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인간을 빚은 것은 신의 일이었다. 그런데 16세기 프라하의 한 랍비가 같은 일을 시도했다. 블타바 강변의 진흙으로 거대한 형상을 빚었다. 히브리 문자로 이마에 '진실(에메…
흙에서 인간을 빚은 것은 신의 일이었다. 그런데 16세기 프라하의 한 랍비가 같은 일을 시도했다. 블타바 강변의 진흙으로 거대한 형상을 빚었다. 히브리 문자로 이마에 '진실(에메트)'을 새기자, 흙덩이가 눈을 떴다. 2026년,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인공지능의 선조'라고 부른다. 그리고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스튜디오에서 칼 뵈제가 연출한 이 전설의 세 번째 영화판이 태어났다. 파울 베게너는 앞서 1914년에 찍어 1915년 1월 베를린에서 개봉한 「골렘」과 1917년의 「골렘과 춤추는 소녀」를 내놓았다. 앞의 두 편은 소실되거나 단편만 남아 온전히 전하는 것은 1920년판뿐이다. 이 판본은 속편이 아니라 골렘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를 거슬러 올라간 전사(前史)다.
골렘 전설은 단순한 괴물 이야기가 아니다. 박해받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수호자 신화'이며, 동시에 창조 행위에 따르는 책임과 위험을 경고하는 우화다. 이 전설의 뿌리를 이해해야, 1920년의 영화가 왜 단순한 호러를 넘어서는지 보인다.
히브리어로 '골렘(golem)'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재료'를 뜻한다. 유대 신비주의 전통에서 골렘 만들기란 신의 창조 행위를 모방하는 신비적 의식이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탈무드에 등장한다. 라바(Rava)라는 랍비가 흙으로 사람을 빚어 다른 랍비에게 보냈는데, 이 피조물은 말을 하지 못했고, 결국 "너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에 먼지가 되었다. 말할 수 없다는 것, 즉 '로고스'가 없다는 것이 인간과 피조물을 가르는 경계였다. 이 기준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오늘날 AI의 '지능' 여부를 판단하는 튜링 테스트의 핵심도 결국 언어 능력이기 때문이다.
전설이 가장 유명한 형태를 갖춘 것은 16세기 프라하에서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통치 아래, 프라하의 유대인들은 '혈액 비방(blood libel)'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대인이 기독교 아이를 죽여 피를 의식에 사용한다는 거짓 고발이었다. 이 위기 속에서 프라하의 수석 랍비 예후다 뢰브 벤 베잘렐, 이른바 '마하랄'이 블타바 강변의 진흙으로 거대한 형상을 빚고, 카발라 의식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마에 '에메트(אמת, 진실)'라는 히브리 문자를 새기자 골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글자 '알레프'를 지우면 '메트(מת, 죽음)'가 되어 골렘은 멈춘다. 문자 하나의 차이가 생과 사를 가르는 이 장치는, 0과 1로 작동하는 컴퓨터 코드의 가장 오래된 메타포다.
그러나 모든 골렘 이야기에는 같은 결말이 따른다. 수호자로 창조된 골렘은 결국 통제를 벗어나 파괴자가 된다. 너무 위험해서 사용할 수 없지만, 너무 유용해서 완전히 폐기할 수도 없다. 그래서 랍비는 골렘을 파괴하는 대신 프라하 구신회당(알트노이슐)의 다락에 '비활성화' 상태로 안치했다. 필요할 때 다시 깨울 수 있도록. 이 양가적 결말은 2026년 AI를 둘러싼 논쟁과 섬뜩하리만큼 닮아 있다.
베게너는 골렘 이야기에 세 번 도전했다. 1915년, 1917년, 그리고 1920년. 한 배우이자 감독이 같은 전설에 7년을 바친 이 집착의 역사가, 1920년 최종 버전의 밀도를 만들어냈다.
베게너가 골렘 전설을 처음 만난 것은 1913년, 프라하의 학생을 촬영하면서였다.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를 직접 걸으며 현지에서 전해지는 골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즉시 매료되었다. 1915년, 그는 헨리크 갈렌과 함께 첫 번째 골렘 영화를 만들었다. 현대를 배경으로, 골동품상이 폐허에서 골렘을 발견해 되살리는 이야기였다. 1917년에는 로쿠스 글리제와 공동 연출한 코미디 단편 「골렘과 춤추는 소녀」를 내놓았는데, 한 배우가 자신이 영화에서 맡은 골렘 역의 공포 효과를 알게 된 뒤 파티에서 골렘 의상을 입고 장난을 치는 자기 패러디였다. 이 두 작품은 현재 거의 소실되었다.
베게너는 자신의 첫 두 시도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가 원한 것은 전설의 '기원'을 직접 재현하는 것이었다. 1920년, 제작사 PAGU(Projektion-AG Union)의 자금과 UFA의 배급망을 등에 업고 그는 마침내 원하던 영화를 만든다. 골렘. 16세기 프라하를 배경으로, 랍비 뢰브가 골렘을 창조하고, 골렘이 유대 공동체를 구하고, 결국 통제를 벗어나 파괴자가 되는 이야기. 영화사 최초의 '프리퀄'이자, 최초의 '프랜차이즈 오리진 스토리'라 할 수 있다.
