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의 인물들은 아직 첫 문장을 쓰는 중이다 | MovieLAB LAB

미자는 시를 한 편 써보려고 주변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다. 꽃과 나무를 그냥 지나치던 때와 달리, 이제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알고 싶다. 〈시〉에서 윤정희가 연기하는 미자는 동네 …

이창동의 인물들은 아직 첫 문장을 쓰는 중이다 | MovieLAB LAB

미자는 시를 한 편 써보려고 주변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다. 꽃과 나무를 그냥 지나치던 때와 달리, 이제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알고 싶다. 〈시〉에서 윤정희가 연기하는 미자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처음 시를 배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변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움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도 알게 된다. 첫 작품을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수도 있다.

이창동의 영화에는 이처럼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마음만으로 일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 무엇을 놓쳤는지, 누구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을 지켜보다 보면 감독에게 묻고 싶어진다. 이창동은 왜 아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시〉 스틸 · TMDB

〈시〉 스틸 · TMDB

한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

영화감독이 되기 전 이창동은 소설가였다. 그는 어린 시절 자주 이사하며 혼자 지내던 경험을 돌아보면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소설을 썼다고 설명했다. 소설을 쓸 때 상상하는 독자는 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글을 읽고 함께 웃거나 슬퍼할 누군가를 떠올린 것이다. 영화를 만들게 된 뒤에도 관객과 감정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남아 있었다.

이 말을 떠올리며 미자의 시 수업을 보면, 왜 처음 쓰는 시 한 편이 영화에서 그토록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미자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주변을 다시 살핀다. 영화는 그 과정을 오래 보여준다.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있고, 그렇게 보게 된 것을 외면하기 어려워지는 순간도 있다.

미자는 시를 배우며 기뻐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고통스러운 일을 알고 나서는 아름다운 것만 찾을 수 없게 된다. 시를 쓴다고 그 일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자가 어떤 시를 쓰게 될지 궁금한 이유도 달라진다. 처음에는 초보자가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면, 이제는 그가 알게 된 고통을 시에 어떻게 담을지 기다리게 된다.

〈버닝〉 스틸 · TMDB

〈버닝〉 스틸 · TMDB

작가 지망생에게 맡긴 수수께끼

〈버닝〉의 종수도 첫 작품을 앞둔 사람이다. 유아인이 연기하는 그는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막막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이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창동은 그를 아직 소설가가 되지 못한 청년으로 바꾸었다. 종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슨 뜻인지부터 헤아려야 한다.

종수는 해미와 벤을 만나면서 알 수 없는 일을 겪는다. 그들의 말을 듣고 생활을 들여다보지만, 보고 들은 일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미자와의 차이가 생긴다. 미자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을 보려 한다면, 종수는 자신이 본 것에 자꾸 뜻을 붙이려 한다. 두 사람 모두 쓰려는 사람이지만, 바라보는 태도까지 같지는 않다.

소설가 출신 감독이 만든 작가 지망생이라고 해서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종수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잘못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할 때는 재능이 있는지만 궁금해지지 않는다. 이야기에 담으려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지도 묻게 된다.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하기까지

이창동은 〈시〉 이후 여러 이야기를 준비했지만, 왜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해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생각해둔 이야기가 있어도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엇을 쓸지 몰라 서성이는 종수를 만든 감독 역시,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야 할지 오래 생각했다.

〈버닝〉을 만들기로 한 뒤에도 인물에 관한 답을 모두 정해 배우에게 전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배우와 함께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벤은 감독과 배우 모두에게 해석이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스티븐 연의 벤은 친절하게 말하지만, 그 말투만으로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다. 감독과 배우가 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고 해서, 영화가 그의 속마음까지 관객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말투와 행동을 지켜보며 직접 판단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감독의 고민과 두 주인공의 고민이 닮아 보인다. 경력이 쌓였다고 해서 다음 이야기를 써야 할 이유까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미자에게는 처음 시를 쓰는 까닭이 필요하고, 종수에게는 소설로 쓸 이야기가 필요하다. 감독에게도 촬영을 시작할 이유가 필요했다. 두 인물을 곧바로 감독 자신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처음 쓰는 사람의 막막함을 이창동도 잘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왜 지금 이 감독을 볼까

누군가를 짧게 설명하는 말은 편리하다. 가난한 청년, 외로운 노인, 수상한 부자. 하지만 이런 소개만으로 미자가 왜 시를 쓰려 하는지, 종수가 왜 벤을 의심하는지 알 수는 없다. 이창동은 인물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오래 보여준다. 처음에는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지켜볼수록 궁금한 점이 늘어난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인물을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전보다 어려워진다.

감상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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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