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아픔을 배우의 얼굴에 맡기는 일 | MovieLAB LAB

〈내 이름은〉의 주연 신우빈은 처음부터 아들 영옥 역을 맡은 배우가 아니었다. 오디션에서는 다른 학생인 민수를 연기했고, 그 배역으로 함께하자는 말도 들었다. 이후 정지영 감독에…

역사 속 아픔을 배우의 얼굴에 맡기는 일 | MovieLAB LAB

〈내 이름은〉의 주연 신우빈은 처음부터 아들 영옥 역을 맡은 배우가 아니었다. 오디션에서는 다른 학생인 민수를 연기했고, 그 배역으로 함께하자는 말도 들었다. 이후 정지영 감독에게서 영옥을 해보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감독은 배우의 얼굴에서 소극적인 영옥에게 어울리는 선한 눈빛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대본을 읽더라도 어느 인물의 얼굴로 읽느냐에 따라 영화로 들어가는 길이 달라진다.

제주 4·3의 기억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정지영은 배우를 고르고, 대사를 남기거나 덜고, 이미 쓰인 장면을 현장에서 바꾼다. 감독의 관심을 ‘역사의 아픔을 알리는 것’이라고 요약하면 이런 결정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실을 관객에게 전할 것인가만큼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겪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다. 〈남영동1985〉에서 관객이 머물 공간을 좁혔던 감독은 〈내 이름은〉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의 사정을 알아채는 방식을 고른다.

배우를 만나고 나서 달라지는 인물

〈내 이름은〉은 1998년의 제주를 배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싶은 아들 영옥(신우빈)과 잊고 살던 과거를 마주하는 어머니 정순(염혜란)을 함께 따라간다. 영옥의 학교생활은 어머니가 겪었던 역사와 처음부터 같은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들에게는 지금 자신이 누구와 어울리고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가 급하다. 배우를 영옥의 자리로 옮긴 선택은 관객이 이 소년을 어떤 마음으로 따라갈지와도 관련된다.

신우빈은 배역이 바뀐 뒤 대본을 다시 읽으며 어머니 정순의 존재가 더 아프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민수를 중심에 두고 읽었던 이야기가 영옥의 처지에서 달라진 것이다. 감독은 촬영 전 관련 책과 다큐멘터리를 권했다. 그 과정에서 신우빈이 품었다고 말한 의문은 자신이 그 시대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였다. 과거를 공부하는 일이 인물의 선택을 쉽게 재단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염혜란과는 〈소년들〉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정지영은 배우가 스스로 연구한 인물을 현장에서 빠르게 표현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다시 함께하자는 연락 뒤 그를 떠올리며 정순을 썼다. 먼저 완성된 배역에 배우를 맞추기만 한 작업은 아니었다. 이전 현장에서 본 역량이 다음 영화의 인물을 만드는 데 들어갔다.

정순을 어떻게 연기할지 묻는 염혜란에게 감독은 판단을 넓게 맡겼다. 배우가 붙잡은 면모 중 하나는 아픈 과거를 지녔어도 거기에만 주저앉아 있지 않는 성격이었다. 아들을 대할 때 시원스럽고 멋있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순을 역사적 비극의 증언자로만 생각하면 이런 일상성은 곁가지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자기 방식으로 아들을 대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느낄 때, 되돌아오는 과거도 이미 살아온 시간을 흔드는 일이 된다.

차의 거울에 붕대를 감은 젊은 남성의 얼굴이 비친다

관객을 어디에 머물게 할 것인가

〈남영동1985〉에서 정지영이 택한 방법은 한정된 공간에 관객을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박원상)가 고문당하는 시간을 다룬 영화에서 감독은 고문 경찰관의 집 이야기를 넣을지도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의 목적에서 벗어난다고 판단해 그 방향을 택하지 않았다. 여러 인물의 생활을 오가며 설명을 보태기보다, 폭력이 벌어지는 공간을 좀처럼 떠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감독은 각본을 쓰며 고문을 그렇게 묘사했을 때 관객이 아픔을 느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연출의 결정은 폭력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의지보다 더 구체적이다. 어디서 장면을 끝내고 다른 장소로 넘어갈지에 따라 관객이 그 시간을 견디는 방식도 달라진다. 장소를 옮기면 다른 정보를 얻는 대신 앞선 상황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정지영은 그 이동을 제한했다.

