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무서워지면, 아이는 어디로 숨을까 | MovieLAB LAB

아이에게 무서운 것이 생기면 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그런 건 없다며 안심시키고, 함께 방을 살펴주고, 다시 재워야 한다. 〈바바둑〉의 아멜리아(에시 데이비스)에게는 그 일을 해낼…

엄마가 무서워지면, 아이는 어디로 숨을까 | MovieLAB LAB

아이에게 무서운 것이 생기면 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그런 건 없다며 안심시키고, 함께 방을 살펴주고, 다시 재워야 한다. 〈바바둑〉의 아멜리아(에시 데이비스)에게는 그 일을 해낼 여유가 거의 없다. 남편을 잃은 뒤 여섯 살 아들 사무엘(노아 와이즈먼)을 키우고 있고, 아이는 밤마다 두려움에 시달린다. 잠을 못 자는 아이 곁에서 엄마도 잠을 못 잔다. 이 집에는 괴물이 들어오기 전부터 끝나지 않는 밤이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책을 읽는다. 페이지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형상의 이름은 바바둑이다. 사무엘은 그 존재를 두려워하고, 아멜리아의 생활도 점점 위협받는다. 그런데 제니퍼 켄트 감독은 괴물이 어디 숨었는지 찾게 하는 것만으로 긴장을 만들지 않는다. 아이를 보호해야 할 엄마의 얼굴이 무서워질 때, 우리는 누구 곁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지친 엄마의 사정을 알면서도 그 앞의 아이가 걱정스럽다.

아이의 목소리가 견디기 힘들 때

사무엘은 엄마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이다. 불안해하고, 소란을 일으키고, 어른을 지치게 한다. 영화는 그 모습을 적당히 귀여운 장난으로만 보여주지 않는다. 사무엘의 요구가 이어지면 관객도 아멜리아에게 잠깐이라도 조용한 시간이 생기기를 바라게 된다. 아이가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침과 애정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피하지 않는다.

그 마음을 따라가는 동안 불편한 일이 생긴다. 아이가 조용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동의했다고 해서, 엄마가 아이에게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두 마음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은 생각보다 급하게 닥친다. 사무엘을 귀찮아하던 어른의 표정이 위협으로 느껴지는 순간, 조금 전까지 누구 편에서 이 집을 보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이가 성가실 수 있다는 사실과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붙잡아야 한다.

에시 데이비스의 연기는 그 불편한 이동을 만든다. 초반에는 감정을 누르고 버티던 얼굴이 갈수록 낯설어진다. 감독은 앞부분에서 감정을 억제하게 하고, 뒤로 갈수록 배우가 더 과감하게 표현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갑자기 다른 인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지켜보던 사람이 달라진다. 그래서 아멜리아가 무서워져도 앞서 보았던 피곤함과 외로움을 잊을 수 없다.

사무엘 역시 엄마를 괴롭히려고만 존재하는 아이는 아니다. 자기에게 무서운 것을 전하고 싶고, 가까운 어른이 그 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듣기 힘든 소리가 아이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방법일 수 있다. 두 사람의 말이 자꾸 어긋나는 동안, 관객은 어느 한쪽의 피로만으로 이 밤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한 명이 조용해지면 해결될 문제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둘 다 혼자 견디고 있다는 문제로 다가온다.

소파에서 여성이 붉은 책을 펼치고 곁의 소년이 책을 바라본다

책장을 덮어도 그림은 남는다

바바둑을 소개하는 물건이 그림책이라는 점은 절묘하다. 잠들기 전 책을 읽어주는 일은 보통 아이를 안심시키는 시간이다. 여기서는 그 익숙한 일이 잠을 더 어렵게 만든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접혀 있던 종이가 일어서고, 그림이 두 사람 쪽으로 튀어나온다. 물건의 작동 방식 자체가 평평한 그림과 같은 방에 있는 존재 사이의 거리를 줄인다.

책은 실제로 손으로 만들어 촬영했다. 감독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작업하며 카메라 앞에 놓을 수 있는 물건을 원했다. 화면 속 인물이 책장을 만지고 넘길 수 있다는 사실은 이 공포에 손의 감각을 보탠다. 머릿속에서만 떠올리는 막연한 형상이 아니라, 펼쳤다가 덮을 수 있는 책으로 먼저 만나는 괴물이다. 없던 일로 돌리고 싶어도 무언가를 보았다는 기억은 남는다.

제니퍼 켄트는 바바둑을 처음부터 뚜렷한 실체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고, 가장 많이 드러나는 모습도 책 안에 두었다고 설명했다. 관객에게 생김새를 전부 익힐 시간을 주지 않는 셈이다. 어떤 몸을 가졌고 어느 정도 힘이 있는지 알면 피할 방법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계산보다, 이미 본 그림이 다음에는 어디에서 떠오를지 기다리는 불안이 먼저 생긴다.

