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을 잊겠다고 날짜를 정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경삼림〉의 경찰 223(금성무)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되,…
헤어진 연인을 잊겠다고 날짜를 정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경삼림〉의 경찰 223(금성무)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되,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것만 고른다.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사랑도 끝내겠다는 계산이다. 이미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데 이렇게 번거로운 규칙까지 만들다니. 진지한 얼굴 때문에 더 우습고, 우스워서 오히려 마음이 쓰인다.
〈중경삼림〉에는 실연한 경찰이 한 명 더 있다. 경찰 663(양조위)은 집 안의 물건들을 상대로 말을 건넨다. 떠난 사람에게 다 하지 못한 말이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왕가위 감독은 두 남자의 슬픔을 비장한 고백만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통조림을 고르고 혼잣말을 하는 유난스러운 일상을 따라간다. 실연한 사람에게는 사소한 물건도 그냥 물건으로 남기 어려운 모양이다.
223이 정한 날짜는 기다림을 끝내는 날인 동시에 그때까지 기다려도 된다는 허락이다. 오늘 포기하기 어렵다면 내일도 통조림을 사면 된다. 그의 규칙이 우스운 것은 식품의 기한과 사람의 마음을 한데 묶어서지만, 그 억지가 필요한 까닭은 짐작할 수 있다. 당장 끝났다고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날짜와 개수는 정확하게 셀 수 있다. 헤어진 사람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는 셀 수 없다. 223은 자기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하려 한다. 통조림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기다린 날도 눈에 보인다. 지나간 연애가 진짜였다는 증거라도 모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남자의 이야기는 금발 가발을 쓴 여자(임청하)의 다급한 사정과 엇갈린다. 그가 실연에 몰두하는 동안 상대에게는 범죄에 얽힌 급한 일이 있다. 같은 도시를 오간다고 같은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 때도 우리는 우선 자기 사정을 내세우기 쉽다. 223의 마음이 귀엽게 보이다가도, 그가 만나는 사람에게도 별도의 하루가 있다는 사실에 눈이 간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사정이 나란히 놓이면서, 통조림을 사는 남자의 비극도 조금 다른 크기로 보인다. 그에게는 하루를 가득 채우는 일이지만 도시 전체가 함께 멈춰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남들의 더 급한 사정을 보여주며 실연을 혼내지도 않는다. 한 사람에게는 오늘 전화가 오느냐가 여전히 중요하다. 영화는 그 과장된 심정에 웃음을 섞을 줄 안다.
663은 돌아온 방에서 물건들에게 말을 건넨다. 대답할 사람이 없는 자리에 익숙한 사물들이 남아 있다. 상대가 옆에 있을 때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들이 헤어진 뒤에는 자꾸 눈에 들어온다. 방은 예전과 비슷한데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달라졌다.
양조위가 이 엉뚱한 대화를 이어갈 때, 인물이 일부러 관객을 웃기려 한다는 느낌은 크지 않다. 본인은 그만큼 진심이다. 그래서 방 안의 물건을 걱정하는 모습이 우습다가도, 정작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말의 상대만 바꾸었을 뿐 떠난 연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히 방 안에 가득하다.
그런데 관객은 663보다 그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많이 안다. 간이 음식점에서 일하는 페이(왕페이)가 그를 좋아하고, 그가 없는 사이 몰래 집에 들어와 청소하고 물건을 손본다. 주인은 자기 슬픔에 빠져 있고, 다른 사람은 그의 생활 안에 들어와 있다. 방이 달라지는 까닭을 당사자보다 먼저 아는 데서 두 번째 이야기의 장난스러운 재미가 생긴다.
페이의 행동은 대담하다 못해 당황스럽다. 집주인에게 허락받고 들어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거리낌을 남겨둔 채 보더라도,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관심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는 또렷하다. 한 사람은 이미 떠난 연인의 흔적을 붙잡고, 다른 사람은 지금 자신이 바꾸고 있는 방을 그가 알아봐주길 바란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곧장 상대에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페이가 있는 음식점에는 ‘California Dreamin’이 거듭 흐른다. 이 곡을 좋아하던 사람에게는 익숙한 노래일 것이고, 처음 듣는 사람도 영화를 보는 동안 금세 익숙해진다. 같은 노래가 다시 나오면 이제는 어느 공간과 누구의 움직임을 만날지 기대하게 된다. 음악이 인물을 알아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왕가위는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이 곡을 쓰려 했다고 말했다. 완성된 장면에 어울리는 노래를 나중에 찾아 붙인 것과는 출발이 다르다. 페이가 음악을 크게 듣고 몸을 움직이는 모습,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기척이 곡과 함께 기억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들뜸을 차분하게 설명하는 대신 그 리듬 속에 잠시 머무는 셈이다.
