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두 소녀가 걸었을 길을 찾아서 | MovieLAB LAB

한지원 감독은 애니메이션 〈그 여름〉을 준비하며 원작자 최은영에게 두 소녀가 살았을 곳을 물었다. 그리고 시골 마을과 서울 종로를 직접 찾아갔다. 화면에 나올 길은 그리면 만들 …

소설 속 두 소녀가 걸었을 길을 찾아서 | MovieLAB LAB

한지원 감독은 애니메이션 〈그 여름〉을 준비하며 원작자 최은영에게 두 소녀가 살았을 곳을 물었다. 그리고 시골 마을과 서울 종로를 직접 찾아갔다. 화면에 나올 길은 그리면 만들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소녀들이 정말 걸었을 법한 길부터 보고 싶었다. 2000년대 초반 자신의 기억과 주변 사람들의 추억도 모았다. 그림 속 인물이 그 시절 어딘가에 실제로 살았다고 느끼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은 열여덟 살에 사랑을 시작하는 이경(목소리 윤아영)과 수이(목소리 송하림)다. 졸업 뒤에는 함께 서울로 향하지만 같은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이경이 대학에 가고 수이는 사회에 나서면서 둘 사이에도 변화가 생긴다. 한지원은 첫사랑의 빛나는 순간뿐 아니라 그 뒤에 생기는 복잡한 마음에 끌렸다. 예쁜 여름을 그리는 솜씨보다, 좋아했던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을 어디까지 그림에 담을 수 있을지가 그의 과제였다.

그림을 그리러 실제 동네에 간다

최은영이 소녀들의 고향으로 생각했던 곳은 장호원이었다. 한지원은 그곳에서 학교와 다리처럼 인물들이 다녔을 법한 장소들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한쪽에서는 이경이 걷고 다른 쪽에서는 수이가 공을 차는 모습을 떠올렸다. 빈 배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 사람을 놓아보는 답사였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몇 개의 단서만으로 장소를 상상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둘이 어디에 서고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정해야 한다. 애니메이션은 그 선택을 그림으로 만든다. 어느 길에서 만나고 어떤 곳에 앉는지 구체적으로 정해질수록, 두 사람에게 함께 보낸 시간이 있다는 느낌도 또렷해진다. 한지원의 답사는 글에 없는 지리를 억지로 채우기보다 인물이 머물 자리를 찾는 일에 가깝다.

이런 준비를 알고 나면 배경을 예쁜 그림으로만 보기는 아쉽다. 이경과 수이가 함께 있는 곳에는 둘이 가까워질 수 있는 조건이 있고, 각자의 생활이 시작된 곳에는 함께 보내지 못하는 시간도 생긴다. 같은 도시로 옮겨온다고 하루까지 같아지지는 않는다. 한지원은 인물들이 살았을 공간을 따져보며 사랑이 놓일 생활의 크기도 함께 정했다.

우유갑 하나로 덧붙인 마음

영화에는 이경이 수이가 준 딸기우유 갑에 꽃을 꽂아두는 모습이 있다. 원작에는 없던 장면이다. 최은영은 그 장면을 보고 이경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한다. 원작자가 쓴 사건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는데도 인물과 잘 맞았던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준 물건은 쓰임을 다한 뒤에도 버리기 어렵다. 우유를 마셨으면 버려도 되는 갑이 다른 것을 담는 자리가 된다. 이경의 행동을 보면 수이가 준 것을 곁에 더 두고 싶은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설명하는 문장을 길게 보태지 않고도, 사소한 물건을 어떻게 대하는지로 그 사람이 중요해졌음을 보여줄 수 있다.

각색은 원작에서 무엇을 덜어냈는지 묻는 일이 되기 쉽다. 이 작은 추가는 반대편을 보여준다. 인물을 충분히 생각하면 그가 할 법한 새 행동도 떠올릴 수 있다. 한지원이 소설의 세부를 묻고 생활의 흔적을 찾은 것은 책과 똑같은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원작에 쓰이지 않은 순간에도 두 사람이 같은 인물로 살아 있게 하는 데 그 이해가 필요했다.

음료를 든 짧은 머리 소녀 뒤에서 다른 소녀가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

혼자 그리던 구상을 여럿의 작업으로

〈그 여름〉에서 한지원은 레드독컬처하우스와 제작을 나누었다. 제작사 대표 배기용의 설명에 따르면, 한지원은 각색과 스토리보드, 화면 구성과 연출의 흐름을 설계했다. 스튜디오는 작화와 촬영 등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작업을 맡았다. 화면 전체를 이끈 감독과 개별 움직임을 완성한 제작진의 역할이 함께 있었다.

