은 손자가 있다. 사정을 알기 전까지 함께 살던 생활을 바로 끊어낼 수는 없다. 아이의 끼니와 빨래 같은 일은 다음 날에도 남는다. 그렇다고 일상을 돌본다는 이유로 손자가 한 일을 없던 일처럼 생각할 수도 없다. 가족의 생활을 계속하는 손과, 다른 아이의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이 한 사람에게 함께 있다.

이창동은 가해자의 할머니가 느끼는 죄의식과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마음 사이의 갈등에 관심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미자 대신 범인을 추적할 필요는 없는 영화다. 누가 사건에 관련돼 있는지는 이미 알려졌다. 더 어려운 것은 알고 난 뒤에도 그 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진실을 알면 모든 선택이 분명해질 것 같지만, 미자의 하루는 그때부터 더 복잡해진다.

살구가 떨어진 길에서도 미자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길이 피해자 가족에게 가는 길이라는 사정과 떨어뜨려 볼 수는 없다. 어떤 풍경을 예쁘다고 말하는 일이 그곳에서 살던 사람의 고통을 잊게 할 때도 있다. 미자를 따라가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 늘 옳은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만큼 무엇을 잠깐 잊고 있는지도 중요해진다.

밝은 마당에서 흰 셔츠를 입은 여성이 팔을 모으고 위를 바라본다

남의 일을 자기 말로 쓰기까지

미자는 자신과 직접 만난 적 없는 소녀의 삶을 알아가야 한다. 그 아이는 가해자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대화 안에서는 사건의 일부로 불리기 쉽다. 하지만 시를 쓰려는 미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사건을 정리할 조건만이 아니다. 그 아이는 어떤 곳에서 살았고 무엇을 보았을지,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견뎠을지 생각할 자리가 생긴다. 한 사람을 안다는 일은 그가 겪은 피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오래 걸린다.

그 과정에서 미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망설인다. 고통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모른다는 이유로 관심을 거두기도 어렵다. 시를 쓰는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이 망설임과도 닿아 있다. 상대의 경험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 경험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처음의 바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는지의 문제로 넓어진다.

영화도 미자의 속마음을 전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행동을 보여주면서 그가 언제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관객에게 남겨두는 순간들이 있다. 감독은 시가 적힌 페이지처럼 관객이 채울 자리가 있는 영화를 생각했다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모든 빈칸에 하나씩 정답을 넣는 일이 아니다. 미자가 얼마나 어려운 선택 앞에 있는지 알기에, 드러나지 않은 마음까지 서둘러 단정하지 않고 지켜보는 일이다.

〈시〉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 기대가 산산이 깨지는 순간만 보여주는 영화였다면 꽃을 좋아하는 미자가 처음부터 철없었다고 말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꽃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보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뿐이다. 미자가 이전처럼 예쁜 것만 적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프다. 동시에 그 어려움 때문에 그가 쓰려는 한 편의 시를 더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의 일을 알고도 평소와 똑같이 돌아가는 생활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시를 쓰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이 그 일상 앞에 자꾸 멈춰 선다. 사과를 다시 보던 연습이 끝내 사람을 다시 보는 일로 이어지는 듯하다. 미자가 어떤 훌륭한 문장을 완성할지보다, 그 문장 안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지가 마음에 남는다. 아름다운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관객도 어느새 다른 이유로 그 한 줄을 기다리게 된다.

감상 포인트

◆ 사과를 들고 하는 수업 — 시 강사가 설명하는 것이 글의 형식인지 사물을 대하는 태도인지 구별해보자.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보는 연습은 이후 미자가 사람을 바라보는 일과도 닿는다. 처음에는 소박하게 들렸던 말이 뒤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느껴볼 수 있다.

◆ 미자가 고른 옷과 모자 — 형편이나 나이를 설명하는 정보만큼 미자의 취향에도 관심을 두자.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에게도 오래 좋아해온 것이 있다. 윤정희가 만든 구체적인 모습을 기억하면 미자를 하나의 교훈을 전하는 인물로만 보지 않게 된다.

◆ 보호자들이 걱정하는 미래 — 사건을 논의하는 어른들이 누구의 앞날을 이야기하는지 들어보자. 같은 사건에 관해 말하면서도 이미 사라진 아이의 시간은 쉽게 밀려난다. 미자가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 살구를 보는 동안 잊고 있던 일 — 미자가 풍경에 이끌릴 때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도 떠올려보자.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감각이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는 능력과 언제나 같지는 않다. 영화는 두 경험이 부딪히는 순간을 남겨둔다.

관련 작품

◆ 〈버닝〉 (2018, 이창동) — 소설가가 되고 싶은 청년이 자신이 본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그를 충분히 안다는 뜻인지 생각을 이어갈 수 있다. 해미의 말과 춤을 두 남자의 사건 밖에서도 기억해보면 좋다.

◆ 〈아무도 없는 곳〉 (2021, 김종관) — 소설가가 여러 사람의 기억과 상실에 관한 말을 듣는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글로 옮길 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알 수 없는지 살펴볼 만하다. 듣는 시간 자체가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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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