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또 떠나야 할까 | MovieLAB LAB

면접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한다. 거창한 포부를 둘러대지 않는 이 대답이 반갑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한영(이설)은 북한을 떠나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중국에서 …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또 떠나야 할까 | MovieLAB LAB

면접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한다. 거창한 포부를 둘러대지 않는 이 대답이 반갑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한영(이설)은 북한을 떠나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중국에서 익힌 말을 살려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도 땄다. 이제 그 능력으로 돈을 벌고, 서울에서 자기 생활을 꾸리고 싶다. 누가 봐도 이상할 것 없는 바람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준비를 마친 사람에게도 좀처럼 출발 신호를 주지 않는다.

곽은미 감독이 따라가는 것은 한영이 한국에 오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이 아니다. 도착한 뒤, 일을 구하고 사람을 사귀고 여기서 살아갈 수 있을지 헤아리는 몇 년이다. 자격증을 땄으니 일을 배우면 되고, 일을 잘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한영도 차근차근 그 순서를 밟는다.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고 나면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더 노력해보라는 말을 선뜻 건네기 어렵다. 이 사람은 이미 애쓰고 있다.

일은 배우면 되지만, 손님까지 만들 수는 없다

가이드가 된 한영은 눈치가 빠르고 일을 배우는 속도도 빠르다. 앞서 일한 사람에게서 현장의 방식을 익히며 실적을 쌓아간다. 관광객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일과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일이 꼭 같지는 않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자격증 시험을 통과한 뒤에 시작되는 또 다른 공부다. 손님과 동료를 대할 때마다 어떤 말과 행동이 이곳에서 유리한지 살피게 된다.

그런데 사드 배치로 중국인 관광객이 줄어들면서 한영의 일도 흔들린다. 중국어를 더 잘한다고 혼자 바꿀 수 있는 사정이 아니다. 어제까지 쓸모 있었던 능력이 그대로 있는데,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줄어든다. 멀리 있는 외교 문제가 한 사람의 다음 달 생활과 맞닿는 순간이다. 영화는 한영이 맡은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와 별개로 생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독은 중국어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딴 친구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일하려고 준비한 시간이 있는데 그 사이 바깥의 상황이 달라져버린 것이다. 한영이 겪는 곤란도 이 출발점에서 보면 더 구체적이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실패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그곳에서 살아갈 조건 자체가 바뀐다.

그렇다고 한영의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일거리가 줄기 전 이 사람이 해낸 일들이다. 자격증을 따고 낯선 업무를 익힌 시간은 분명히 있었다. 결과만 보고 그 시간을 헛수고라고 정리하면, 사정이 달라질 때마다 노력한 사람부터 자기 삶을 해명해야 한다. 한영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특별히 뛰어난 성공을 보여줘서가 아니다. 제 몫을 해보려는 사람이 일할 기회를 얻기를 바라서다.

친구가 떠난다는 말에 서운해지는 이유

한영에게는 정미(오경화)가 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정미 역시 탈북민이고, 서울에서 함께 의지해온 언니다. 하고 싶은 말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내는 정미가 곁에 있으면, 한영도 혼자 버틸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같은 사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데 적지 않은 힘이다.

그 정미가 독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친구에게 더 나은 삶이 열리기를 바라면서도, 남겨질 자기 처지가 먼저 걱정될 수 있다. 떠나는 사람의 결심이 틀리지 않았다고 해서 남는 사람의 서운함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일터에서는 관광객이 줄고, 생활에서는 믿었던 사람이 멀어진다. 둘 다 한영이 붙잡고 싶다고 붙잡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서 정미를 한영을 위로하려고 등장한 사람으로만 보면 그 선택이 야속해진다. 하지만 정미에게도 자기 인생을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한영에게 잘 살아보려는 이유가 있듯, 정미에게도 떠날 이유가 있다. 둘의 우정이 소중할수록 어느 한쪽에게만 남아달라고 하기가 어려워진다. 영화의 이별이 힘든 것은 누가 배신해서만이 아니다. 각자 살아보려는 선택이 서로를 외롭게 만들기도 해서다.

