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를 공격하는 영화를 보러 왔는데, 감독 자신이 그와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한 옛 영상이 나온다. 1998년 로잰 바의 토크쇼에서 마이클 무어는 트럼프를 몰아붙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를 공격하는 영화를 보러 왔는데, 감독 자신이 그와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한 옛 영상이 나온다. 1998년 로잰 바의 토크쇼에서 마이클 무어는 트럼프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나중에 무어는 당시 그에게 너무 날카롭게 대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돌아본다.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는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질문에서 질문자 자신을 빼주지 않는 것이다.
201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2016년 미국 대선의 결과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언행을 모아놓는 데 머물지 않고, 미시간주 플린트의 물과 웨스트버지니아의 학교, 플로리다 파크랜드의 학생들에게 많은 시간을 쓴다. 한 정치인의 등장을 이해하려고 따라갔던 관객은 점점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누가 들었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해진다.
무어의 영화에서 감독이 화면에 나타나는 일 자체는 낯설지 않다. 그는 질문을 하러 찾아가고, 대답을 기다리고, 자신의 반응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토크쇼의 자료 영상에서는 그 자리가 달라진다. 현재의 무어가 과거의 무어를 바라본다. 남에게 들이대던 카메라가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확인하는 도구가 된다.
무어는 당시 방송에서 트럼프가 떠나지 않도록 달래는 데 자신도 협조했다고 설명했다. 방송을 무사히 진행하고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던 작은 양보다. 영화는 그것을 나중의 큰 사건과 나란히 놓는다. 한 번의 토크쇼가 대선 결과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날카로운 비판자도 눈앞의 편의 때문에 자기 역할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고백으로 보면 이 장면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자료 화면의 의미는 촬영 당시의 목적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함께 출연했다는 기록이 수십 년 뒤에는 서로를 대하던 태도의 기록이 된다. 두 사람이 같은 화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 알고 있는 대립 관계와 간극이 생긴다. 과거의 자신을 편집에서 빼면 더 일관된 비판자로 보일 수 있었겠지만, 무어는 그 간극을 남긴다.
덕분에 관객이 편하게 설 자리도 조금 줄어든다. 누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아보았는지 겨루는 영화로만 볼 수 없어진다. 나쁜 징후를 몰랐던 순간뿐 아니라, 알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관계를 편하게 유지하려던 순간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무어가 자신을 넣는 방식은 이후 그가 자기 정치적 진영을 겨냥할 때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영화가 오래 머무는 플린트에서는 정치가 집 안의 수도꼭지까지 들어와 있다. 수돗물 오염을 둘러싼 이야기는 선거 구호보다 먼저 주민의 생활과 건강에 닿는다. 무어는 이곳을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부터 벌어지고 있던 문제의 현장으로 제시한다. 대통령 한 사람의 등장만으로 모든 설명을 끝낼 수 없게 하는 장소다.
이 대목에서 버락 오바마의 방문 영상이 나온다. 무어가 두 차례 표를 주었다고 밝힌 대통령이다. 오바마가 물을 마시는 모습은 영화 안에서 주민을 안심시키는 성공적인 몸짓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그 방문을 기다렸던 기대와 이후의 실망 쪽에 무게를 둔다. 믿었던 사람이 현장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신뢰가 회복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무어의 비판이다.
다만 이 장면은 실제 발언의 조건과 영화의 해석을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오바마가 마신 것은 필터를 거친 물이었다. 그는 현장 발언에서도 그 점을 밝혔고, 수도관 교체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따라서 위험한 물을 그대로 마셔도 된다고 선언한 사건으로 요약하면 원래의 맥락이 사라진다. 무어가 문제 삼는 것은 그런 설명과 시연이 주민에게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졌는가에 가깝다.
이 구별을 하고 보면 장면을 더 적극적으로 볼 수 있다. 화면에 기록된 행동, 그 행동에 붙는 내레이션, 주민의 반응이 각각 무엇을 전하는지 살펴보게 된다. 물을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은 짧지만, 주민이 겪은 시간은 그 몸짓보다 길다. 영화는 그 차이를 통해 공적인 안심의 말이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하는 순간을 보여주려 한다.
여기서 무어에게 동의하는 것과 그의 편집을 살피는 일은 함께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중립적인 연표를 제시하는 대신 장면의 순서와 길이로 자기 주장을 만든다.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감독의 분노가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어떤 대목이 그 분노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지 보는 일이다. 플린트 장면은 그 질문을 가장 가까운 생활의 문제로 가져온다.
웨스트버지니아 교사들의 파업에서는 질문의 방향이 바뀐다. 앞선 대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당했고 누구에게 외면받았는지 보았다면, 여기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어떻게 밀고 나가는지 보게 된다. 영화는 파업이 주 전역의 학교로 번져가는 과정을 다룬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함께 일을 멈추며 협상 상대가 되는 것이다.
