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의 윌리엄 리(다니엘 크레이그)는 극장에서 곁에 앉은 청년 유진 앨러턴(드류 스타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런데 화면에서 먼저 뻗어 나가는 것은 리의 몸에 겹쳐진 반투명한…
〈퀴어〉의 윌리엄 리(다니엘 크레이그)는 극장에서 곁에 앉은 청년 유진 앨러턴(드류 스타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런데 화면에서 먼저 뻗어 나가는 것은 리의 몸에 겹쳐진 반투명한 손이다. 상상 속에서만 할 수 있었던 행동이 눈앞에 보인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리가 얼마나 간절한지 설명하기에 앞서, 닿고 싶은 마음을 이런 모습으로 보여준다.
리는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 머무는 미국인이다.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앨러턴을 만난 뒤에는 그의 작은 반응이 하루의 기분을 좌우한다.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가 생긴다. 두 사람은 가까워지지만 리가 원하는 확신은 쉽게 오지 않는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몸을 나누어도, 상대가 자기만큼 이 관계를 바라는지는 알 수 없다.
리의 매력에는 우스운 구석이 있다.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자신을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상대가 좀 더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말 속에 배어 있다. 크레이그는 이런 남자의 능청스러움과 초조함을 함께 드러낸다. 관심을 끌려는 노력이 보일수록 웃기면서도, 그 노력이 아무 보답을 받지 못할까 봐 신경이 쓰인다.
앨러턴은 리처럼 자기 마음을 많이 내보이지 않는다. 둘의 연기는 크기부터 다르다. 한쪽이 적극적으로 말하고 움직일 때 다른 쪽은 적은 반응만 보인다. 관객도 리와 함께 그 반응을 해석하게 된다. 방금의 미소가 호감인지 예의인지,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믿어도 되는지 자꾸 가늠한다. 연애의 긴장이 대단한 사건 없이도 만들어진다.
이때 앨러턴의 마음을 쉽게 정해버리지 않는 편이 영화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마음이 곧 없는 마음은 아니다. 다만 리에게는 그 차이를 오래 기다릴 여유가 없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는 소망은 어느새 상대를 완전히 알고 싶다는 욕심으로 커진다. 닿을 수 있는 몸이 가까이 있을수록, 알 수 없는 마음은 더 멀게 느껴진다.
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인물의 속마음을 이미지로 만드는 데 거리낌이 없다. 반투명한 손도 그중 하나다. 손이 닿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대신, 현실의 몸과 상상의 몸을 한 화면에 겹쳐놓는다. 관객은 이루어진 일과 바라는 일을 동시에 본다. 리가 겉으로 얼마나 태연한 척하든, 숨길 수 없는 소망이 몸 밖으로 나와 있다.
구아다니노는 멕시코시티와 정글의 풍경도 주로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지어 촬영했다. 실제 장소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인물의 욕망과 불안에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화면이 어딘가 인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런 선택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는 낯선 도시를 둘러보는 기분과 한 사람의 꿈속을 걷는 기분이 겹친다.
배경은 1950년대인데 음악에는 훗날의 록이 섞인다. 니르바나의 노래가 흐르는 순간, 이 사랑을 옛날 사람들의 일로만 바라보기가 어려워진다. 옷과 거리의 모습은 오래되었어도 애타는 기분은 지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전해진다. 시대를 꼼꼼하게 재현하는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낯선 인물의 감정이 갑자기 가까워지는 것이다.
리는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한다는 환각성 식물 야헤를 찾으러 앨러턴과 남아메리카로 떠난다. 리는 그 식물에 기대를 걸고,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는 가능성에 매달린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말을 해석하는 일이 이토록 힘들다면, 마음 자체에 닿을 수는 없을까. 그 소망이 여행의 기이한 방향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익숙한 연애의 대화에서 멀어지고 몸과 움직임, 환상에 더 많은 시간을 내준다. 크레이그와 스타키는 촬영 전부터 함께 움직이는 연습을 했다. 서로에게 반응하는 몸의 감각이 두 사람의 친밀함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모든 장면을 말로 번역하려 애쓰기보다, 가까워지려는 몸이 얼마나 애쓰는지 따라가면 초반의 리와 이어진다. 처음부터 그는 말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을 안고 있었다.
리의 간절함을 지켜보는 일에는 불편함도 있다. 상대를 알아가려는 마음과 자기 불안을 없애려는 마음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크레이그의 리는 그 불편함을 깨끗이 정리해놓고 사랑받으려 하지 않는다. 허세를 부리고, 웃기려 애쓰고, 상처받을 가능성을 뻔히 알면서 다시 다가간다. 그 모습을 오래 보다 보면 처음의 반투명한 손이 달리 남는다. 대단한 환상 장면이기 전에,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한 번 더 만지고 싶은 남자의 손이었다. 그렇게 작은 바람이 한 사람을 얼마나 멀리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 〈퀴어〉는 끝까지 따라간다.
◆ 말이 많은 사람과 말이 적은 사람 — 리와 앨러턴이 대화할 때 누가 관계를 이어가려고 더 애쓰는지 살펴보자. 말의 양뿐 아니라 반응을 기다리는 시간도 두 사람 사이를 드러낸다. 앨러턴이 마음을 명확히 밝히지 않을수록 리의 기대와 초조함이 어떻게 커지는지 볼 수 있다.
◆ 반투명한 손 — 실제 몸 위로 겹쳐지는 손의 움직임에 주목해보자. 마음속 소망을 대사로 듣는 것과 눈앞의 행동으로 보는 것은 다르게 다가온다. 닿고 싶다는 감정을 이렇게 드러내고 나면, 뒤이어 리가 태연하게 행동하는 순간에도 그 간절함이 남아 있다.
◆ 시대와 어긋나는 노래 — 오래된 거리와 옷차림 사이로 익숙한 록 음악이 들어올 때 화면의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들어보자. 음악은 배경 연도를 알려주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리의 외로움과 욕망을 오늘의 감각으로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된다.
◆ 함께 움직이는 몸 — 두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 서로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자. 관계를 설명하는 대사만 따라가면 놓치는 머뭇거림과 친밀함이 있다. 뒤쪽의 낯선 이미지들도 처음부터 이어져온 접촉의 소망과 함께 읽을 수 있다.
◆ 〈화양연화〉 (2000, 왕가위) — 가까워지고 싶은 두 사람이 자기 마음을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복도와 방, 서로에게 다가가는 몸의 속도가 감정을 전한다. 욕망을 환상으로 드러내는 〈퀴어〉와 나란히 보면, 하지 못한 행동을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의 차이가 선명하다.
◆ 〈캐롤〉 (2015, 토드 헤인즈) — 서로에게 끌리는 두 여성이 상대의 마음을 읽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시선과 말, 손의 움직임에 마음이 조금씩 드러난다. 감정이 분명해지는 속도가 서로 다를 때 생기는 기대와 불안을 따라가며 두 작품을 이어볼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