한영이 중국에서 함께 지냈던 리샤오(박세현)도 다른 방향에서 그를 찾아온다. 리샤오에게는 한영, 그리고 한영의 동생 인혁(전봉석)과 함께 한국에서 살고 싶은 기대가 있다. 한영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한영과의 생활을 꿈꾼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영에게서 바라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 자기 형편을 추스르기도 벅찬 사람에게 관계란 위안이면서, 쉽게 답할 수 없는 부탁이 되기도 한다.

잘 견디는 얼굴만 보고 괜찮다고 하지 않기

이설은 한영의 감정을 크게 펼쳐 보이기보다 안으로 눌러두는 쪽으로 연기한다. 배우 자신은 평소 표현을 잘하는 편이라 이 인물과 성격이 다르다고 밝혔다. 말수가 적은 인물을 연기하는 동안 자신도 감정을 참는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조용한 얼굴을 만드는 일이 감정을 비워내는 작업은 아니었던 셈이다. 관객 역시 한영이 별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가볍게 넘겼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여러 해가 흐르는 동안 한영에게는 직업과 가족, 친구의 문제가 겹쳐 닥친다. 그중 하나만 해결하면 나머지가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일을 얻었다고 연락이 닿지 않는 동생의 행방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친구를 만났다고 다음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말없이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에는 이런 사정이 함께 쌓인다. 한 장면의 표정에 딱 한 가지 이유를 붙이기보다, 그때까지 지나온 일을 떠올리며 보게 된다.

제목의 '믿을 수 있는 사람'도 그 얼굴 앞에서 조금 더 어렵게 들린다. 관광객이라면 여행을 편하게 안내해줄 사람을 원할 것이다. 직장에서는 실적을 낼 사람, 친구에게는 자기 사정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수 있다. 한영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한영은 언제까지 각자의 기대에 맞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까. 그 역시 누군가를 믿고 잠깐 힘을 빼도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고 나면 한영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보다, 앞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지가 더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탈북민이라는 사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가족과 지나온 생활이 한영의 선택에 계속 영향을 준다. 그 구체적인 사정을 아는 만큼, 우리와 똑같으니 이해한다는 말만으로 다 안다고 하기 어려워진다.

한영이 이곳에 계속 머무는 것을 정착의 성공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다른 곳을 생각한다면 그동안 살아온 시간이 전부 실패가 되는 걸까. 영화를 따라온 뒤에는 그 기준부터 느슨하게 놓아주고 싶어진다. 돈을 벌고 잘 살고 싶다던 첫 바람은 과하지 않았다. 그 바람을 이룰 장소가 달라지더라도, 애써온 한영의 시간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게 된다. 어디에 있든 매번 처음부터 자기 자격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이 사람에게 생겼으면 좋겠다.

감상 포인트

◆ 면접에서 꺼내는 바람 — 한영이 왜 일하고 싶은지 말하는 대목을 기억해두자. 돈을 벌어 잘 살고 싶다는 바람이 이후에 얼마나 많은 조건과 부딪히는지 볼 수 있다. 사정이 나빠졌을 때 그가 처음부터 무리한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떠올리게 된다.

◆ 능력과 일자리 사이 — 한영이 일을 익혀가는 과정과 관광객이 줄어드는 상황을 구별해보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일할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 그 차이를 살피면 인물의 생계를 개인의 노력 하나로 설명하지 않게 된다.

◆ 서로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친구들 — 정미가 떠나려는 이유와 리샤오가 한영과 함께 지내려는 이유를 함께 보자. 한영을 중심에 두고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를 가르는 것만으로는 관계를 다 이해하기 어렵다. 각자 바라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 눈여겨볼 만하다.

◆ 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감정 — 한영이 말을 아끼는 순간에도 앞서 겪은 일들을 떠올려보자. 표정이 차분하다고 편안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설이 감정을 얼마나 크게 드러내는지보다, 드러내지 않은 채 다음 일을 해내는 얼굴에 관심을 두면 좋다.

관련 작품

◆ 〈마담 B〉 (2016, 윤재호) — 북한과 중국, 한국에 걸친 한 여성의 가족과 생활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국경을 넘은 뒤에도 관계와 책임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에서 함께 볼 만하다. 정착했다는 한마디로 설명되지 않는 일상을 실제 인물의 선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 〈한국이 싫어서〉 (2024, 장건재) — 지금 사는 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여자가 다른 나라로 떠난다. 두 주인공의 출발점과 조건은 다르지만,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움직이는 사람을 성공과 실패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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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