용서를 어떻게 다룰지도 고민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완결하면 앞의 이야기가 흐려질 수 있다고 봤다. 이 판단을 기억하면 영화를 사회적 주장의 전달 수단으로만 읽기 어려워진다. 같은 뜻을 말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어떤 장면을 붙이느냐가 앞서 겪은 감정의 무게를 바꾼다. 감독은 하고 싶은 말과 실제로 영화에 놓을 장면 사이를 조정한다.

〈내 이름은〉에서 정지영이 정보를 덜어낸 방식은 다르다. 어머니와 아들이 각자의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상대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하는 대화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영옥은 정순이 비운 술잔을 보고, 정순은 잠든 아들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본다. 관객이 이미 아는 일을 다시 말시키는 대신 두 사람이 남긴 흔적으로 서로의 고통을 짐작하게 했다.

이 두 선택에서 관객에게 시간과 정보를 건네는 정지영의 판단을 볼 수 있다. 한 영화에서는 그 장소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영화에서는 이미 알게 된 사정을 다시 설명하지 않는다. 더 많이 보여주거나 더 적게 말하는 양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지금 관객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인물의 어떤 감정 앞에 서 있는지를 판단한 결과다.

녹색 덧문과 그림 안내가 붙은 건물 앞에 여성이 서 있다

현장에서 생긴 말을 남겨두기

신우빈에 따르면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의 아픔을 알아채는 장면은 촬영 직전에 감독의 구상을 들으며 만들었다. 미리 작성된 대본을 정확히 수행하는 것과 현장에서 감정을 새로 만드는 일은 배우에게 다른 준비를 요구한다. 역사에 대한 조사와 인물에 대한 이해가 쌓여 있어야 갑자기 달라진 장면에서도 자기 인물의 반응을 찾을 수 있다.

감독이 배우에게 허용한 여유는 모자의 일상 대화에도 있었다. 신우빈은 현장에서 의견을 내고 애드리브를 했으며, 그중 여러 대사가 완성작에 남았다고 말했다. 정지영은 너무 과한 부분은 덜어냈다. 염혜란은 후배가 해보고 싶은 연기를 펼칠 수 있도록 받아줬다. 경험 많은 감독과 배우의 현장에 들어간 신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볼 수 있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과정은 배우를 신뢰한다는 말을 실제 작업으로 보여준다. 모든 표현을 자유롭게 남기는 것도, 처음 계획에만 맞추는 것도 아니다. 제안이 나오고 상대 배우가 받아주며, 감독이 장면에 필요한 정도를 고른다. 그 사이에서 정순과 영옥은 커다란 사건을 대신 설명하는 배역을 넘어, 서로 말을 건네고 반응하는 모자가 된다.

정지영은 한 사람의 영화가 곧바로 세상을 바꾼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같은 문제를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고 공감하며 토론할 때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쪽에 가깝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드는 단계에서 관객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은 결론만이 아니다. 한 얼굴을 눈여겨보고, 그 사람의 선택 앞에서 망설이며, 다 말하지 않은 아픔도 알아차리는 경험이다. 감독이 배우와 함께 만드는 것은 그런 경험에 들어갈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감상 포인트

◆ 영옥의 얼굴을 고른 이유. 다른 학생 역을 준비하던 배우를 감독이 영옥으로 바꿨다. 소년의 눈빛과 태도가 그를 따라가는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자.

◆ 정순의 일상적인 성격. 아픈 기억을 마주하는 순간뿐 아니라 아들을 대하는 평소의 시원스러운 면모도 눈여겨보자. 배우가 붙잡은 인물의 폭을 볼 수 있다.

◆ 설명을 대신하는 흔적. 술잔과 붕대를 보고 상대의 하루를 짐작하는 모자를 보며, 관객이 아는 정보와 인물이 아는 정보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 모자가 주고받는 말. 현장에서 만들어진 대화도 완성작에 남았다. 어느 대사가 즉흥이었는지 맞히기보다 두 배우가 서로의 말에 반응하는 호흡에 귀를 기울여보자.

함께 보면 좋은 영화

〈남영동1985〉(2012, 정지영) 폭력의 현장에 관객을 머물게 하려는 공간 선택이 뚜렷한 영화. 역사적 아픔을 다루며 관객에게 어떤 시간과 정보를 주는지 〈내 이름은〉과 비교할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박찬욱) 공적으로 설명되는 사건과 인물들이 함께 보낸 시간 사이에 차이가 있는 영화. 사건을 알게 되는 순서가 한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어떻게 바꾸는지 생각해볼 만하다.

이 글은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제작진 인터뷰와 공식 자료를 대조해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