그림책을 단순히 암호가 적힌 물건으로만 읽지 않아도 좋다. 바바둑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하나의 말로 정리하면 마음이 놓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뜻을 알아냈다고 해서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무서워하는 장면까지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감정은 상징 풀이보다 오래 간다. 눈앞의 두 사람이 지금 안전한지가 계속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침대 아래쪽 낮은 시선으로 여성과 소년, 흰 개가 바닥을 살피는 모습이 보인다

괴물을 찾다 엄마의 얼굴을 살핀다

아멜리아가 사는 집은 색부터 답답하다. 푸른색과 어두운 붉은색, 검정과 흰색을 중심으로 꾸몄다. 감독은 촬영한 뒤 색을 빼는 대신 실제 공간과 물건의 색을 제한했다고 밝혔다. 방 전체가 그 선택 안에 놓이니, 어느 한구석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집에 머무는 시간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잠깐 시선을 돌린다고 환한 일상으로 빠져나가기가 어렵다.

화면의 구도 역시 이 집에서 받는 압박을 만든다. 감독은 초반에는 균형이 잡혀 있지만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 좁은 구도를 쓰고, 상황이 흐트러지면서 화면도 기울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엄마가 점점 지쳐간다는 설명을 듣는 대신, 엄마와 함께 머무는 공간이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무서운 것은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형상뿐 아니라 그 형상을 기다리는 시간에도 있다.

그럴수록 데이비스의 얼굴을 더 살피게 된다. 사무엘을 바라보는 시선이 언제 다정하고 언제 견디기 힘들어하는지, 말투가 바뀔 때 아이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진다. 가족에게 익숙한 얼굴이 낯설어지는 과정은 커다란 괴물을 보는 것과 다른 공포를 만든다. 원래 알아보던 사람이기 때문에 작은 변화도 지나치기 어렵다.

남편의 죽음은 그 집 안에서 끝난 일이 아니다. 아멜리아가 애써 감정을 억눌러도 아들과 함께 보내는 생활에는 영향을 미친다. 감독도 사무엘의 소란을 어머니에게 다가가려는 행동과 연결해 설명했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을 어떤 병의 증상이나 한 가지 원인으로 진단할 필요는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두 인물의 특정한 관계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있어도 슬픔을 다루지 못할 때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가 갈 수 있다.

〈바바둑〉에서 바라는 승리는 괴물을 한 번에 쓰러뜨리는 멋진 순간만은 아니다. 엄마가 지쳤다는 말을 할 수 있고, 아이도 무섭다고 말할 수 있는 밤이 찾아왔으면 한다. 둘 중 하나의 감정을 없애야 함께 살 수 있는 집이라면, 누군가는 계속 입을 다물어야 한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선명하다. 무서운 것을 없다고 말하는 대신, 서로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들어줄 수 있을까. 그 일을 시작하기까지가 이토록 무서울 수도 있다.

감상 포인트

◆ 아이의 소리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 — 사무엘의 요구가 이어질 때 누구의 입장에서 듣고 있는지 느껴보자. 엄마가 쉬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이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필요하다. 영화가 그 사이에서 관객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필 수 있다.

◆ 손으로 넘기는 그림책 — 종이가 접히고 일어서며 형상이 나타나는 방식을 보자. 읽어주는 어른과 듣는 아이가 같은 물건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 불안을 키운다. 안심시키려던 취침 전 시간이 공포로 바뀌는 과정에도 주목할 만하다.

◆ 집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색 — 괴물이 나오지 않는 화면에서도 벽과 물건의 색을 살펴보자. 제한된 색이 공간 전체를 하나의 분위기로 묶는다. 무엇이 갑자기 나타나는 순간뿐 아니라, 아무 일 없이 방에 머무는 시간에도 긴장이 생긴다.

◆ 익숙한 얼굴이 낯설어질 때 — 아멜리아의 표정과 말투가 달라질 때 사무엘의 반응도 함께 보자. 한 사람의 연기만 따로 볼 때보다 두 사람 사이의 안전한 거리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잘 느낄 수 있다. 보호자를 믿고 싶은 마음이 공포와 만나는 지점이다.

관련 작품

◆ 〈비바리움〉 (2019, 로칸 피네건) — 집과 양육이라는 익숙한 생활이 낯선 규칙에 갇히는 공포로 바뀐다. 두 작품의 상황은 다르지만, 일상이 끝없이 반복되고 쉴 틈이 없어질 때 공간이 어떻게 무섭게 느껴지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2016, 케네스 로너건) — 가족을 잃은 남자가 조카를 돌보게 된다.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보호자의 슬픔이 정리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어 볼 만하다. 관계를 지키는 일에 사랑 외에도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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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