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연출가도 첫 영화 앞에서는 신입이었다 | MovieLAB LAB

무대에서 배우들을 이끌던 연출가가 첫 영화 현장에 섰다. 자신이 잘하는 일도 있었지만, 모르는 일은 더 많았다. 〈지니어스〉를 연출한 마이클 그랜디지는 촬영감독과 편집자의 도움을…

베테랑 연출가도 첫 영화 앞에서는 신입이었다 | MovieLAB LAB

무대에서 배우들을 이끌던 연출가가 첫 영화 현장에 섰다. 자신이 잘하는 일도 있었지만, 모르는 일은 더 많았다. 〈지니어스〉를 연출한 마이클 그랜디지는 촬영감독과 편집자의 도움을 반겼다. 자기 밑에서 일할 사람보다 함께 영화를 만들 사람이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첫 영화의 주인공 역시 남의 작업을 돕는 사람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책 표지에 남지만, 원고를 함께 다듬은 편집자의 이름은 좀처럼 기억되지 않는다.

그랜디지가 이 이야기에 끌린 데는 직업적인 공감이 있었다. 배우가 좋은 연기를 하도록 돕는 자신의 일과, 작가가 더 좋은 문장을 쓰도록 돕는 편집자의 일이 닮아 보였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자 자리가 바뀌었다. 오랫동안 남의 재능을 살펴온 연출가가 이제는 자신의 첫 시도를 동료들에게 맡겨야 했다. 〈지니어스〉의 두 남자가 원고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실랑이를 보면, 감독도 현장에서 누렸을 도움과 겪었을 망설임이 궁금해진다.

익숙한 배우가 있어도 처음인 일은 남는다

영화의 편집자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는 작가 토머스 울프(주드 로)의 원고를 읽는다. 울프는 말을 쏟아내고, 퍼킨스는 그 말을 책에 담을 수 있도록 거듭 덜어내려 한다. 작가에게는 자기 문장을 지킬 이유가 있고 편집자에게는 독자에게 닿게 할 책임이 있다. 둘이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모든 의견을 같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랜디지가 영화에 합류했을 때 콜린 퍼스는 이미 참여하기로 한 상태였다. 주드 로와는 무대에서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었다. 첫 영화라고 해서 모든 관계를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익숙한 배우의 신뢰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모르는 것이 많은 현장에서도 배우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오래 해온 일의 감각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무대에서의 경력을 영화 연출의 보증서로 삼을 수는 없었다. 배우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일이 같아도 카메라가 어디에 서는지에 따라 관객이 보는 것은 달라진다. 어떤 연기를 남기고 다음 장면을 언제 붙일지는 편집실에서 다시 정해야 한다. 그랜디지는 촬영감독 벤 데이비스와 편집자 크리스 디킨스에게 기대는 일을 숨기지 않았다. 첫 영화에서 필요한 것은 모든 답을 아는 척하는 태도보다, 동료가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지니어스〉의 퍼킨스도 울프를 대신해 소설을 써줄 수는 없다. 다만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작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짚어줄 수 있다. 감독이 영화 현장에서 받은 도움과 인물이 원고 앞에서 하는 일을 포개어 보면, 이 작품이 창작자의 고독만큼 동료의 필요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점이 선명해진다.

흑백 대신, 빛바랜 색을 골랐다

그랜디지는 처음에 영화를 흑백으로 찍는 방안을 생각했다. 오래된 뉴욕을 재현하는 데 자연스러워 보이는 선택이다. 그러나 촬영감독과 상의한 끝에 색을 남기기로 했다. 실마리는 사진가 솔 라이터가 찍은 뉴욕의 컬러 사진이었다. 강하게 튀어나오기보다 차분히 가라앉은 색들이 그랜디지가 찾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참고한 사진의 시대가 영화의 배경과 정확히 같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진을 당시 뉴욕의 색을 증명하는 자료처럼 가져오지 않았다. 영화 전체가 어떤 색으로 보일지, 그 색이 인물과 공간을 어떻게 한데 묶을지 생각하는 데 사용했다. 고증 자료를 모으는 일과 화면의 인상을 정하는 일에는 서로 다른 판단이 필요하다.

