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묵혔어도, 크로넨버그는 대사 한 단어 안 바꿨다 | MovieLAB LAB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미래의 범죄들〉(2022)은 〈맵 투 더 스타〉 이후 8년 만의 장편이다. 그는 인공 환경에 맞춰 몸이 바뀌고 새 장기가 자라는 미래를 그린 …

20여 년 묵혔어도, 크로넨버그는 대사 한 단어 안 바꿨다 | MovieLAB LAB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미래의 범죄들〉(2022)은 〈맵 투 더 스타〉 이후 8년 만의 장편이다. 그는 인공 환경에 맞춰 몸이 바뀌고 새 장기가 자라는 미래를 그린 각본을 1990년대 말에 썼지만, 투자를 받지 못해 20여 년 동안 묵혔다. 제작자 로버트 랜토스가 지금 세상에 더 들어맞는다며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하자, 이야기가 낡았으리라 여기던 크로넨버그도 읽고 나서 동의했다. 그는 인간이 만든 환경의 유해성이 전보다 널리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몸의 변화를 다룬 옛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제목이 바뀌고 촬영지와 세트에 맞춰 각본을 손본 곳도 생겼지만, 인물들의 대사는 처음 쓴 문장 그대로다. 그는 오래전에 쓴 대사를 억양이 저마다 다른 배우들에게 맡겼다.

옛 각본과 달라진 것은 촬영장과 편집실에서 생겼다

크로넨버그는 초고를 한 번만 썼고 대사는 한 단어도 바꾸지 않았다고 말했다. 캐럴 스파이어는 세트와 촬영 장소의 모습을 맡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패스트 컴퍼니〉(1979) 때부터 크로넨버그와 일했다. 스파이어는 각본이 처음 나왔을 때 받은 한 부를 보관해 두었다. 크로넨버그가 이 영화 일로 연락했을 때, 그 옛 사본은 새 각본과 표지의 제목만 달랐다.

다시 읽은 각본은 크로넨버그에게 다른 사람이 쓴 글처럼 읽혔다. 시간이 그만큼 지났으니 많이 고쳐야 할 줄 알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그는 돌아봤다. 완성된 영화에서 달라진 점으로는 아테네처럼 촬영하며 찾아낸 요소들을 꼽았다. 영화 만들기의 많은 부분이 현장에서 찾아내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편집도 각본의 다음 원고를 쓰는 일로 여긴다. 편집실에서는 72분짜리 영화를 만들려 들어서, 제작자들이 장면을 되살려 달라고 조를 정도라고 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서로 겹치는 장면 두어 개를 편집에서 뺐다.

1966년 영화 속 시인이 끝내 쓰지 않은 시에서 온 제목

이 영화의 제목은 크로넨버그가 1970년에 아주 적은 예산으로 만든 언더그라운드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옛 각본의 제목은 진통제라는 뜻의 〈페인킬러스〉였지만, 각본이 묵는 사이 이 제목이 여러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에 먼저 쓰였다. 그래서 랜토스의 제안으로 초기작의 제목을 이 영화에 붙였다. 초기작의 한국어 제목은 〈미래의 범죄〉지만, 영어 원제는 두 영화 모두 Crimes of the Future다. 그래도 이 영화는 초기작의 속편도 리메이크도 아니다.

이 제목의 구절은 원래 헨닝 칼센 감독의 1966년 영화 〈굶주림〉에서 나왔다.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소설을 옮긴 영화다. 〈굶주림〉에는 무명 시인(페르 오스카르손)이 다리 위에서 수첩에 '미래의 범죄들'이라고 적는 장면이, 수첩을 크게 비춘 화면으로 나온다. 크로넨버그는 그 시가 읽고 싶었지만, 영화 속 시인은 끝내 시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읽지 못한 시의 구절을 초기작의 제목으로 삼았다. 초기작이 그 시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을 다 채우지는 못했다고 그는 봤다. 〈미래의 범죄들〉이라는 제목은 이렇게 반세기도 더 전에 본 영화 속, 쓰이지 않은 시에서 왔다.

