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투치는 화가인 아버지의 그림 모델이 된 적이 있다. 늘 보던 아버지가 그때는 자기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바라봤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 그 시선을 받는 동안 아들 역시 아버…
스탠리 투치는 화가인 아버지의 그림 모델이 된 적이 있다. 늘 보던 아버지가 그때는 자기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바라봤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 그 시선을 받는 동안 아들 역시 아버지의 얼굴을 새롭게 보게 됐다.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에는 그려지는 사람도 상대를 관찰하고 있었다.
〈파이널 포트레이트〉를 연출한 투치에게 이 경험은 좋은 출발점이 된다. 영화 속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제프리 러시)는 친구인 작가 제임스 로드(아미 해머)에게 초상화 모델이 되어달라고 한다. 며칠이면 된다는 말을 믿고 앉았는데 작업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화가가 그림을 고치는 동안 모델에게도 일정이 있고, 생각이 바뀌며, 인내심이 줄어든다. 투치는 그 두 사람의 시간을 함께 찍었다.
투치는 자코메티의 출생부터 성공까지를 차례로 보여주는 영화를 택하지 않았다. 제임스 로드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짧은 기간에 집중했다. 감독은 한정된 시간을 들여다봐도 작업실 안팎의 사람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생애의 여러 일화도 그 기간 안에 모아 각색했다.
이 구성 덕분에 화가의 명성을 설명하는 사건보다 지금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의 불만이 앞에 온다. 로드가 보기에는 그림이 잘되어가는 것 같은데 자코메티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시작한다. 이미 대가로 불리는 사람도 자기 눈앞의 그림을 끝내지 못한다.
모델 쪽에서는 그 반복이 다르게 느껴진다. 자코메티에게는 더 그려야 할 이유가 있어도 로드에게는 떠나야 할 사정이 있다. 화가의 고민이 깊다고 모델의 하루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존경하는 예술가 앞에서 조금씩 조급해질 때, 투치의 영화는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생활로 바꾼다.
한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원할수록 다른 사람은 더 기다려야 한다. 이런 장면은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다. 누군가의 작업을 믿고 시간을 내주었다가, 언제 끝날지 물어보기 어려워졌던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대가의 특별한 고뇌가 그 옆에 앉은 사람을 통해 가까워진다.
투치와 제작진은 영화에 쓸 그림을 준비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만났다. 완성된 초상화 하나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배우가 그리다가 덮어버릴 수 있도록 중간 단계의 그림들이 필요했다. 화가 로한 해리스가 작업에 참여했고, 일부 단계는 같은 상태의 캔버스를 더 마련해야 했다.
그림을 지우는 연기가 자유로워 보이려면 카메라 뒤에서는 무엇을 지울지 정확히 준비해야 한다. 한 번 덮은 그림은 바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투치는 자코메티가 초상화를 그리는 기록 영상도 참고했다. 붓이 빈 캔버스에 처음 닿는 과정부터 알아야 배우가 작업하는 모습에 설득력이 생겼다.
미술감독 제임스 메리필드는 자코메티의 작업실을 세트로 재현했다. 자료에 충실하되 배우와 촬영진이 움직일 수 있도록 크기는 조금 넓혔다. 관객에게는 어수선하고 비좁은 생활 공간처럼 보이는 곳도, 촬영을 위해 여러 사람이 설계한 장소였다.
영화 속 미완성은 이렇게 많은 준비를 거쳐 만들어졌다. 자코메티가 만족하지 못해 붓을 드는 순간을 찍기 위해 다른 화가와 미술팀은 그가 지울 그림을 완성해야 했다. 투치는 창작의 망설임을 말로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손이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고 없애는 모습을 관객 앞에 놓는다.
투치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가까이했고 자코메티의 작품도 오래 좋아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그를 상냥한 사람으로 다듬으려 하지는 않았다. 감독은 자코메티가 어떤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 아내에게는 몹시 이기적일 수 있다는 점을 숨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창작에 몰두한 사람의 변덕이 옆 사람에게는 피곤한 하루가 된다. 관객이 자코메티의 불만에 웃더라도, 그 불만을 받아내는 이의 표정까지 함께 보게 된다. 작품이 뛰어나다는 사실로 가까운 사람의 불편함을 지워주지 않는 것이다. 투치의 애정은 화가의 행동을 전부 좋게 설명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이 태도는 그가 연출자로서 자기 자리를 고른 일과도 이어 생각해볼 수 있다. 배우로 익숙한 투치지만 이 작품에는 직접 출연하지 않았다. 자코메티나 동생 디에고 역을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결국 영화의 섬세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고 했다. 화면 안에서 한 역할을 차지하는 대신 다른 배우들이 만드는 관계 전체를 보려 했다.
투치가 캠벨 스코트와 공동 연출한 〈빅 나이트〉에서도 일하는 사람의 기준과 주변의 요구가 부딪친다. 이탈리아 식당을 운영하는 형제에게 좋은 음식은 무엇인지, 손님을 만족시키려면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가 걸린다. 미술과 요리는 다르지만, 자기 일에 고집이 있는 사람과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함께 본다는 점은 두 영화를 이어준다.
〈파이널 포트레이트〉를 보고 나면 자코메티의 손만큼 로드의 기다리는 얼굴도 기억할 만하다.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일에는 집중을 받는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버지 앞에 모델로 앉아본 투치는 그림을 그리는 기쁨만이 아니라, 그 시선을 받으며 앉아 있는 기분도 영화에 남겼다.
◆ 그리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 자코메티의 불만과 로드의 반응을 함께 보자. 같은 작업이 한쪽에는 더 필요한 시간이고 다른 쪽에는 미뤄지는 일정이다. 두 사람이 시간을 다르게 느끼는 데서 생기는 유머를 발견할 수 있다.
◆ 덮어버리기 전의 그림 — 붓질이 반복될 때 캔버스가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자. 완성된 작품만 보여주는 영화와 달리 중간 과정의 그림에도 눈길을 주게 된다. 화면 속 실패와 망설임을 구현한 제작진의 준비도 떠올려볼 만하다.
◆ 작업실을 함께 쓰는 사람들 — 화가에게 편한 생활이 주변 사람에게도 편한지 보자. 그가 누구에게 관대하고 누구의 요구에는 무심한지에 따라 작업실의 관계가 달리 느껴진다. 존경과 불편함이 함께 생기는 인물의 초상을 만날 수 있다.
◆ 다시 시작되는 작업의 리듬 — 초상화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멈추는 순간들을 지켜보자.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 다른 일이 끼어들고, 다시 그림 앞으로 돌아온다. 투치가 반복을 인물 사이의 이야기로 만드는 방식을 볼 수 있다.
◆ 〈파이널 포트레이트〉 (2017, 스탠리 투치) — 한 점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화가와 모델의 생활이 엇갈린다. 작품의 탄생을 축하하기 전에 그 작품 곁에서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보는 영화다.
◆ 〈빅 나이트〉 (1996, 캠벨 스코트·스탠리 투치) — 식당을 운영하는 형제가 중요한 저녁을 준비한다. 자신의 일에 대한 기준과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는 요구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점에서, 투치가 창작자를 바라보는 관심을 다른 일터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