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의 괴물은 자취방 벽에서 자랐다 | MovieLAB LAB

박세영 감독은 자취방 벽의 곰팡이를 포스터로 가려두었다. 닦아도 자꾸 생기니 눈에라도 안 보였으면 했던 것이다. 이사를 앞두고 포스터를 떼자 그 뒤에서 곰팡이가 털처럼 자라 있었…

박세영의 괴물은 자취방 벽에서 자랐다 | MovieLAB LAB

박세영 감독은 자취방 벽의 곰팡이를 포스터로 가려두었다. 닦아도 자꾸 생기니 눈에라도 안 보였으면 했던 것이다. 이사를 앞두고 포스터를 떼자 그 뒤에서 곰팡이가 털처럼 자라 있었다. 징그러웠지만 그 질긴 생명력이 애잔하기도 했다고 한다. 보기 싫어 가려둔 것이 첫 장편 〈다섯 번째 흉추〉의 주인공이 됐다.

영화 속 곰팡이는 벽 대신 버려진 매트리스에서 태어난다. 매트리스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그 안의 생물도 새 장소로 옮겨간다. 사람의 척추뼈를 탐하는 위험한 존재지만, 영화는 그것을 발견해 퇴치하려는 인간의 이야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박세영은 곰팡이가 얼마나 멀리 가고 어떻게 자라는지에 관심이 있다.

자취방에서 생긴 경험을 영화로 옮기는 방법이 흥미롭다. 자기와 비슷한 청년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대신 함께 방을 쓰던 생물을 골랐다. 곰팡이를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자 이사와 이별, 누군가의 침대에서 지내는 일도 다른 이야기가 된다.

〈다섯 번째 흉추〉 — 매트리스 가까이 누운 인물

주인공에게는 표정이 없다

곰팡이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긴 대사를 할 수 없다. 박세영은 이 제약 안에서 감정을 전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영화의 장을 나누는 날짜 표시는 그중 하나다. 인간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기준으로 시간을 세는 대신, 생물이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뒤의 시간을 알려준다. 누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지부터 달라진다.

매트리스에 눕는 사람에게는 자기 사정이 있다. 함께 지내는 연인의 관계가 흔들리고, 잠시 쉬어갈 자리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화면을 떠난 뒤에도 매트리스는 남는다. 관객은 사람의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다가 다시 생물의 이동을 따라가야 한다. 주인공을 곰팡이로 정한다는 것은 신기한 설정 하나를 붙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구를 계속 따라갈지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감독은 소리에도 감정의 몫을 맡겼다. 화면만으로 의도한 정서를 다 전하지 못할 수 있어, 관객이 생물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사운드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정리하면 기묘한 사건이 이어진다. 그런데 소리를 함께 듣고 있으면 그 이동에 쓸쓸함이 생긴다. 무서운 존재를 보고 있으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조금 더 따라가고 싶어진다.

그 연민이 곰팡이를 안전한 존재로 바꾸지는 않는다. 인간의 몸에서 뼈를 가져가는 생물이라는 사실은 그대로다. 박세영이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없애고 싶은 마음과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생기는 상황이다. 포스터를 떼어냈던 자신의 경험을 관객에게 똑같이 요구하지 않으면서, 징그러움만으로 끝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놓는다.

고양이 털과 먼지로 만든 생명

〈다섯 번째 흉추〉의 생물을 만드는 데에는 감독과 미술 작업자의 집에서 나온 고양이 털, 먼지도 쓰였다. 왁스 등 여러 재료를 섞어 질감을 만들었다. 어떤 재료인지 알고 나면 화면 속 낯선 덩어리에서 뜻밖의 생활감이 느껴진다. 상상 속 생물을 만들려고 손에 닿는 것들을 모은 흔적이다.

박세영은 처음에 좋아하던 옛 공포영화의 괴물 같은 모습을 생각했다. 하지만 제작비 안에서 가능한 형태를 찾아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붙잡은 것은 표면의 질감이었다. 거대한 움직임이나 복잡한 장치가 없어도, 가까이 찍힌 재료의 모습은 관객에게 만졌을 때의 감촉을 상상하게 한다. 매트리스라는 일상적인 물건이 낯설어지는 데에는 이 촉감이 중요하다.

