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편이라면서 왜 아기를 죽이려 할까 | MovieLAB LAB

우주의 운명이 한 아기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아기가 있는 곳은 거대한 요새가 아니라 프랑스 북부의 어촌이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일을 나가고, 헤어진 아내와 아이를 나누어 돌본…

선의 편이라면서 왜 아기를 죽이려 할까 | MovieLAB LAB

우주의 운명이 한 아기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아기가 있는 곳은 거대한 요새가 아니라 프랑스 북부의 어촌이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일을 나가고, 헤어진 아내와 아이를 나누어 돌본다. 〈엠파이어〉는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을 우주적 전쟁의 한복판에 놓는다. 아이가 자라면 악의 지배자가 된다는 이유로 어느 편은 지키려 하고, 다른 편은 죽이려 한다. 선한 편을 응원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관객은 출발부터 곤란해진다.

브뤼노 뒤몽 감독은 선과 악을 아예 숫자로 나눈다. 악의 세력은 ‘제로’, 선의 세력은 ‘원’이다. 알아보기 쉬운 이름과 분명한 임무가 있다. 하지만 지구에 온 이들은 인간의 몸을 얻고 나서 예정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의 지시를 받는지보다 누구에게 마음이 끌리는지가 중요해진다. 우주에서는 간단했던 구분이 해변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꾸 어긋난다.

악의 후계자에게도 아빠가 있다

조니(Brandon Vlieghe)는 어부이자 아기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악의 세력에 속한 존재다. 아침이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전처와 양육을 나누면서 아이를 지킨다. ‘악의 후계자를 보호한다’는 말만 놓고 보면 거대한 음모지만,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생업과 육아가 들어 있다. 관객은 우주의 적으로 소개된 인물을 마을의 주민으로도 보게 된다.

반대편에서 온 제인(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은 아이를 없애라는 임무를 맡는다. 아기가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지에 관한 정보가 지금 그 아기에게 무엇을 해도 되는지를 결정한다. 여기서 선악의 명칭과 눈앞의 행위 사이에 틈이 생긴다. 아직 어린 아이를 보호하는 쪽이 악이고, 그 아이를 죽이려는 쪽이 선이라는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 어긋남은 복잡한 설정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름은 지나치게 명확하고, 하는 일은 불편할 만큼 구체적이다. 숫자를 기억하는 일은 쉽지만 숫자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관객은 어느 진영이 옳으냐는 질문과 별개로 지금 누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를 보게 된다.

조니가 악의 편이라는 사실도 그를 다 설명해주지 못한다. 몸을 얻은 그는 지구의 즐거움에 빠져 자기 임무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악을 수행하기 위해 온 존재가 인간의 생활에 붙잡힌다. 제국의 명령보다 가까운 사람과 몸의 욕구가 더 세게 작용하는 순간, 거대한 전쟁은 마을의 연애와 양육 문제를 통과해야 하는 일이 된다.

마을 길에서 곱슬머리 여성이 휴대전화를 앞에 들어 바라본다

적을 만나러 왔다가 좋아하게 된다

제인은 조니에게 끌린다. 자신이 없애야 할 아이의 아버지이자 적대 진영의 인물에게 마음이 향하는 것이다. 린(리나 쿠드리) 역시 조니에게 끌리지만, 제인의 경우에는 그 감정이 처음부터 주어진 임무와 충돌한다. 적을 알아보는 것과 그 적에게 매혹되는 일이 한 몸 안에서 함께 일어난다.

뒤몽은 제인이 처음 지닌 초월적인 성격이 인간의 몸을 얻으며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배역의 출신을 알아도 이후 행동을 전부 예상할 수 없는 이유다. 임무를 전달받았을 때의 제인과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제인은 같은 판단을 할 수 없다. 몸은 영혼을 옮겨 담는 빈 그릇처럼 머물지 않는다. 만지고 싶고 가까이 있고 싶은 감각이 새로운 사정을 만든다.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육체적 만남을 넓은 풍경 속에서 보여주는 방식도 흥미롭다. 얼굴과 몸만 화면에 크게 모아 감정의 절정을 강조하기보다, 그들이 있는 땅과 주변 공간을 함께 남긴다. 감독은 조니의 어로 활동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 모두에서 드론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생업과 욕망이 같은 해안의 풍경 안에 놓이는 셈이다.

그렇게 멀리서 보면 우주를 대표한다는 존재들도 이 땅에서 움직이는 몸들이다. 거창한 소속이 그들을 풍경 바깥의 특별한 자리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관객은 중요한 인물의 운명을 좇다가도 그 인물이 차지하는 작은 면적을 함께 보게 된다. 임무를 이탈하는 감정이 우스우면서도 이해되는 것은, 영화가 그들을 추상적인 선악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크기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평평한 들판 위로 길쭉한 건축물 같은 물체가 떠 있다

성당이 우주선의 조종실이 된다

그렇다고 우주적 규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이미 아는 건축물이 낯선 곳으로 이동한다. 생트샤펠을 본뜬 공간이 우주선의 조종실이 되고,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지어진 이탈리아의 카세르타 궁전이 우주선의 이미지에 쓰인다. 미래 기술을 상상할 법한 자리에 성당과 왕궁이 들어온다.