직접 설계하고 움직임까지 만들던 데 익숙했던 한지원에게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여러 사람이 작업할 수 있게 전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감독의 머릿속에만 선명한 장면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작업하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만들어야 했다.

이 차이는 감독의 개성을 한 사람이 모든 그림을 직접 그렸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게 한다. 어떤 장면에 머물고, 무엇을 먼저 보이며, 인물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이어갈지 결정하는 데에도 개성은 있다. 한지원이 설계한 흐름을 제작진이 화면의 움직임으로 완성한다. 한 장의 그림에서 좋았던 분위기가 움직이는 사람의 이야기 안에서도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 협업의 과제였다.

관객에게 돌아오는 것은 부서별 성과표가 아니라 하나의 관계다. 이경과 수이가 함께 있는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 한 장을 감상하는 일에서 조금 더 나아가게 된다. 방금 전까지 가까웠던 사람이 다음 순간에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그 변화를 끊기지 않게 만드는 일은 인물 디자인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지원이 화면의 순서와 연출의 흐름까지 맡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만하다.

넓은 강과 산 앞 난간에 두 소녀가 작게 서 있다

좋아했던 사람을 쉽게 평가하지 않는다

한지원은 원작에서 이경이 자신을 돌아보는 솔직함에 마음이 갔다고 했다. 처음에는 풋풋하게 시작한 사랑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마음을 마주하는 일이 편하지만은 않다. 감독은 인물의 감정을 곧장 평가하지 않는 소설의 태도에도 끌렸다. 사랑에 빠진 모습만 좋아해서는 끝까지 따라가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 선택은 관객이 두 사람 사이에 머무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누가 더 사랑했는지 가려내려 하면, 함께 있을 때 생겼던 기쁨과 어긋나는 생활을 한꺼번에 보기 어렵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과 상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함께 남을 수 있다. 한지원은 그 복잡함을 덜어내고 보기 좋은 청춘의 모습만 고르지 않았다.

처음 온라인 시리즈로 공개됐던 작품을 극장판으로 옮길 때도 새로운 사건을 대거 더하기보다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편집을 신경 썼다고 밝혔다. 관객이 한 번에 함께할 시간이 만들어진다. 처음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 가까이 놓일수록, 앞에서는 미처 몰랐던 차이를 나중에 돌아보게 될 수 있다. 사랑이 달라지는 일을 한순간의 잘잘못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다.

우유갑 속 꽃을 생각하면 이경을 끝내 하나의 평가로 묶기는 아쉽다. 수이가 준 것을 오래 두고 싶었던 마음도 그 사람의 일부였다. 한지원이 찾아간 길과 새로 그려 넣은 작은 행동은 바로 그런 시간을 남긴다. 인물의 마음이 달라져도 한때의 다정함까지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이 감독이 그린 여름에는 다시 바라볼 만한 구석이 그렇게 남아 있다.

감상 포인트

◆ 둘이 함께 있는 장소 — 인물만큼 주변의 길과 학교, 생활 공간도 보자. 어디에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는지 살피면 사랑의 기억에 장소가 갖는 몫이 느껴진다.

◆ 딸기우유 갑에 꽂힌 꽃 — 쓰임을 다한 물건이 어떻게 남는지 보자. 원작에 없던 행동 하나가 이경의 마음을 설명하는 방식이며, 각색이 덧붙일 수 있는 감정의 예다.

◆ 같은 도시의 다른 생활 — 서울에 온 두 사람의 하루를 비교해보자. 함께할 미래를 바라는 마음과 각자 실제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다른지 보이면 관계의 변화도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 처음의 마음을 기억하며 보기 — 뒤의 감정만으로 앞의 다정함을 지우지 말고 함께 떠올려보자. 한 사람이 여러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남겨두는 것이 감독이 원작에서 좋아했던 태도와 닿아 있다.

관련 작품

◆ 〈그 여름〉 (2023, 한지원) — 소설의 인물에게 길과 방, 사소한 물건을 마련해주는 각색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와 그들이 머무는 장소를 함께 살펴볼 만하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2014, 장건재) — 낯선 마을을 걷고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영화의 재료가 된다. 장소를 조사하는 일이 인물들이 함께 보낼 시간을 상상하는 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곁에 놓을 만하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