누운 생물이 척추를 탐하는 이유를 묻자 감독은 몸을 세우려면 단단한 뼈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의학적인 설정을 정교하게 쌓는 답변은 아니었다. 어떤 몸에서 어떤 몸으로 바뀌고 싶은지, 그 변화를 눈으로 보여주기 위한 생각이었다. 박세영은 먼저 생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떠올리고 그에 맞는 이야기를 찾는 감독으로 보인다.

이 제작 방식을 적은 돈이면 충분하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감독은 다른 영상 작업을 하며 영화 제작비를 마련한다고 말했다. 필요한 돈과 시간을 구하는 수고가 실제로 있었다. 다만 확보한 조건 안에서 멈추지 않고 재료를 섞고 찍어보는 과정은 완성된 화면의 개성과 이어진다. 화면에 보이는 생물은 아이디어만으로 생기지 않았다.

실패를 수습하다 생긴 속도

박세영의 단편 〈캐쉬백〉은 큰 가방을 들고 중고거래를 하러 다니는 청년을 따라간다. 거래할 물건이 사람을 다음 장소로 데려간다는 점에서는 매트리스의 이동과 나란히 떠올릴 만하다. 사물의 주인이 바뀔 때 영화도 다른 사람과 공간을 만난다.

이 영화의 빠른 편집은 처음부터 완성된 스타일로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감독은 길게 나온 촬영분을 졸업작품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더 촘촘하게 편집하는 법을 익혔다고 회고했다. 이후에도 앞선 작업의 아쉬움을 다음 작업에서 고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관객에게 개성으로 보이는 것이 감독에게는 해결해야 했던 문제의 결과일 수 있다.

〈다섯 번째 흉추〉의 짧고 빠른 여정을 다시 보면 이 태도가 반갑게 느껴진다. 모든 것을 설명한 다음 움직이기보다, 우선 다음 장소에 도착해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매트리스 한 장이 넘어가는 동안 영화의 표정도 달라진다. 박세영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괴물의 기발함뿐 아니라, 그 괴물을 계속 데리고 가려는 움직임이다. 방에서 보기 싫었던 생물이 어느새 영화 한 편을 이끌고 있다.

감상 포인트

◆ 누구를 기준으로 세는 시간인가 — 장을 나누는 날짜 표시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 보자. 사람의 일정보다 생물의 출생과 성장에 관심을 두게 된다. 낯선 주인공의 시간을 따라가도록 만드는 연출의 출발점이다.

◆ 매트리스가 옮겨가는 순간 — 장소가 달라질 때 새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생물은 그 안에서 어떻게 머무는지 함께 살펴보자. 사람의 사연이 바뀌어도 영화가 계속 따라가는 대상은 남는다. 물건 하나로 여러 삶을 잇는 구성이다.

◆ 표면과 소리를 함께 느끼기 — 생물의 질감을 가까이 보여줄 때 들리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맞히기보다 어떤 감촉과 감정이 생기는지 느껴보면 좋다. 얼굴 없는 존재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두 요소다.

◆ 설명보다 먼저 움직이는 영화 — 인물의 모든 사정을 알기 전에 다음 장소로 넘어가는 속도를 따라가보자. 남겨진 궁금증을 모두 정답으로 풀 필요는 없다. 영화가 어떤 사람을 지나쳐 어떤 존재를 끝까지 따라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관련 작품

◆ 〈다섯 번째 흉추〉 (2022, 박세영) — 버려진 매트리스와 그 안에서 자라는 생물의 여정이다. 징그러운 것을 오래 바라볼 때 처음의 감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질감과 소리를 함께 따라가며 볼 만하다.

◆ 〈캐쉬백〉 (2019, 박세영) — 중고거래를 하러 밤의 도시를 오가는 청년이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이른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움직이는 리듬을 통해, 첫 장편으로 이어지는 박세영의 편집과 이동에 대한 관심을 만날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