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마을을 덮는다. 지붕 위로 솟은 검은 몸, 양옆으로 펼친 거대한 날개 아래에서 집들이 작아진다. 그런데 이 악마는 늙은 학자 앞에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악마가 마을을 덮는다. 지붕 위로 솟은 검은 몸, 양옆으로 펼친 거대한 날개 아래에서 집들이 작아진다. 그런데 이 악마는 늙은 학자 앞에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큰 힘이 나를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F. W.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는 악마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으로 건너간다. 첫머리의 거대한 모습은 뒤에 이어질 유혹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메피스토는 대천사와 내기를 건다. 파우스트를 신에게서 돌아서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에 페스트를 퍼뜨리고, 사람들을 구하려는 학자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파우스트는 처음부터 젊음이나 쾌락을 원해 악마를 찾는 사람이 아니다. 죽어가는 이들이 도움을 청하지만 자신의 지식도 기도도 그들을 살리지 못하자, 악마에게까지 손을 내민다.
이 순서를 알면 마을을 덮는 메피스토의 모습이 달리 보인다. 악마의 위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파우스트가 맞서야 할 재앙의 크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 사람의 몸이 집들과 탑을 압도한다. 그런 상대 앞에서 늙은 학자의 힘은 얼마나 작을까. 파우스트에게는 당장 눈앞의 환자를 살리는 일이 절실한데, 메피스토는 그 절실함마저 자기가 만든 것임을 알고 있다.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만으로는 이 거래의 시작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파우스트가 타락한 사람이어서 걸려든 함정이라면 한발 떨어져 구경하기 쉽다. 그러나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면, 그가 어디서 발을 잘못 디뎠는지 좀 더 가까이 보게 된다. 재앙을 일으킨 쪽이 해결책도 쥐고 있다는 불공평함이 그를 옥죈다.

〈파우스트〉는 괴테의 작품을 그대로 줄인 영화가 아니다. 한스 카이저의 각본은 괴테와 크리스토퍼 말로의 극, 파우스트를 둘러싼 옛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의 전반부에는 악마와의 거래와 기이한 모험이 펼쳐지고, 뒤로 갈수록 그레첸과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다. 방대한 사상을 자막으로 차근차근 옮기기보다 변신과 여행, 만남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촬영은 1925년 9월부터 1926년 5월까지 베를린의 UFA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촬영감독 카를 호프만을 비롯한 제작진은 명암의 대비, 안개, 이중 노출을 활용했다. 서로 다른 이미지를 겹쳐 보이게 하는 이중 노출은 실제로 같은 자리에 없는 존재들을 한 화면에 둘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영화 속 마법을 모두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메피스토의 망토를 타고 날아가는 장면에는, 카메라가 오르내리며 움직일 수 있도록 따로 만든 촬영 장치도 쓰였다.
이 비행에서 흥미로운 것은 화면이 보여주는 힘의 쓰임새다. 마을을 덮을 때에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던 악마가 이제 파우스트를 태우고 세상 위로 올라간다. 한곳에서 환자를 살리려 애쓰던 학자는 도시와 산을 건너다닐 수 있게 된다. 메피스토가 내미는 보상은 영혼이라는 말보다 당장 실감하기 쉽다. 젊어진 몸으로 낯선 곳을 보고 원하는 것을 누리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특수효과의 정교함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누구의 제안을 근사하게 만들고 있는지는 놓치기 어렵다. 비행이 매혹적으로 보일수록 악마가 주겠다는 삶도 잠시 그럴듯해진다. 악마와의 거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대가로 얻는 것들이 탐나 보일 수 있다. 구름과 지형이 흘러가는 화면은 그 유혹을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부분이다.
에밀 야닝스가 연기하는 메피스토는 내내 하늘에서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는다. 파우스트와 함께 이동하고 그의 소원을 실행하는 동행자가 된다. 마을보다 컸던 악마와 나란히 다닐 수 있게 됐다는 변화가 재밌다. 거리에서 바로 옆에 있는 상대는 거대한 그림자보다 친숙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할 수 있는 일까지 작아진 것은 아니다.