베게너는 감독이자 골렘 역을 직접 연기했다. 그의 몸에는 무거운 진흙색 분장이 입혀졌고, 움직임은 의도적으로 둔하고 기계적으로 설계되었다. 흙에서 태어난 존재의 육중함, 의지 없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의 비인간성. 베게너는 자신의 몸으로 이것을 구현했다. 뉴욕 타임스의 1921년 리뷰는 그의 연기가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며 호평했고, 영화는 뉴욕 크라이테리언 극장에서 16주 연속 매진을 기록하며 이른바 '골렘 컬트'를 일으켰다.

이 영화의 프라하 게토는 실재하는 도시가 아니다. 건축가 한스 푈치히가 베를린 템펠호프 스튜디오에 세운 완전한 인공 세계다. 그리고 이 세트야말로 독일 표현주의의 또 다른 걸작이다.
푈치히는 1919년 막스 라인하르트의 베를린 그로세스 샤우슈필하우스를 설계한 협업자이자, 당대 독일을 대표하는 건축가였다. 그가 설계한 프라하 게토는 실제 중세 유대인 거주지를 '참조'하되 철저히 '변형'한 것이다. 건물들은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지붕은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문과 창문은 비정상적으로 좁고 낮다. 골목은 미로처럼 꺾이고, 계단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다. 같은 해 개봉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세트가 '평면적 회화'에 가까웠다면, 푈치히의 게토는 '입체적 건축'이다. 관객은 이 공간 안에 실제로 들어와 있는 듯한 밀폐감을 느낀다.
뉴욕 타임스는 개봉 당시 이 세트를 "칼리가리보다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배경"이라 평가했다. 칼리가리의 세트가 한 인물의 주관적 광기를 표현했다면, 골렘의 세트는 한 공동체의 역사적 고립과 억압을 물리적으로 구현했다. 좁은 골목, 낮은 천장, 안쪽으로 기울어진 벽 — 이 모든 것이 유대 게토의 폐쇄성, 외부 세계로부터의 차단,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신비와 공포를 건축적 언어로 번역한다.
촬영감독 카를 프로인트의 카메라는 이 건축을 더욱 살려냈다. 프로인트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극단적으로 활용해 게토의 골목에 깊이감을 부여했고, 골렘이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로우 앵글로 그의 거대함을 강조했다. 프로인트는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드라큘라(1931)의 촬영을 맡았고, 미이라(1932)에서는 직접 감독까지 했다. 골렘의 게토에서 연마된 그의 빛과 그림자의 기술은, 유니버설 호러 영화 전체의 시각적 기반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퀀스는 골렘의 창조 장면이다. 랍비 뢰브가 악마 아스타로스를 소환하고, 공중에 떠오른 히브리 문자가 생명의 주문을 형성하는 이 장면은 1920년 특수효과의 정점이자, '코드가 생명을 만든다'는 현대적 메타포의 원형이다.
랍비 뢰브(알베르트 슈타인뤼크)의 서재에서 의식이 시작된다. 그는 고대 카발라 문헌을 펼치고, 조수와 함께 소환 의식을 진행한다. 화면 위에 불꽃처럼 히브리 문자들이 나타나 공중에서 회전하며 하나의 단어를 형성한다. 악마 아스타로스의 이름이 그것이다. 아스타로스의 거대한 머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골렘을 살릴 수 있는 마법의 단어를 속삭인다. 이 시퀀스에서 사용된 이중 노출, 합성 촬영, 조명 트릭은 1920년 기준으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마술적 트릭 촬영과 이후 유니버설 호러의 정교한 특수효과 사이에 놓인 결정적 징검다리가 바로 이 장면이다.
그러나 기술적 성취보다 더 주목할 것은 이 장면이 담고 있는 사상이다. 문자가 생명을 부여한다. 이것은 유대 신비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세페르 예치라(창조의 서)」에 따르면 신은 히브리 문자의 조합으로 세계를 창조했다. 랍비가 골렘을 만드는 행위는 이 창조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마에 '에메트(진실)'를 새기면 생명이 깃들고, 첫 글자를 지워 '메트(죽음)'로 바꾸면 생명이 떠난다. 문자로 골렘을 깨우고 멈추는 설정은, 코드로 기계에 지능을 주고 그 기능을 바꾸는 오늘날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2026년의 AI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비유가 16세기 프라하의 진흙 위에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골렘은 처음에는 구원자다. 궁전의 무너지는 천장을 떠받쳐 황제의 궁정을 구하고, 유대 공동체를 내쫓으라는 명령을 철회시킨다. 그런데 행성의 배열이 바뀌면서, 수호자는 파괴자로 변한다. 이 전환의 구조가 이후 모든 '피조물 서사'의 원형이 되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골렘은 도구다. 랍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순종적인 하인이다. 궁전의 장미 축제에서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자, 랍비는 골렘을 데려가 시연을 보인다. 마법으로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스베루스의 환영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궁정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에 격노한 것처럼 궁전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골렘이 거대한 팔로 천장을 떠받쳐 모든 사람을 구한다. 황제는 감동하여 추방령을 철회한다.
