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남는다 | MovieLAB LAB

〈물의 연대기〉의 리디아(이모젠 푸츠)는 수영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간다. 물속에서 키운 실력이 폭력적인 아버지와 살던 집을 떠날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멀어진 뒤에…

집을 떠나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남는다 | MovieLAB LAB

〈물의 연대기〉의 리디아(이모젠 푸츠)는 수영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간다. 물속에서 키운 실력이 폭력적인 아버지와 살던 집을 떠날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멀어진 뒤에도 리디아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한다. 술과 약물에 의지하며 오래 방황한다. 집을 나왔다고 그곳에서 겪은 일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작가 리디아 유크나비치가 자신의 삶을 쓴 동명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다. 수영선수였던 그가 글을 쓰기까지의 이야기다. 연출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어른이 된 리디아의 일상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끼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 일을 떠올릴 때면 그때의 두려움도 되살아난다. 영화는 리디아가 그 기억을 피하거나 견디다가, 마침내 자기 말로 써내는 과정을 따라간다.

숨을 참아야 편해지는 곳

리디아가 수영할 때는 자신의 힘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팔을 뻗고 물을 가르며, 다음 숨을 쉴 때를 정한다. 집에서 다른 사람의 기분과 폭력에 휘둘리던 소녀에게 이런 통제감은 작지 않다. 물속에서 숨을 참는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촬영진은 수영 장면에서 리디아가 물과 맺는 친숙한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수중에서는 움직임을 차분하게 따라가고, 수면 위로 올라온 뒤에는 그 안정감이 흔들리도록 했다. 같은 몸인데도 머무는 곳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관객이 리디아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데에는 가족사를 모두 듣는 일만큼, 그가 어디에서 잠시 긴장을 푸는지 보는 일이 필요하다.

수영이 탈출구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후의 방황도 간단히 평가하기 어렵다. 집을 떠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그 집에서 배운 두려움까지 두고 올 수는 없다. 대학에 진학하고 새 사람을 만나도 몸에 밴 반응은 따라온다. 영화는 리디아가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결과보다, 기회를 잡은 뒤에도 계속 감당해야 했던 것을 보게 한다.

해 질 무렵 물가에 선 인물

아버지의 입이 멈춰도 목소리는 남는다

영화 속 아버지는 때로 입을 움직이지 않는데도 목소리가 들린다. 말없이 앞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 위로 그의 목소리가 겹친다. 리디아에게 아버지는 지금 눈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사람인 동시에, 자리를 떠나도 머릿속에서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처럼 〈물의 연대기〉는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기억이 현재의 감각에 끼어드는 방식을 소리와 편집으로 겪게 한다. 무슨 일이 먼저 일어났는지 잠깐 놓치더라도, 어떤 감정이 다음 장면까지 따라오는지는 느낄 수 있다. 날짜를 순서대로 맞추는 것보다 그 연결을 따라가면 영화의 거친 호흡에 가까워진다.

화면 역시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다. 16mm 필름으로 찍은 얼굴과 피부에는 입자와 빛의 변화가 남는다. 스튜어트는 기억을 지나치게 선명한 정보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 화면 덕분에 리디아의 삶은 이미 결론이 난 과거처럼 굳어지지 않는다. 방금 떠올랐다가 금세 흐려지는 기억처럼, 보는 동안에도 모양이 달라진다.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여성

불행을 잘 설명하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회고록을 영화로 옮기면서 스튜어트가 붙든 것은 불행한 사건의 목록보다, 그 사건을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목소리였다. 무엇을 얼마나 겪었는지 전달하는 일과, 겪은 사람이 그 기억을 어떻게 다룰지 정하는 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영화의 불규칙한 구성은 후자의 선택을 존중한다.

글쓰기 수업에 소설가 켄 키지(제임스 벨루시)가 나타나면 카메라는 줌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리디아가 그를 더 가까이 보고 싶어 하는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볼 때의 긴장과는 다른 관심이 생긴다.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줄 어른이 있다는 기대, 그에게 잘 쓰고 있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이 만남에 있다. 글을 쓰는 일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은 일이 되기도 한다.

이모젠 푸츠의 연기는 그 변화를 얌전한 성장의 표정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웃음이나 오래 이어지는 침묵을 촬영진이 따라가도록, 배우의 반응을 열어두고 찍었다. 그래서 리디아를 바라보는 일에는 긴장이 있다. 다음 순간 어떤 감정이 나올지 먼저 짐작하기 어렵다. 고통을 겪은 사람에게 기대하기 쉬운 의젓함이나 일관된 슬픔으로 이 인물을 다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수영 장학금은 리디아에게 집을 떠날 길을 열어주었다. 글쓰기는 떠나온 집과 그 뒤의 삶을 자기 말로 돌아볼 길을 열어준다. 리디아는 자기 경험을 어떤 말과 순서로 들려줄지 선택한다. 어떤 기억은 크게 말하고 어떤 기억은 조각으로 남겨둘 수 있다. 영화의 거칠고 불규칙한 호흡까지 그의 말투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잘 정돈된 사연을 들었을 때보다 한 사람과 더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남는다.

감상 포인트

◆ 수중과 수면 위의 몸 — 리디아가 물속에 있을 때와 물 밖에 있을 때 움직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자. 수영은 재능을 증명하는 경기이면서, 잠시 자기 몸을 스스로 다룰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회 결과보다 그 안정감에 주목하면 이 인물에게 물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기 쉽다.

◆ 화면과 따로 움직이는 목소리 — 아버지의 얼굴과 말소리가 어긋나는 대목을 들어보자. 지금 벌어지는 대화인지, 리디아에게 남은 기억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소리가 장면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 순간의 기분까지 바꾼다는 점을 살필 수 있다.

◆ 필름에 남은 입자와 빛 — 얼굴과 피부를 담은 화면에서 또렷한 부분과 흐릿한 부분을 함께 살펴보자. 16mm 필름의 입자와 빛의 변화는 모든 순간을 같은 선명도로 보여주지 않는다. 무엇이 뚜렷이 남고 무엇이 흐려지는지 느끼며 보면, 과거를 떠올릴 때의 불완전한 감각에 가까워질 수 있다.

◆ 예상에서 벗어나는 리디아의 반응 — 갑작스럽게 터지는 웃음과 길게 머무는 침묵에 주목해보자. 배우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모든 반응을 미리 정해둔 자리에서 받아내지 않는다. 그 작은 불확실성이 리디아를 다음 행동까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겨둔다.

관련 작품

◆ 〈시〉 (2010, 이창동) — 시를 배우기 시작한 미자(윤정희)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려다가 외면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한다. 글을 쓰는 일이 삶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과 얼마나 먼지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자기 경험에서 출발한 리디아와, 타인의 고통을 향해 눈을 돌리는 미자의 차이도 선명하다.

◆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4, 로즈 글래스) — 스튜어트가 배우로 참여한 이 영화에서도 가족의 폭력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몸에 얽혀 있다. 보디빌더의 근육과 수영선수의 몸을 함께 떠올리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몸을 쓰는 기쁨과 그 몸을 위협하는 힘을 다른 장르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