이 영화에서 혼자 있는 것과 조용한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다. 남자들은 말을 늘어놓고, 페이는 음악을 크게 튼다. 상대와 속 시원히 대화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각자의 세계에는 말과 소리가 많다. 누가 어떤 노래를 되풀이해 듣는지 알아보는 일은 그 사람이 보내는 하루에 조금 가까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가게의 노래와 집 안에서 페이가 움직일 때의 노래를 구별해 들어보는 재미도 있다. 왕페이가 부른 ‘Dreams’의 번안곡은 자신의 목소리로 그 시간을 채운다. 같은 배우의 얼굴과 노래를 함께 접하면서, 인물의 활기는 대사만으로 설명할 때보다 더 강하게 남는다. 이후 다른 곳에서 이 곡들을 듣더라도 음식점과 방의 모습이 먼저 떠오를 수 있다.
이 영화의 두 이야기는 같은 음식점을 거쳐 이어진다. 한 남자의 마음을 따라가다가 다른 사람의 연애로 넘어가면, 방금까지 중요하던 일이 잠시 뒤로 물러난다. 처음 이야기의 인물이 사라져서 잊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도 저마다 급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인다. 가게에 들렀다 나가는 손님에게도 다른 곳에서 이어지는 하루가 있다.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홍콩의 붐비는 한복판에서 찍으며 원하는 것을 모두 얻기보다 그 자리에서 가능한 것을 담아야 할 때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그가 살던 집도 663의 방이 됐다. 복잡한 거리와 사람이 살던 방을 오가는 영화의 가까운 느낌에는 그런 촬영 장소의 사정이 있다. 도시를 멀리서 소개하기보다 누군가의 식사와 귀가를 따라다니는 기분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남는 것은 연애에 성공하는 요령보다 이 사람들의 조금 우스운 버릇이다. 기다릴 날짜를 정하고, 물건에게 말을 걸고, 좋아하는 노래를 다시 튼다. 남에게는 설명하기 민망해도 그렇게 하루를 넘긴 적이 있을 것이다. 〈중경삼림〉은 그 모습을 멋없다고 밀어내지 않는다. 통조림 앞에서 진지해진 얼굴까지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누군가를 잊으려고 만든 규칙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에도 밥은 먹어야 하고 가게에는 새 손님이 온다. 처음에는 전화를 기다리며 들렀던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가벼운 발걸음은 그런 작은 가능성을 남긴다. 내 사정으로 꽉 차 있던 하루에, 아직 모르는 누군가가 드나들고 있다는 가능성이다.
◆ 통조림에 적힌 날짜 — 223이 굳이 같은 유통기한의 파인애플을 고르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날짜를 정하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날까지 계속 기다릴 이유도 생긴다. 우스운 행동 하나가 헤어진 사람의 미련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663이 말을 거는 물건들 — 그가 집 안에서 누구 대신 무엇에게 이야기하는지 보자. 물건을 달래는 말에는 자신의 사정도 섞인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머쓱했을 혼잣말을 가까이 듣다 보면, 웃음과 외로움이 함께 전해진다.
◆ 방의 변화를 먼저 아는 관객 — 페이가 집을 손보는 장면 뒤에 663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자. 방이 달라진 이유를 아는 관객과 자기 생각에 빠진 인물 사이에 간격이 생긴다.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과 그 관심이 전해지는 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 다시 나오는 노래의 반가움 — ‘California Dreamin’과 페이가 부르는 번안곡이 흐르는 공간을 구별해보자. 반복해서 들은 음악에 가게와 방의 기억이 붙는다. 노래가 감정을 설명하는 배경을 넘어, 인물이 사는 세계를 익숙하게 만든다.
◆ 〈타이페이 스토리〉 (1985, 에드워드 양) — 변하는 도시에서 오래된 연인이 서로 다른 미래를 바라본다. 음식점과 방을 바삐 오가는 홍콩의 연애와, 새 아파트를 함께 둘러보면서도 마음이 어긋나는 타이베이의 연애를 비교해볼 만하다. 같은 도시에 사는 두 사람에게도 일상의 속도는 다를 수 있다.
◆ 〈비긴 어게인〉 (2013, 존 카니) — 이별을 겪은 싱어송라이터가 새로운 사람들과 뉴욕 곳곳에서 음악을 만든다. 한 장소와 노래가 특정한 사람의 기억으로 남는 영화다. 기존 노래를 거듭 듣는 페이에게서 새 곡을 함께 녹음하는 이들에게로 관심을 옮겨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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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