그러나 위기가 해결된 뒤에도 골렘은 멈추지 않는다. 랍비의 조수가 질투심에 골렘을 다시 활성화시키자, 골렘은 플로리안을 지붕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랍비의 집에 불을 지르고, 미리암을 머리채로 끌고 거리를 질주한다. 게토의 문을 부수고 바깥 세계로 나간 골렘은 — 꽃을 건네는 한 아이 앞에서 멈춘다. 아이가 호기심으로 골렘의 가슴에 박힌 다윗의 별 부적을 떼어내자, 골렘은 쓰러져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창조 → 봉사 → 통제 상실 → 파괴 → 비활성화'라는 이 서사 구조는 이후 모든 피조물 서사의 DNA가 되었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1931)에서 괴물이 소녀와 꽃을 주고받는 장면은, 골렘이 아이 앞에서 멈추는 이 장면의 직접적 변주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복제인간이 창조자를 찾아가는 구도, 알렉스 가랜드의 엑스 마키나(2014)에서 AI가 창조자를 넘어서는 순간. 이 모든 서사의 원형이 1920년 프라하 게토의 진흙 속에 묻혀 있었다.

이 영화는 유대 공동체를 향한 동정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인가? 이 질문은 영화 개봉 당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논쟁이다. 그리고 이 논쟁 자체가 1920년 독일의 복잡한 사회적 지형을 드러낸다.
영화의 표면적 서사는 박해받는 유대 공동체에 대한 동정이다. 황제의 부당한 추방령에 맞서 랍비가 자기 민족을 지키려 한다는 구도는 분명히 유대 공동체의 편에 서 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영화의 시각적 재현에서 반유대주의적 스테레오타입을 읽어낸다. 게토의 어두운 골목, 비밀스러운 카발라 의식, 악마 소환 — 이 이미지들이 '유대인은 흑마술을 행한다'는 유럽의 오래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 영화가 가장 강렬하게 포착하는 것은 1920년 독일의 불안 그 자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대인들은 경제적·문화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사회 저변에 흐르는 반유대주의의 물결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13년이 남아 있었다. 골렘 전설이 "언젠가 다시 필요할 때를 위해" 피조물을 다락에 안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1920년의 독일 유대인들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이 되리라고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2026년, 우리는 매일 새로운 AI 모델이 등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든 존재가 인간을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SF 소설의 가설이 아닌 기술 산업의 현실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들 자신이 골렘과의 연결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존 폰 노이만과 노버트 위너 같은 인물들은 스스로를 랍비 뢰브의 후손으로 여겼다. 1965년, 이스라엘 바이츠만 연구소에 새 컴퓨터가 설치되었을 때, 유대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숄렘은 그 컴퓨터를 '골렘 알레프(Golem Aleph)'라 명명했다. 프라하의 진흙 피조물과 실리콘 칩의 계산기 사이에 놓인 이 작명은 우연이 아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좋아한다면, 그 서사의 선조가 여기 있다. 엑스 마키나, 블레이드 러너,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피조물의 반란'에 전율했다면, 그 원형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ChatGPT에 질문을 던지며 "이것이 '이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명령에 따르는 것인가"를 궁금해한 적이 있다면 — 골렘의 빈 눈이 106년 전에 이미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골렘 창조 의식의 히브리 문자 — 공중에 떠오르는 불꽃 같은 문자들에 주목하라. 1920년의 특수효과가 어떻게 '코딩'의 시각적 메타포가 되는지를 목격할 수 있다.
골렘이 처음 눈을 뜨는 순간 — 베게너의 눈 연기를 보라. 거기엔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그 모호함이 이 캐릭터의 힘이다.
궁전이 무너지는 시퀀스 — 골렘이 천장을 떠받치는 장면의 미니어처와 실물 세트의 교차 편집에 주목하라.
게토의 건축 — 한스 푈치히의 세트를 관찰하라. 기울어진 벽, 좁은 문, 비대칭 창문이 만들어내는 밀폐감은 칼리가리의 세트와 비교할 만하다.
아이와 골렘의 마지막 만남 — 파괴자가 한 아이의 순진무구함 앞에서 멈추는 이 장면이, 11년 뒤 프랑켄슈타인의 호숫가 장면으로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상상해 보라.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20) — 같은 해 탄생한 독일 표현주의의 쌍둥이. 칼리가리가 개인의 광기를 공간에 담았다면, 골렘은 공동체의 공포를 건축에 담았다.
노스페라투 (1922) — 2년 뒤 등장한 독일 표현주의 호러. 「골렘」 연작에 참여한 각본가 헨리크 갈렌이 각본을 맡아, 흙의 피조물을 흡혈귀로 바꿔 공포의 형상만 갈아 끼웠다.
메트로폴리스 (1927) — 같은 UFA가 낳은 표현주의의 정점. 흙 대신 금속으로 빚은 기계인간 마리아는 골렘이 던진 '창조된 존재'의 질문을 미래 도시로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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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