이마에 귀처럼 생긴 형태가 있는 남성의 얼굴

돈 보고 고른 아테네, 캐나다에 없던 오래된 풍경을 얻었다

크로넨버그가 아테네를 촬영지로 고른 데는, 그리스 정부가 새로 둔 제작비 40% 환급 제도가 컸다. 아테네로 정하기 전, 스파이어는 캐나다에서 촬영 장소를 찾았다. 그러나 캐나다에는 충분히 오래된 건물이 없는 데다, 원하는 모습을 모두 새로 지을 예산도 없었다. 세제 혜택이 있는 아테네를 제안한 사람은 랜토스였다. 영화는 캐나다와 그리스 두 나라의 제작사가 함께 만드는 공동제작이 됐다.

이 이야기는 원래 토론토에서 찍을 생각으로 쓴 것이었다. 아테네를 고른 까닭을 두고 크로넨버그는 돈이 먼저였고 창작의 이유는 그다음이었다고 숨김없이 말했다. 찍는 동안에는 이 도시의 문화와 낡아 가는 분위기를 영화에 담으려 했다. 이 영화는 캐나다에서 찾지 못한 오래된 풍경을, 환급을 보고 간 도시에서 얻은 것이다.

아테네에서 찍기로 한 뒤로는 이 도시를 북미 도시처럼 보이게 꾸미지 않았다. 지중해의 빛과 도시의 질감, 거리에 원래 있던 그라피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래 보관한 각본을 실현하면서도, 현장에서 만난 풍경까지 옛 구상에 맞추려 하지는 않았다. 대사를 그대로 두는 선택과 낯선 도시를 받아들이는 유연함이 한 작업 안에 있었던 셈이다.

리허설이 없으니 배우는 첫 한두 번에 보여 줘야 한다

크로넨버그는 리허설을 하지 않으며, 찍을 장면을 미리 그려 두는 스토리보드도 쓰지 않는다. 준비는 그림 대신 스파이어와 함께 등장인물을 연구하는 데서 시작한다. 크로넨버그 자신은 주인공이 공연 예술가인 이 영화를 앞두고 퍼포먼스 아트를 새로 공부했다.

카메라 자리는 촬영 당일 배우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정하기 때문에, 스파이어는 세트의 네 벽을 모두 짓는다. 크로넨버그는 배우에게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은 채 무엇을 준비해 왔는지부터 본다. 대사를 어떻게 말할지도 되도록 배우에게 맡긴다. 같은 장면을 찍는 횟수는 보통 한두 번이다.

공연 예술가 사울 텐서를 연기한 비고 모텐슨은 〈폭력의 역사〉부터 이 영화까지 크로넨버그와 네 편을 함께했다. 그는 이번에는 예산과 일정이 빠듯해 평소보다도 적게 찍었다고 전했다. 촬영 전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는 모텐슨이 필름 누아르라고 하자 크로넨버그가 그렇다고 한 정도였다. 모텐슨에 따르면 감독이 아무 말이 없으면 만족한다는 뜻이다. 공연 파트너 카프리스를 맡은 레아 세이두는 많아야 두 번 찍다 보니 적응할 만하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자신에게는 조금 답답했다고 말했다. 적은 지시를 익숙한 신뢰로 받아들이는 모텐슨과, 적응할 시간이 짧아 답답했던 세이두의 경험은 다르다. 배우에게 맡기는 연출에도 빠듯한 촬영 시간이라는 조건이 따른다.

어둠 속에서 여러 팔 모양 구조물이 누운 사람 주변을 에워싼다

옛 대사를 파리·LA·기니비사우 억양으로 듣게 한 캐스팅

주요 배역에는 출신 나라도 억양도 저마다 다른 배우들이 모였다. 카프리스 역의 세이두는 파리 출신이다. 새 장기를 등록하는 관료 팀린은 LA 출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코프 형사는 기니비사우 출신 벨켓 붕게가 맡았다. 그리스 배우들도 여러 역에 나온다. 세이두는 처음에 팀린 역을 제안받았다. 각본을 읽은 세이두가 카프리스 역을 청하자, 크로넨버그는 고민 끝에 그 청을 받아들였고 팀린은 스튜어트에게 돌아갔다. 팀린의 목소리를 어떻게 쓸지는 전적으로 스튜어트가 정했다.

