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에서 본 엉뚱한 그림이 영화가 되기까지 | MovieLAB LAB

장률 감독은 경주의 찻집에서 춘화를 보았다. 차를 마시러 들어간 공간에 뜻밖의 그림이 있었고, 그 기억은 오래 남았다. 훗날 만든 〈경주〉에서는 최현(박해일)이 예전에 보았던 춘…

찻집에서 본 엉뚱한 그림이 영화가 되기까지 | MovieLAB LAB

장률 감독은 경주의 찻집에서 춘화를 보았다. 차를 마시러 들어간 공간에 뜻밖의 그림이 있었고, 그 기억은 오래 남았다. 훗날 만든 〈경주〉에서는 최현(박해일)이 예전에 보았던 춘화를 다시 찾으러 온다. 처음 만난 찻집 주인에게 꺼내기에는 꽤 수상한 용건이다. 감독의 기억을 빌려온 남자는 자기가 무엇을 찾는지 설명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난처하게 만든다.

여행지에서 인상적인 것을 보면 사진을 찍어두곤 한다. 장률은 그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직접 찾아간 찻집과 그림의 기억에, 처음 만나는 남녀의 시간이 더해진다. 실제로 아는 장소가 영화에서는 낯선 관계를 만드는 곳이 된다. 장률이 도시 이름을 제목으로 삼을 때, 지도보다 먼저 궁금해지는 것은 그곳에서 누구와 시간을 보내게 될지다.

찾아간 이유와 머무는 이유가 달라진다

장률은 1995년 경주에 갔을 때 그 찻집을 우연히 찾았다고 회상했다. 지인의 장례를 겪은 경험도 영화에 들어갔다. 다만 실제 기억에서 출발했다는 말이 최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독의 행적으로 읽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장률 자신도 배우 신민아가 연기하는 여성과의 만남은 자기 경험이 아니라고 구별했다. 기억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거기서부터 허구가 이어진다.

최현은 오래전 본 그림을 찾아왔지만, 찻집에는 지금 그곳을 지키는 윤희(신민아)가 있다. 최현에게는 추억의 장소인 곳이 윤희에게는 손님을 맞는 일터다.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다른 사정으로 대하기 때문에 첫 만남부터 어긋난다. 감독이 기억만 복원했다면 찻집은 과거를 확인하는 장소로 끝났을 것이다. 현재의 주인을 만나면서, 최현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이곳을 다 알 수 없게 된다.

이 출발점이 반가운 것은 별난 사람이 등장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춘화가 어디 갔느냐고 묻는 행동에는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당장 한 종류로 정리할 수도 없다. 박해일은 중국의 대학에서 일하는 교수 역할을 맡았다. 직업 소개를 들어도 처음의 엉뚱한 질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률은 인물에게 사회적인 설명을 붙인 뒤에도 그 설명 밖의 모습을 남겨둔다.

사진을 찍는 교수에게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경주〉의 최현은 사진을 찍는다. 장률은 이 행동을 넣으며 시간과 기억에 관한 큰 이론부터 세운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교수에게서 예상하지 못할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현장에서 넣었고, 한 번 넣은 행동을 다른 장면과 연결해갔다고 한다. 영화에서 의미를 찾는 관객에게 꽤 유쾌한 제작 이야기다. 감독이 처음부터 모든 뜻을 정해놓고 관객의 정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는 최현을 볼 때도 카메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부터 풀 필요는 없다. 지금 무엇에 눈길이 갔는지, 사람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왜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이런 행동이 쌓이면 최현은 교수라는 소개보다 더 구체적인 사람이 된다. 장률에게도 현장에서 발견한 행동이 인물을 더 알아가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배우를 고를 때 역시 역할을 한눈에 설명해줄 외양만 찾지는 않았다. 신민아는 자신이 찻집 주인으로 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장률은 처음부터 전형적인 찻집 주인처럼 보이는 배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만나서 알게 된 배우의 차분한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직업과 배우 사이의 작은 낯섦을 지우기보다, 그 사람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볼 시간을 주는 선택이다.

신민아도 촬영 전에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윤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연기하는 동안에는 윤희가 최현을 친구들 모임에 데려가는 전개가 너무 빠르다고 느꼈지만, 완성본에서는 그 행동을 하는 인물의 모습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장면을 따로 준비하는 배우와 장면들을 이어 보는 관객의 경험은 다를 수 있다. 배우가 처음에 품었던 의문까지 알고 보면, 낯선 손님에게 얼마나 빨리 마음을 여는 사람인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초가 지붕 건물과 대나무 울타리 앞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다

잘 아는 도시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후쿠오카〉를 만들게 된 과정에도 오래 드나든 도시와 아는 사람들의 권유가 있었다. 장률은 영화제 때문에 후쿠오카를 거듭 찾았고, 그곳에서 영화를 찍어보라는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자주 갔으니 잘 안다고 느끼면서도 돌아보면 모르는 곳이기도 했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익숙해진 도시를 촬영지로 정했다고 해서 그곳을 다 설명할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서울의 헌책방 주인 제문(윤제문)이 손님 소담(박소담)과 후쿠오카로 떠나고, 그곳에서 오래 연락을 끊었던 해효(권해효)를 만난다. 제문과 해효에게는 함께 지나온 세월과 풀지 못한 감정이 있다. 소담은 그 과거를 똑같이 짊어지고 있지 않다. 익숙한 두 사람의 관계에 다른 세대의 사람이 들어오니 여행도 옛일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경주〉의 최현이 기억하던 찻집에서 현재의 주인을 만났듯, 이 여행에서도 아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만으로 관계가 정리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과 함께 가면 같은 장소에서도 다른 일이 생긴다. 두 영화의 줄거리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장률은 자신이 아는 장소를 바탕으로 삼되, 인물들이 그곳에서 맺을 관계까지 이미 아는 것처럼 닫아두지 않는다.