특히 교사의 임금은 올리되 버스 운전사나 급식 노동자 등은 빠진 합의안에 만족하지 않는 대목이 중요하다. 더 많은 돈을 받게 되었느냐는 결과만으로 보면 놓치기 쉬운 선택이다. 같은 학교를 유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까지 함께 협상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자신의 몫이 해결되었을 때 다른 사람의 몫을 계속 요구하는 행동이 연대의 범위를 보여준다.
이때 학교는 교실과 교사만으로 이루어진 장소가 아니다. 아이들을 데려오고 음식을 마련하는 사람까지 포함해야 움직이는 곳이다. 영화는 임금의 차이를 통해 평소 잘 보이지 않던 노동의 연결을 드러낸다. 거대한 정치의 문제를 논하던 화면에서 학교의 하루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구체적인 기준으로 등장한다.
플린트에서 보았던 불신과 이 파업을 나란히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의 조건도 달라진다. 권력자의 방문이나 약속에 기대는 것과, 함께 멈추고 요구를 놓지 않는 동료를 믿는 것은 다르다. 무어는 절망스러운 사례 뒤에 낙관적인 사례를 단순히 붙이기보다, 행동할 수 있는 주체의 위치를 옮겨보려 한다.
파크랜드 총격 사건의 생존 학생들은 이 영화에서 피해를 증언하는 사람으로만 남지 않는다. 학생들은 총기 규제를 요구하며 정치인을 만나고, 집회와 행진을 준비한다. 무어는 그들의 활동 공간을 찾아간다. 이미 이름을 얻은 감독이 아직 어린 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알려주는 모양과는 다른 만남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일을 진행하고 있고 감독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이 전환은 영화의 관객에게도 다른 종류의 집중을 요구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들을 때의 동정과,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이 세운 계획을 들을 때의 관심은 같지 않다. 학생들을 안타까운 얼굴로만 기억하면 그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대답이 흐려진다. 영화가 그들의 조직과 활동에 시간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무어는 제작 중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발언과 논란을 계속 덧붙이면 영화가 끝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는 재미도 당시의 자극적인 장면을 다시 확인하는 데만 있지 않다. 트럼프를 보여주다가 왜 학교로 가는지, 대통령의 연설보다 어떤 사람의 말을 더 오래 듣는지 살펴볼 수 있다.
처음에는 무어의 옛 얼굴이 비판의 대상 안으로 들어왔다. 뒤로 갈수록 화면을 채우는 것은 이미 자기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감독이 모든 답을 들고 나타나는 대신, 자신의 양보를 돌아보고 다른 이들의 행동을 따라가는 구성이다. 트럼프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져 있는 동안에도 이 영화의 질문은 계속된다.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1. 과거 영상 속 감독 토크쇼 자료에서 현재의 무어와 과거의 무어 사이에 생기는 거리를 보자. 자기 모습을 넣는 선택이 비판의 범위를 넓힌다. 옛 방송이 새로운 맥락에서 어떤 증거로 쓰이는지도 흥미롭다.
2. 행동과 설명의 간격 플린트 방문에서 기록된 몸짓과 영화가 붙이는 의미를 나누어 보자. 필터를 거친 물이라는 실제 조건과 주민의 신뢰 문제는 구별된다. 화면의 사실을 확인하면서 편집의 주장에도 질문을 던질 수 있다.
3. 합의안에서 빠진 사람들 교사의 임금만으로 파업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자. 학교를 움직이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 판단에 포함된다. 연대가 좋은 구호를 넘어 어떤 구체적인 선택이 되는지 드러난다.
4. 학생들이 하고 있는 일 생존 학생들이 증언할 때와 활동을 준비할 때 감독이 어디에 있는지 보자. 학생들에게는 이미 자신의 계획과 요구가 있다. 피해를 기억하는 일과 이후의 행동을 듣는 일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볼 수 있다.
〈로저와 나〉(1989), 마이클 무어 공장 폐쇄 이후의 플린트를 따라가며 기업의 결정이 주민 생활에 남긴 결과를 묻는다. 같은 도시를 오랫동안 바라보아온 감독의 시선을 이어 볼 수 있다. 거대한 경제의 언어와 집을 잃는 사람들의 일상 사이의 거리가 중심에 있다.
〈시티즌포〉(2014), 로라 포이트러스 홍콩의 호텔 방에서 국가 감시 자료를 공개하려는 사람들의 만남을 기록한다. 폭로가 완성된 뒤의 결론보다 공개를 앞둔 결정과 불안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적극적인 내레이션으로 연결하는 무어의 방식과, 한 공간의 대화에 머무는 방식을 비교할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