크로넨버그는 특수효과가 있어도 대사가 아주 중요하고 말이 많은 영화라서, 억양 있는 배우들이 여러 역을 맡는 구조가 좋았다고 했다. 나이가 비슷한 두 배우가 LA의 미국인과 파리의 프랑스인으로 대비되는 것도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세이두의 프랑스 억양은 대사에 좋은 질감이 되리라 봤다. 그는 캐스팅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연출의 큰 부분으로 여긴다. 이 영화에서 배우를 고르는 일은, 20여 년 전에 쓴 영어 대사가 어떤 억양으로 들릴지를 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감상 포인트

◆ 억양이 저마다 다른 영어 대사 — 인물들이 영어로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을 들어 보자. 파리 출신 세이두와 LA 출신 스튜어트, 기니비사우 출신 벨켓 붕게, 그리스 배우들이 영어 대사를 나눠 말한다. 대사의 뜻과 별개로 인물마다 말의 리듬과 목소리가 얼마나 다른지 들어보자. 같은 각본도 누구의 목소리를 통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감독의 캐스팅 판단을 살필 수 있다.

◆ 아테네 거리의 빛과 그라피티 — 바깥 장면에서 햇빛과 건물 벽을 보자. 이 영화는 아테네를 북미 도시처럼 꾸미지 않은 채, 지중해의 빛과 거리에 원래 있던 그라피티를 그대로 담았다. 낯선 미래 도시를 보면서도 지금 어느 거리에 있을 법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촬영비 때문에 고른 장소를 화면의 개성으로 받아들인 선택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 살펴보자.

◆ 관객 앞에서 여는 수술 공연 — 공연 예술가와 공연 파트너가 관객 앞에서 수술을 공연으로 보여 주는 장면을 보자. 크로넨버그는 이 영화를 앞두고 퍼포먼스 아트를 새로 공부했다. 감독이 주인공에게 예술가라는 직업을 준 덕분에, 몸의 변화는 없애야 할 이상 증상만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사울이 자기 몸에서 생긴 것을 어떻게 작품으로 내놓는지 따라가 보자.

◆ 러브스토리로 보는 두 사람 — 공연 예술가와 공연 파트너가 함께 있는 장면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자. 크로넨버그는 이 영화를 공포영화로 여긴 적이 없으며, 사실은 러브스토리라고 말했다. 자기 몸을 맡기는 사울과 그 몸을 다루는 카프리스를 함께 보면, 수술을 바라보는 마음에도 친밀함과 불안이 겹친다. 감독의 말을 정답으로 삼기보다 두 배우의 관계가 그 말을 얼마나 납득하게 하는지 살펴볼 만하다.

관련 작품

◆ 〈미래의 범죄들〉 (2022,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 사람의 몸에 새 장기가 생겨나고, 그 장기를 떼어 내는 수술에 관객이 모여드는 미래를 그린다. 몸의 기괴함에 먼저 눈길이 가더라도, 말투가 서로 다른 인물들이 그 몸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어볼 만하다. 오래된 대사를 새 배우들에게 맡긴 감독의 선택을 실제 목소리로 확인하는 작품이다.

◆ 〈이스턴 프라미스〉 (2007,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 모텐슨이 두 번째로 출연한 크로넨버그 영화다. 스파이어에 따르면 모텐슨은 이 영화 때 소품으로 쓸 물건을 러시아에서 가방 가득 가져왔다. 두 작품을 이어서 보며 배우의 몸짓과 소품을 함께 살펴볼 만하다. 적은 지시 속에서도 배우가 미리 준비해 온 것들이 화면을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크로넨버그가 모텐슨에게 맡기는 몫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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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