처음에는 이 부조합 자체가 웃음을 준다. 그런데 성당과 궁전은 아무 건물이나 골라 넣은 배경이 아니다. 지상에서도 권위와 초월적 힘을 눈에 보이게 만들던 공간이다. 이를 우주로 보내자 외계의 질서가 낯선 문명인 동시에 익숙한 권력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멀리서 온 제국을 바라보는데 지구에서 보아온 지배의 건축을 알아보게 된다.

해안에 남은 제2차 세계대전의 벙커가 우주선의 착륙장으로 쓰이는 것도 같은 풍경에 다른 시간을 포갠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있는 땅에는 이미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위로 새 전쟁의 장치가 내려온다. 해변은 우주적 사건을 잠시 빌려 쓰는 빈 배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싸움이 겹쳐지는 장소가 된다.

영화는 이 거대한 건축을 인간의 사소한 욕망과 나란히 둔다. 명령을 내리는 쪽의 장엄함이 커질수록 그 명령을 받는 몸의 변덕이 더 눈에 띈다. 성당과 궁전으로 권위를 세워도 제인이 누구를 좋아할지는 간단히 통제할 수 없다. 이 불균형이 영화의 우스꽝스러움을 만든다. 큰 공간을 차지한 쪽이 작은 몸의 행동까지 모두 정하지는 못한다.

엔진에서 들리는 낯익은 음악

익숙한 것을 변형하는 일은 소리에서도 이어진다. 감독에 따르면 우주선 엔진 소리에는 바흐의 음악을 압축하고 변형한 소리가 쓰였다.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바뀐 음악이 기계의 작동음이 된 것이다. 성당을 조종실로 바꾼 화면처럼, 소리 역시 오래된 문화의 재료를 미래의 장치 속에 넣는다.

이 제작상의 단서를 알고 나면 우주선이 나타날 때 무엇이 들리는지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화면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효과음이 얼마나 과장하고 있는지, 웅장한 음악이 인물의 행동과 잘 맞는지 살펴볼 수 있다. 뒤몽은 음악이 상황에 비해 지나칠 때 생기는 어긋남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소리는 화면의 감정을 그대로 확인해주기보다 다른 크기의 감정을 들이민다.

성스러운 건축과 변형된 음악, 거대한 우주선과 어촌의 생활은 서로 다른 영화를 이루는 재료처럼 보인다. 〈엠파이어〉는 그 재료들을 한곳에 놓고 자꾸 부딪치게 한다. 그때 가장 궁금해지는 것은 어느 제국이 더 강한가보다, 이곳에 온 존재들이 계속 명령대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아기를 돌보고, 배를 타고, 적을 좋아하게 되는 몸이 이미 다른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감상 포인트

1. 이름과 행동을 따로 보기 제로와 원의 설명을 들은 뒤 실제로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해치려 하는지 보자. 선악의 명칭은 간단하지만 아기가 그 판단을 복잡하게 만든다. 진영을 기억하는 일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일이 달라진다.

2. 풍경 안의 두 사람 제인과 조니가 가까워질 때 화면이 인물에게 얼마나 다가가는지 살펴보자. 주변의 땅과 바다가 함께 남으면 감정의 크기와 몸의 크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생업을 보여주는 장면과도 거리를 비교할 수 있다.

3. 우주로 옮겨간 건축 우주선 내부에서 낯익은 성당과 궁전의 형태를 찾아보자. 미래의 기술과 오래된 권위가 한 공간에 겹친다. 해안의 벙커까지 함께 보면 영화가 서로 다른 시대의 전쟁을 한 풍경에 놓는 방식이 보인다.

4. 너무 웅장한 소리 음악과 효과음이 인물의 행동에 비해 얼마나 큰지 들어보자. 특히 우주선의 소리는 바흐를 알아맞히기보다 음악이 기계음으로 변형되는 발상을 떠올리면 흥미롭다. 소리가 장면과 어긋날 때 생기는 웃음도 놓치지 말자.

관련 작품

〈슬랙 베이〉(2016), 브뤼노 뒤몽 프랑스 해안 마을을 찾은 부르주아 가족과 그곳 주민들의 만남을 기괴한 희극으로 그린다. 낯선 사람과 익숙한 풍경이 부딪칠 때 생기는 웃음을 비교할 수 있다. 같은 감독이 해변을 얼마나 다른 종류의 갈등에 사용하는지도 흥미롭다.

〈언더 더 스킨〉(2013), 조너선 글레이저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지상에 온 외계 존재를 따라간다. 인간의 몸을 단순한 위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묻는 점에서 제인의 변화와 이어진다. 이 영화의 차갑고 불안한 감각을 뒤몽의 어수선한 희극과 견주면 같은 출발이 만드는 차이가 선명하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