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소피(프랭키 코리오)가 캠코더를 들고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도 자기 나이였을 때,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휴가지에서 딸이 건네는 장난스러운 인터뷰다. …
열한 살 소피(프랭키 코리오)가 캠코더를 들고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도 자기 나이였을 때,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휴가지에서 딸이 건네는 장난스러운 인터뷰다. 하지만 서른 즈음의 캘럼(폴 메스칼)에게는 대답하기 간단한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열한 살의 기대와 지금의 생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딸은 아직 다 알지 못한다.
〈애프터썬〉은 두 사람이 튀르키예의 휴양지에서 보낸 여름을 따라간다. 수영을 하고, 당구를 치고, 서로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아빠와 노는 일이 즐겁다가도 또래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는 나이의 딸, 딸과 있는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젊은 아버지다. 훗날 어른이 된 소피(셀리아 롤슨홀)는 그때 남긴 영상을 다시 본다. 화면 속 아빠는 여전히 젊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딸의 나이와 마음은 그 여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캘럼은 딸을 대하는 데 익숙하다. 같이 놀고, 놀림을 주고받고, 딸이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살핀다. 함께 살지 않는 부녀라고 해서 만날 때마다 서먹해지는 것은 아니다. 샬롯 웰스 감독은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도 마음은 가까운 아버지와 딸을 그리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큰 다툼을 넣으라는 시나리오 의견을 받았을 때도 그 방향을 택하지 않았다.
이 선택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캘럼의 괴로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도, 딸과 함께 웃은 시간을 전부 거짓으로 고칠 필요는 없다. 소피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삶을 버거워하는 마음이 한 사람 안에 있을 수 있다. 아빠 노릇을 잘하는 날에도 자신을 돌보는 일은 어려울 수 있다. 영화는 한쪽이 드러났다고 다른 쪽을 취소하지 않는다.
폴 메스칼과 프랭키 코리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약 2주를 함께 보냈다. 대사를 반복해서 맞추기보다 수영하고 놀면서 친해졌다. 메스칼은 카메라가 없는 시간에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 준비가 필요한 영화였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편안함을 믿을 수 있어야, 같은 사람에게 다른 얼굴도 있다는 사실이 더 오래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소피에게도 아빠의 슬픔을 알아채기 위한 역할만 주어지지 않는다. 놀고 싶고, 다른 아이들이 궁금하고, 아빠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서운해진다. 여행지의 노래자랑에서 함께 부르려던 아빠가 나서지 않자 소피는 혼자 노래한다. 그 나이의 딸에게는 그 순간의 민망함과 서운함이 먼저다. 나중에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당시의 마음까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여행 영상을 보면 누가 그 장면을 찍었는지 잊기 쉽다. 화면에는 딸이 있는데 아버지는 카메라 뒤에 있다. 소피가 그 영상을 다시 틀면 어린 자기 모습을 보게 되지만, 동시에 아빠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도 알게 된다. 캘럼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도 그가 딸에게 기울였던 관심은 남아 있는 셈이다.
웰스는 캠코더 영상을 캘럼의 시선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록으로 생각했다. 딸이 자기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을 찍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영상이 그의 마음까지 보관해둔 것은 아니다. 얼굴은 남길 수 있어도 그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들려주지 못한다. 더 오래 보고 더 자주 돌려본다고 답이 반드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화면도 모두 같은 성격의 기록은 아니다. 캠코더에 찍힌 영상과 그 밖의 장면들이 함께 나온다. 소피가 기억하는 것, 뒤늦게 헤아리는 것, 직접 보지 못해 상상해야 하는 것이 겹친다. 매 순간을 정확한 회상인지 아닌지 분류하는 데 몰두하면, 왜 이 여행을 계속 떠올리는지는 놓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 끝난 하루를 다시 만나려는 마음이다.
캘럼 혼자 남아 있는 장면에서 관객은 소피와 조금 다른 자리에 놓이기도 한다. 딸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기색을 엿보지만, 그의 삶 전체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표정을 모아 하나의 원인으로 정리하고 싶어져도 영화는 그 확신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끝내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남겨진 영상의 빈자리에서 느끼게 한다.
