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초 금지에 반대하는 강연이 끝난 뒤, 대마초를 경고하는 영화가 상영됐다. 1972년 미국에서 키스 스트루프가 〈리퍼 매드니스〉를 다시 틀었을 때 벌어진 일이다. 금지정책에 반…
대마초 금지에 반대하는 강연이 끝난 뒤, 대마초를 경고하는 영화가 상영됐다. 1972년 미국에서 키스 스트루프가 〈리퍼 매드니스〉를 다시 틀었을 때 벌어진 일이다. 금지정책에 반대하던 단체 NORML의 설립자는 이 영화를 35분으로 줄여 강연 뒤에 보여줬다. 그는 대학생 관객들이 영화의 과장된 묘사를 재미있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원래 제목은 〈자녀들에게 말하라〉였다. 자식이 위험에 빠질 수 있으니 부모에게 경계하라고 요구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상영한 사람은 그 경고를 믿지 않았다. 상영 전부터 영화를 고른 이유가 달라졌으니, 스크린 속 어른이 아무리 엄숙하게 말해도 그 엄숙함이 그대로 전달되기는 어려웠다.

루이 J. 개스니어가 연출한 이 영화는 긴 경고문으로 시작한다. 대마초가 젊은이들을 파괴한다고 선언하고, 앞으로 나올 장면이 실제 연구에 기초했다고 주장한다. 아직 어떤 인물도 만나지 못한 관객에게 무엇을 무서워해야 하는지부터 알려주는 셈이다.
곧 고등학교의 학부모 모임이 등장한다. 교장 캐럴은 학생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부모들 앞에서 들려준다. 영화 속 학부모들은 교장의 이야기를 듣고, 극장 안 관객은 그 학부모들과 함께 경고를 받는다. 사건이 시작되기도 전에 믿을 만한 어른의 설명이라는 형식이 갖춰진다.
그 설명 속으로 들어가면 학생들을 아파트에 불러들이는 어른들이 있다. 음악과 춤, 낯선 친구가 있는 자리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놀이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 이곳을 파국의 출발점으로 소개받았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앞으로 무엇이 잘못될지 기다리게 만드는 구성이다.
이 차이는 영화를 읽는 데 중요하다. 인물은 아직 모르지만 관객은 안다는 구도를, 영화가 보여줄 사건으로 설득하기 전에 경고문과 교장의 권위로 먼저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담배를 건네는 행동은 그 순간부터 앞으로 생길 잘못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 뒤 이어지는 사건들은 처음의 주장을 거듭 확인하는 자리에 놓인다.

영화는 그 자리에 가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 음악과 춤, 사람들의 들뜬 몸짓에 시간을 쓰고, 이후에는 범죄와 폭력을 이어간다. 경고를 전하기 위한 장면이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붙잡는 장면이기도 하다. 관객이 어느 쪽에 더 관심을 둘지까지 영화가 정해놓을 수는 없다.
사건 속 어른들의 행동을 보면 교장의 설명보다 복잡한 대목도 있다. 아파트를 운영하는 메이는 공급책 잭이 학생들을 데려오려 하자 아이들에게 파는 일에 반대한다. 잭은 개의치 않는다. 같은 장소에 있는 두 어른도 책임을 느끼는 선이 다르다. 아이들이 그곳에 오게 되는 과정에는 돈을 벌려는 사람의 선택이 끼어 있다.
그런 선택들을 따라가다가 교장의 큰 경고로 돌아오면, 사건의 여러 원인이 하나의 두려운 대상 아래 묶였다는 점이 보인다. 누가 누구를 유인했는지, 어느 어른이 위험을 알면서도 아이들을 불러들였는지 따로 볼 여지가 생긴다. 무서운 사건을 많이 보여준다는 사실과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충분히 설명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제목도 달라졌다. 영화는 〈자녀들에게 말하라〉에서 〈더 버닝 퀘스천〉을 거쳐 〈리퍼 매드니스〉라는 이름으로 재개봉했다.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을 당부하던 제목보다, 새로운 제목은 관객 앞에 벌어질 소동을 내세운다. 내용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이름이 자극적인 구경거리를 약속하는 이름처럼 들릴 수도 있다. 경고와 오락 사이의 간격은 영화가 다시 소개될 때마다 달라질 여지를 품고 있었다.
스트루프는 영화의 과장을 새 관객에게 보여줄 이유로 삼았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강연을 연결해주던 에이전트를 통해 영화를 알게 된 뒤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복사본을 구해 상영했다. 1972년 대학 순회상영에 쓰인 포스터와 광고 전단도 남아 있다. 이때 스크린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영화는 금지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자료가 아니라, 금지의 논리를 되돌아볼 자료로 제시됐다.
35분으로 줄였다는 대목은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새 의미를 얻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 영화를 골랐고, 편집했으며, 자신의 강연과 나란히 놓았다. 관객은 이미 다른 설명을 들은 상태에서 같은 경고를 접했다. 영화 안의 교장이 맡고 있던 안내자의 역할을 영화 밖의 강연자가 가져간 셈이다.
이 과정에서 과도하게 진지한 표정과 경고는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스트루프는 학생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반응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기억하는 학생들의 호응은 새 상영의 목적에 잘 들어맞았다. 한때 경고의 근거로 쓰이던 장면을 경고 자체를 의심하는 데 쓰게 된 것이다. 영화를 다시 틀기로 한 선택에는 스크린 속 어른의 말을 믿지 않을 자유도 들어 있었다.

영화가 붙인 설명과 내가 본 장면 사이를 돌아보게 한다. 첫 경고문을 얼마나 믿고 시작했는지, 사건을 본 뒤 그 설명에 무엇을 덧붙이고 싶어졌는지 생각할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누구에게 어떤 순서로 소개되는가에 따라 달리 읽힌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보인다. 작품의 수명에는 필름뿐 아니라 그것을 다시 꺼내 틀기로 한 사람들의 선택도 들어 있다.
〈화이트 좀비〉 (1932, 빅터 할페린)
다른 사람에게 의지를 빼앗겨 움직이는 몸을 공포로 삼는다. 인물의 행동을 누가 통제하는지, 그 통제에서 누가 이익을 얻는지 살펴보며 함께 볼 수 있다.
〈스카페이스〉 (1932, 하워드 혹스)
갱스터를 비판하는 경고문과 갱스터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가 한 작품 안에 있다. 범죄를 경계하라는 말과 범죄자를 따라가게 만드는 장면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비교하기 좋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