그 때문에 여행 영화를 보며 품는 기대도 조금 바뀐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해결될 문제를 기다리기보다, 다음 대화에서 누가 끼어들고 누가 엉뚱한 쪽으로 이야기를 가져갈지 궁금해진다. 장률이 만남을 준비한 방식은 도시를 배경으로 쓰면서도 그 안에서 사람과 부딪치는 시간을 남겨둔다. 아는 곳을 다시 찾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된 듯 어색한 순간도 생길 수 있다.

해질녘 거리를 달리는 자전거에서 남성 뒤에 여성이 타고 있다

세 사람이 만났다고 삼각관계는 아니다

장률은 〈후쿠오카〉의 제문과 소담, 해효를 처음부터 남녀 관계로 구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나이와 성별이 달라도 서로 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소담이 두 남자 사이에 등장했다고 해서 누구와 연인이 될지를 정하는 이야기로 좁힐 수는 없다. 그보다 먼저, 저 세 사람이 같은 시간을 보내면 어떤 대화가 가능해지는지 관심을 갖게 한다.

촬영 현장에서는 세 배우가 서로의 연기를 좋아하며 반응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감독은 함께 연기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배우의 연기도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한 배우의 장점을 정해진 모습으로 끌어내는 것과, 그 장점이 상대를 만나 달라지도록 두는 것은 다른 즐거움이다. 〈경주〉에서 낯선 손님의 질문을 찻집 주인이 받아야 했듯, 여기에서도 한 사람의 말만으로는 장면이 끝나지 않는다.

장률이 헌책방을 중요한 장소로 고른 데는 그 자신의 책방 경험도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책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만났고, 책방을 좋아하는 소담이라면 나이 든 인물들의 정서와도 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대 차이를 말로 해설하기 전에 같은 장소에 머물 이유를 준 셈이다. 서로 몇 살 차이인지보다 무엇을 좋아해서 이곳에 왔는지가 먼저 보인다.

찻집에 걸린 그림 한 장에서 영화를 시작한 감독은, 헌책방에 모인 사람들의 관계도 급히 이름 붙이지 않는다. 찻집 손님과 주인, 책방 주인과 단골이라는 소개는 만남의 시작일 뿐이다. 〈경주〉를 볼 때 최현의 첫 질문을 기억해두면 좋겠다. 다소 난처한 질문을 한 사람 곁에 얼마간 머문 뒤에도, 우리는 그를 처음과 똑같이 보고 있을까. 장률이 배우와 장소를 만나며 만들어간 시간은 관객에게도 그런 변화의 여지를 준다.

감상 포인트

◆ 춘화를 찾는 첫 질문 — 최현이 왜 왔는지를 아는 관객과 그를 처음 보는 윤희의 입장 차이를 보자. 같은 말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감독의 실제 기억이 허구의 만남에 들어가며 어떤 어색함을 만드는지 살필 수 있다.

◆ 교수라는 소개 밖의 행동 — 최현이 사진을 찍고 호기심을 드러낼 때 어떤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보자. 직업만으로 인물을 이해하려 하면 지나치기 쉬운 행동들이다. 장률이 현장에서 더한 엉뚱함이 인물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따라갈 만하다.

◆ 윤희가 손님을 대하는 속도 — 찻집에서의 만남과 친구들 모임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살펴보자. 두 사람 사이가 언제 편해지고 어느 대목이 여전히 어색한지 볼 수 있다. 배우가 전개의 속도를 고민했던 장면들이 한 인물의 리듬으로 이어지는지 느껴보자.

◆ 헌책방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 — 〈후쿠오카〉에서는 나이 차이보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는 이유를 먼저 보자.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어디까지 관계를 열어주는지, 오래된 감정은 그 자리에서도 어떻게 남아 있는지 살필 수 있다.

관련 작품

◆ 〈경주〉 (2014, 장률) — 오래전의 춘화를 찾아온 남자와 찻집 주인이 만난다. 감독의 경험에서 출발한 공간이 배우들의 만남으로 새로운 장소가 되는 영화다. 인물의 직업과 과거를 알게 된 뒤에도 남는 엉뚱함을 지켜볼 만하다.

◆ 〈후쿠오카〉 (2020, 장률) — 헌책방 주인과 젊은 손님이 일본에서 오랜 지인을 만난다. 다른 세대의 사람이 들어오며 오래된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따라갈 수 있다. 장률이 장소뿐 아니라 배우들 사이의 반응에도 열어둔 여유를 이어볼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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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