음악은 이 여행의 시간을 구체적으로 만든다. 휴양지에서 익숙한 노래가 나오고, 아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아빠는 딸에게 함께 춤추자고 한다. 그때그때는 별일 아닐 수 있다. 부모와 노는 것이 좋으면서도 조금 창피해지는 나이에는, 손을 잡고 춤추자는 제안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화는 그 순간을 나중의 소피에게서 다시 바라본다. 한때는 민망해서 머뭇거리던 거리가, 다시 다가가고 싶은 거리로 변한다. 지나간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리움이다. 무엇을 알아내기보다 잠깐만 같이 있고 싶은 때도 있다. 춤은 그 바람을 긴 설명 없이 몸으로 전할 수 있다.
‘Under Pressure’가 흐르는 대목에서도 노래가 인물의 사정을 대신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밝아졌다 어두워지는 화면 속에서 몸짓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누군가를 붙잡아 보려는 마음과 눈앞에서 놓치는 감각이 함께 온다. 감독은 편집 중 이 곡을 영상에 얹어본 뒤 장면의 방향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익숙한 곡을 알아듣는 반가움보다, 지금 그 곡에 맞춰 움직이는 두 사람에게 더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의 감정을 알려고 캘럼의 이후 삶을 하나의 결론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가 말해주지 않은 사건을 맞히는 것보다 소피에게 왜 이 시간이 남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기록에 없는 답을 찾을수록, 기록에 분명히 남아 있는 다정함도 자꾸 다시 보인다.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잘해줬다는 기억이 선명할수록 그 사람의 다른 날들이 더 궁금할 수 있다.
〈애프터썬〉을 보고 떠올리게 되는 사진은 꼭 슬픈 사진일 필요가 없다. 부모가 우스운 포즈를 취하거나 여행지에서 무심히 서 있는 사진일 수도 있다. 어릴 때는 그저 아빠와 엄마였던 사람이 사진 속에서는 지금의 나만큼 젊다. 그 나이에 어떻게 살았는지, 하루를 마치고 무슨 걱정을 했는지 새삼 묻게 된다. 소피가 되감는 여름은 아버지를 모두 이해하게 된 시간이 아니라, 이제야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진 시간에 가깝다.
◆ 서로 장난칠 때의 편안함 — 캘럼과 소피가 함께 웃는 시간을 뒤에 나올 슬픔의 예고로만 보지 말자. 두 사람에게는 이미 쌓인 친밀함이 있다. 그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면, 영화가 아버지의 괴로움과 딸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함께 남기는지 알 수 있다.
◆ 캠코더 뒤에 서 있는 사람 — 여행 영상이 나올 때 누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얼굴이 찍히지 않아도 찍는 사람의 관심은 화면에 남는다. 어른이 된 소피가 어린 자기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시선도 다시 만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 소피가 혼자 부르는 노래 — 노래를 잘하는지보다 아빠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살펴보자. 관객이 캘럼의 상태를 걱정하게 되더라도 어린 소피의 서운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여행을 보내는 두 사람의 사정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춤과 화면의 깜빡임 — 음악을 익숙한 배경으로 흘려듣기보다 몸이 보이고 사라지는 리듬과 함께 느껴보자. 시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대사 없이도 다가가고 놓치는 감정이 전해진다. 장면을 하나의 상징으로 해독하기 전에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가볼 만하다.
◆ 〈와일드라이프〉 (2018, 폴 다노) — 아들의 눈으로 부모의 관계가 달라지는 과정을 바라본다.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도 그 사정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아이가 중심에 있다. 〈애프터썬〉의 훗날 돌아보는 시선과 달리, 아직 그 한가운데 있는 아이의 시간을 살필 수 있다.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2016, 케네스 로너건) — 조카를 돌봐야 하는 남자가 자기 안의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만으로 자기 삶까지 돌볼 힘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어진다. 인물의 사정을 알게 된 뒤에도 쉽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 태도를 비교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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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