화려한 색을 줄였다고 해서 화면에서 모든 활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옷과 실내,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비슷한 톤 안에 놓이면 배우의 얼굴과 작은 움직임을 오래 보게 된다. 말을 아끼는 퍼킨스와 몸을 크게 쓰는 울프의 차이를 살피기에도 좋은 조건이다. 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 문장에 앞서, 한 공간에 앉아 있는 두 몸의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의 색을 이렇게 살펴보면 그랜디지의 무대 경험을 막연히 떠올리는 것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배우에게 시선을 모으기 위해 주변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의상과 벽의 색이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때는 언제일까. 익숙한 배우의 연기를 믿는 일과 그 연기가 잘 보일 화면을 만드는 일은 현장에서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실내에서 남성이 여성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까이 말한다

첫 화면의 구두는 어디에서 왔을까

영화 초반에는 구두가 먼저 보인다. 이 선택을 유명 감독의 장면에 대한 오마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랜디지가 밝힌 출발점은 뉴욕 5번가를 찍은 사진이었다. 뉴욕의 보도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영화의 첫 화면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작은 일화가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 관한 설명을 조금 가볍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구도가 눈에 익는다고 해서 반드시 영화사의 계보부터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보관한 사진이나 동료가 보여준 이미지가 한 장면의 시작일 수도 있다. 그랜디지는 첫 영화를 준비하면서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각 자료와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구두에서 시작한 화면은 곧 사람이 일하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간다. 작가와 편집자의 삶도 작품 이름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누군가는 사무실에 출근하고, 누군가는 읽어주기를 바라는 원고를 들고 찾아온다. 천재의 영감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런 일상의 동선을 보여주는 출발이다. 위대한 책을 만든 사람들도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와야 서로를 만날 수 있다.

나무가 많은 길을 외투 입은 두 남성이 나란히 걷는다

좋아하는 장면도 함께 고칠 수 있을 때

〈지니어스〉에는 원고의 문장을 줄이는 과정이 중요한 장면으로 들어 있다. 그랜디지는 긴 문장이 나쁘고 짧은 문장이 좋다는 결론을 찍으려 하지 않았다. 관객이 처음 문장에도 마음이 가고, 다듬은 문장에도 마음이 가기를 바랐다. 그래야 작가가 자기 문장을 놓기 어려워하는 사정을 이해하면서 편집자의 제안도 들어볼 수 있다.

이 선택은 영화 자체를 만드는 태도와도 닿는다. 감독이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반드시 끝까지 남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동료가 덜어내자고 했다고 해서 처음의 애정이 틀렸던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좋아 보이는지 함께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 퍼킨스와 울프가 원고를 두고 오래 대화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랜디지의 첫 영화를 보면 베테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잘하는 일을 오래 해왔다고 새로운 일까지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묻고, 믿는 동료의 의견을 들어볼 수는 있다. 책 표지에 남지 않는 편집자를 주인공으로 고른 감독이 첫 영화의 동료들을 이야기할 때 유난히 구체적이었던 이유도 이해된다. 완성된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내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자기 작업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감상 포인트

◆ 두 사람이 원고를 대하는 몸짓 — 울프가 말하는 동안 퍼킨스는 어떻게 듣고 반응하는지 보자. 의견의 차이는 대사의 내용뿐 아니라 말을 이어가는 속도와 상대를 기다리는 태도에도 나타난다. 같은 원고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왜 자꾸 부딪히는지 살필 수 있다.

◆ 색을 남겨둔 화면 — 의상과 벽, 창 주변의 색이 얼마나 강하게 드러나는지 살펴보자. 흑백으로 통일하지 않고 차분한 색을 남긴 선택이 얼굴과 공간을 함께 보게 한다. 시대극의 분위기를 느끼는 데서 더 나아가, 그 분위기 속에서 어떤 배우의 움직임이 도드라지는지 확인해볼 만하다.

◆ 얼굴보다 먼저 보이는 구두 — 첫 화면이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 기억해두자. 인물을 이름이나 업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작이다. 이후 사무실과 원고를 대하는 장면도 거창한 창작의 순간만큼 일하는 사람의 하루로 바라볼 수 있다.

◆ 고치기 전 문장에 남는 애정 — 편집이 진행될 때 처음 문장이 지녔던 매력을 바로 잊지 말자. 줄어든 결과만 좋다고 여기면 울프의 저항을 단순한 고집으로 읽기 쉽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함께 생각하면 편집자의 일도 더 복잡하게 보인다.

관련 작품

◆ 〈지니어스〉 (2016, 마이클 그랜디지) — 작가와 편집자의 협업을 다룬 그랜디지의 첫 장편영화다. 두 남자의 충돌을 승패로 정리하기보다 서로의 판단이 어느 순간 필요한지 따라가면, 창작을 돕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은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 〈오마주〉 (2021, 신수원) — 한 감독이 과거 여성 감독의 영화 복원에 참여하면서 화면 뒤에 남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완성된 작품에 이름을 남기는 일과 실제 작업을 오래 지탱하는 일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다른 시대와 현장에서 이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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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