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은 〈그날의 딸들〉을 만들며 한국의 현실을 더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장면도 찍었다. 르완다와 비교하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편집할 때 그 대목들을 덜어냈다. 자신의 …
고훈은 〈그날의 딸들〉을 만들며 한국의 현실을 더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장면도 찍었다. 르완다와 비교하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편집할 때 그 대목들을 덜어냈다. 자신의 생각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메라 앞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만큼, 완성된 영화에 어떤 말을 남기지 않았는지가 이 감독을 궁금하게 만든다.
제주 4·3과 르완다 대학살을 한 영화에 담기로 하면 비슷한 역사와 다른 대응을 비교하는 길이 먼저 보인다. 고훈이 택한 중심에는 두 딸의 만남이 있었다. 구술 작가 양경인과 르완다에서 온 파치스가 서로의 사정을 듣고 함께 이동한다. 감독이 가진 생각을 확인하는 여행이 되어버린다면, 두 사람이 거기서 무엇을 느끼는지는 부차적인 일이 된다. 편집에서 말을 덜어낸 선택은 그 위험을 스스로 알아차린 흔적처럼 보인다.
고훈은 제주에서 자랐지만 4·3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사건의 이름을 들어본 것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은 달랐다. 고향에 살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의 과거를 제대로 듣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경험을 알고 나면 감독이 두 사람의 여행을 따라가는 위치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제주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르완다를 찾아가는 구도가 아니다. 자기 고향에도 더 알아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사람이 또 다른 역사를 만나러 간다. 다른 곳의 사정을 듣는 일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곳을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제주와 르완다를 잇는 기획은 먼저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고훈이 더한 선택은 생존자의 딸들을 중심에 두는 일이었다.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삶에도 무엇이 남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같은 소재를 받아도 누구를 만날지에 따라 영화가 전혀 다른 질문을 갖게 된다.
양경인은 증언을 기록해온 작가다. 그가 다른 생존자의 딸을 만나면 질문에는 직업의 경험과 가족의 경험이 함께 들어간다. 파치스 역시 르완다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가족 이야기를 갖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둘에게 설명자의 역할만 주지 않았다는 점이 이 기획의 중요한 선택이다.
르완다의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제주를 돌아보면 하고 싶은 말이 생길 수 있다. 고훈 역시 그 비교를 촬영했고 편집에서 고민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비판을 없앴다는 결과보다 왜 덜어냈는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때문에 영화가 강요하는 듯 보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비교는 다른 곳에서 가능한 일이 이곳에서도 가능한지 묻게 한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사람은 비교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선택에는 자녀를 키워야 했던 사정과 이후에도 같은 곳에서 살아야 했던 조건이 붙어 있다. 그런 사정을 듣기 전에 어느 사회가 더 낫다는 결론을 정하면 사람의 말은 결론을 위한 사례로 작아진다.
그 판단을 알고 다시 보면 두 사람의 대화가 더 눈에 들어온다. 감독이 정리한 결론을 듣기보다 이들이 무엇을 묻고 어떤 답을 받아들이는지 살피게 된다.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는 말도 그렇게 구체적일 수 있다. 누군가의 삶을 듣는 동안 내 결론을 조금 늦추도록 영화를 구성하는 것이다.
고훈은 먼저 두 역사를 잇는 제안을 받았고, 그 안에서 만날 사람을 골랐으며, 촬영 뒤에는 자기 말의 비중을 다시 정했다. 출발점에 있던 기획이 사람을 만나면서 더 구체적인 영화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처음의 아이디어보다 이후의 선택들이 감독을 더 잘 보여준다.
완성된 영화에는 고훈이 자기 고향을 바라보며 품은 생각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양경인과 파치스가 함께 떠난 여정, 그들이 만난 가족들의 사정이 있다. 한 사람의 의견으로 묶기에는 서로 다른 삶들이다. 감독은 그 차이를 남겨둔 채 두 딸을 따라간다.
그가 편집실에서 덜어냈다는 말들이 궁금했지만, 제작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남겨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이 간다. 오래도록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던 고향에서 자란 감독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자리를 내어준 영화다. 자신이 설명하는 시간을 줄였기에 관객은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게 됐다.
◆ 역사의 설명과 사람의 소개 — 양경인과 파치스를 사건의 설명자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상대의 말을 듣고 자기 경험을 들려주는 동안 개인적인 관심도 드러난다. 감독이 역사적 배경뿐 아니라 만남을 중심에 둔 효과를 살필 수 있다.
◆ 안내하는 사람도 배운다 — 여행에서 각자가 익숙한 곳과 낯선 곳을 구별해보자. 고향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는 안내받는다. 누가 계속 가르치는 구도가 되지 않도록 여행 자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볼 만하다.
◆ 설명에서 만남으로 — 사건의 배경을 알려주는 대목과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비교해보자. 지식이 더해지는 때와 한 사람의 사정이 가까워지는 때는 다르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내용과 관객이 인물을 만나는 시간을 어떻게 배분했는지 살필 수 있다.
◆ 영화가 끝난 뒤 더 듣고 싶은 사람 — 어떤 인물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지 떠올려보자. 사건에 대한 지식과 한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누구를 중심에 놓는가라는 감독의 선택이 관람 이후에도 남기는 것을 살필 수 있다.
◆ 〈파편들의 집〉 (2022, 시몬 레렝 빌몽) — 아동 쉼터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따라간다. 사회적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례로만 아이들을 보지 않고, 서로 친구가 되고 어른을 기다리는 생활을 보여준다. 고훈의 영화와 함께 사람이 사건의 설명보다 크게 다가오는 순간을 찾아볼 만하다.
◆ 〈공동경비구역 JSA〉 (2000, 박찬욱) — 남북 병사들의 만남을 통해 관객이 분단의 조건을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과 그 안의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 사이에 연출의 선택이 있다. 다른 형식의 영화가 인물에게 가까워지는 방식을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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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