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의 이별을 서두르지 않는 영화 | MovieLAB LAB

새 구두를 사고 아빠와 맛있는 것을 먹는 날, 아홉 살 아이가 이별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여행자〉의 진희(김새론)에게 아빠(설경구)와의 외출은 그저 신나는 일이다. 그런데 아빠…

아홉 살의 이별을 서두르지 않는 영화 | MovieLAB LAB

새 구두를 사고 아빠와 맛있는 것을 먹는 날, 아홉 살 아이가 이별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여행자〉의 진희(김새론)에게 아빠(설경구)와의 외출은 그저 신나는 일이다. 그런데 아빠가 데려간 곳은 보육원이다. 아이는 그곳에 남고 아빠만 떠난다. 진희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보육원에서는 새 부모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새 출발인 일이 진희에게는 아빠를 포기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 차이를 알고 보면 아이가 말을 안 하고 밥을 거부하는 모습도 달리 보인다. 낯선 곳에 적응하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니 르콩트 감독은 진희를 새 가족에게 보내기 전에, 아이가 떠나온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부터 보여준다.

아이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

진희는 아빠가 없는 곳에서 살기 위해 보육원에 온 것이 아니다. 아빠를 따라왔을 뿐이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을 영화 앞부분에 충분히 둔 이유를 여기서 알 것 같다.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버림받았다는 사연보다 먼저, 아빠와 함께여서 즐거운 아이의 얼굴이다. 이후 진희가 기다리는 사람은 단순히 자신을 데려다줄 보호자가 아니다. 방금 전까지 같이 웃고 먹었던 아빠다.

어른의 눈에는 진희가 놓인 상황이 빨리 이해된다. 보육원에 맡겼다는 것은, 아빠가 당분간 아이를 직접 돌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정을 알아차리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 것은 다르다. 영화 처음의 외출에서 아이에게 아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믿음이 하루 만에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김새론은 진희가 겪는 일을 긴 말로 풀어주지 않는다. 입을 다문 얼굴과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에 관객이 머무르게 한다. 진희가 왜 힘든지는 이미 알지만,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하는지까지 다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밥을 거부하며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를, 고집을 부린다는 말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상자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아이

친구가 생겨도 이별은 끝나지 않는다

보육원에서 진희는 숙희(박도연)와 가까워진다. 숙희는 진희보다 먼저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이고, 입양을 가고 싶어 한다. 진희에게 당장은 가장 낯선 소망이다. 누군가에게는 부모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곳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 부모를 기다리는 곳인 셈이다. 한곳에서 먹고 자는 아이들이라도 머릿속에 그리는 다음 날은 같지 않다.

숙희와 어울리며 진희의 생활에도 아빠를 기다리는 일 외의 시간이 생긴다. 친구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이곳에 있어도 좋을 이유가 하나 생기는 일이다. 그런데 보육원에서의 우정에는 난처한 조건이 있다. 친구가 새 가족을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 친구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면서도 계속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이별이 아이들에게 거듭 찾아온다.

입양을 떠나는 아이에게 다른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주는 풍경에는 그래서 여러 마음이 겹친다. 보내는 아이와 남는 아이가 같은 노래를 듣지만, 그날 이후의 생활은 달라진다. 누군가의 입양을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남는 친구의 서운함까지 잘못된 마음이 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새 가족을 얻는 기쁨 곁에, 그때마다 흩어지는 아이들의 관계를 놓아둔다.

방 안에 둘러앉아 있는 아이들

어른이 된 뒤의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우니 르콩트는 어린 시절 한국의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프랑스로 입양됐다. 다만 이 영화로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당시 아이가 느꼈을 감정을 지금 눈앞의 일처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여행자〉를 감독의 이력과 대조하며 보는 것보다, 진희가 다음 순간을 어떻게 견디는지 따라가는 편이 중요한 이유다.

훗날 잘 지내게 된 어른의 회고라면 어린 시절의 괴로움에 결론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희에게는 그런 미래의 설명이 없다. 이곳을 떠나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새집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관객도 아이의 얼굴을 보며 그 불확실한 시간을 지나간다. 슬픈 사연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장면만 남겼다면 보이지 않았을 망설임이, 이렇게 곁에 머무는 동안 드러난다.

처음의 새 구두는 그래서 오래 마음에 걸린다. 아빠가 사준 신발을 신고, 아이는 아빠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좋은 기억과 버림받은 기억을 깨끗이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여행자〉는 이 아이에게 얼른 잊고 씩씩해지라고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 앞으로 만날 누군가는 진희가 아빠를 기다렸다는 사실까지 함께 받아주었으면 한다. 새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 먼저 사랑했던 사람을 지워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관련 작품

◆ 〈파편들의 집〉 (2022, 시몬 레렝 빌몽) — 우크라이나의 아동 쉼터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안전하게 보호받는 장소에 도착한 뒤에도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이어진다.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일과 아이의 관계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함께 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 〈남매의 여름밤〉 (2019, 윤단비) —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 머물게 된 남매의 여름을 그린다. 어른들이 집과 가족의 앞날을 결정하는 동안, 아이들에게는 그 공간에서 쌓아가는 자기만의 기억이 있다. 바뀐 생활에 적응하는 아이를 멀리서 판단하지 않고 곁에서 바라보는 영화로 이어볼 만하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