메피스토가 파우스트를 강제로 끌고만 다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제공한다. 파우스트는 자기 소원을 말하고, 악마가 그 소원을 이뤄주는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낄 만한 자리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메피스토의 힘에 기대고 있다. 소원이 이뤄질수록 그와의 동행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워진다.
야닝스의 연기를 볼 때도 이 두 모습을 함께 기억해두면 좋다. 마을 위에서 펼친 검은 형체와 파우스트 곁의 사람이 같은 존재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크기를 잊으면 능숙한 안내자처럼 보이고, 기억하면 사소한 도움에도 다른 계산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마의 위협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행의 모습 안으로 들어와 있다.

파우스트가 고향으로 돌아와 그레첸을 사랑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카밀라 호른이 연기하는 그레첸은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만남 이후 삶이 흔들리고 주변에서 버림받는다. 앞서 파우스트가 무엇을 얻는지 따라가던 영화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생기는 손해를 보게 한다.
천사와 악마의 내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우스트의 영혼이었다. 그레첸은 그 내기의 당사자도 아닌데, 자신의 삶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불균형 때문에 그녀를 밝은 얼굴의 순수한 상징으로만 보기 어렵다. 파우스트에게는 젊음을 얻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모험이었을지 몰라도, 그와 만난 사람에게까지 같은 모험일 수는 없다. 마법이 열어준 자유를 누가 누리고 누가 뒤에 남는지가 달라진다.
그래서 영화의 시각적 즐거움도 끝까지 같은 무게를 유지하지 않는다.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이 있어도 눈앞의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는 일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레첸에 이르면, 악마가 부추긴 행동이 한 사람에게 어떤 짐을 남기는지 보게 된다. 마을 하나를 덮는 검은 날개를 찍어낸 영화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걱정하게 만드는 쪽으로 움직인다.
마을을 덮는 악마와 망토를 타고 가는 비행만으로도 눈길을 붙잡는 영화다. 그 장면들이 늙은 학자의 절박함과 욕망을 어떻게 바꾸는지 따라가면 볼거리는 더 오래 남는다. 무서운 존재에게 기대고 싶어지고, 그가 주는 선물이 탐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법은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잠깐의 즐거움을 허락한다.
◆ 악마와 마을의 크기 — 메피스토가 마을을 덮을 때 지붕과 탑이 그의 몸에 비해 얼마나 작게 보이는지 살펴보자. 사람이 재앙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이 크기의 차이로 드러난다. 이 모습을 기억해두면 나중에 그가 내미는 도움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 망토를 타고 가는 여행 — 파우스트가 악마의 도움으로 세상 위를 날아가는 동안 아래로 지나가는 풍경에 눈길을 줘보자. 한곳에 매여 있던 사람이 갑자기 먼 곳으로 갈 수 있게 됐다. 비행의 즐거움이 악마의 제안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만드는지 생각할 수 있다.
◆ 곁에 있는 메피스토 — 멀리서 마을을 압도하던 존재가 파우스트의 가까이에 있을 때는 어떤 상대처럼 보이는지 비교해보자. 소원을 실행해주는 동행자의 모습에는 편리함도 있다. 앞에서 본 위력과 지금의 친근한 거리가 겹칠 때 이 관계의 위험이 보인다.
◆ 그레첸과 주변 사람들 — 파우스트의 모험에 이어 그레첸이 살아가는 마을과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눈길을 줘보자. 낯선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파우스트와 그 마을에 속해 사는 그레첸은 처지가 다르다. 두 사람의 만남이 각자의 생활에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 〈노스페라투〉 (1922, F. W. 무르나우) — 벽에 드리운 흡혈귀의 실루엣이 인물의 몸 너머로 공포를 넓힌다. 마을을 뒤덮은 메피스토와 함께 떠올려보면, 무르나우가 그림자로 위협의 크기를 바꾸는 서로 다른 방법을 만날 수 있다.
◆ 〈메트로폴리스〉 (1927, 프리츠 랑) — 거대한 미래 도시에서 지상의 특권과 지하의 노동이 나뉜다. 〈파우스트〉가 악마의 몸으로 인간을 압도한다면 이 영화는 도시와 기계의 규모로 그 감각을 만든다. 거대한 풍경 속에서 사람이 어떤 자리를 갖는지 비교하기 좋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