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실험에서 사람이 죽으면 실패다. 마이라 박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서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다. 제리 워런의 〈Teenage Zombies〉에서 좀비는 남을 물어뜯기 위해 만들어…
이 실험에서 사람이 죽으면 실패다. 마이라 박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서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다. 제리 워런의 〈Teenage Zombies〉에서 좀비는 남을 물어뜯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만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얼굴보다 자기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 영화의 위협이다.
제목에 익숙한 단어가 두 개 붙어 있지만, 예상한 방식으로 만나는 영화는 아니다. 십 대들이 좀비 떼를 피해 도시를 달아나는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외딴 섬의 실험실부터 낯설다. 이곳에는 지시하는 사람과 지시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 좀비가 무엇을 하는지만큼 누가 시켰는지가 중요하다.
물놀이를 하던 네 친구가 섬에 배를 댄다. 숲속 저택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보고 해변으로 돌아오니 배가 사라져 있다. 섬에 내릴 때는 자기들이 갈 곳을 골랐다. 이제는 돌아갈 방법부터 다른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마이라에게 도움을 구하러 간 일행은 오히려 실험 대상이 된다.
캐서린 빅터가 연기하는 마이라는 외국 세력을 위해 사람의 의지를 빼앗는 약물을 연구한다. 실험실을 찾아온 요원들은 결과를 재촉한다. 그는 기존 약물이 사람을 죽였다는 문제를 설명하고, 새 약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제시한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사와 같아 보이지만 목적은 정반대다. 건강을 되찾은 사람이 자기 삶으로 돌아가게 할 생각이 없다.

사진 속 마이라는 흰 가운을 입고 유리 기구 앞에 서 있다. 곁의 두 남자는 그의 설명을 듣는 듯하다. 이 셋만 잘라 보면 연구 결과를 논의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연구의 대상인 사람들은 이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다. 실험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설명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이 한 건물 안에 있다.
마이라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좀비의 침묵과 차이가 커진다. 실험하는 사람은 목적도 실패도 다음 계획도 말한다. 좀비에게는 그 말을 거절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무표정하게 움직이는 몸을 분장이 소박한 괴물로만 보면, 명령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기 쉽다.
요원들이 원하는 것은 섬 안의 실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약물을 널리 퍼뜨려 한 나라의 사람들을 지배하려 한다. 영화가 냉전의 불안을 끌어오는 대목이다. 적은 국경을 넘어오거나 도시를 부수기 전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항할 능력을 없애려 한다. 이 영화에서 군사적 승리란 상대가 살아 있는 채로 자기 명령에 따르는 상태다.
나라를 지배한다는 거대한 계획이 사람 하나의 몸에서 시험된다. 실험실 안의 피해자와 섬 밖의 수많은 사람이 같은 약물의 대상이 된다. 요원들이 연구 결과를 재촉하는 대화에는 그 사람들의 이름이나 사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약물을 쓸 수 있는지가 우선이다.
마이라는 연구를 지휘하지만 요원들에게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실험 대상에게 명령하는 장면과, 요원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장면을 함께 보면 지시가 여러 사람을 거쳐 내려온다. 좀비를 만든 사람만 섬에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답을 내놓아야 하는지가 실험실의 관계를 보여준다.

갇힌 십 대들은 아직 좀비가 아니다. 밖으로 나갈 궁리를 하고 서로의 상황을 걱정한다. 창살은 이들의 이동을 막지만 생각까지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마이라의 약물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그 남아 있는 능력이다. 몸을 가두는 것과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결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철망 사진에도 서로 다른 상태의 사람들이 겹쳐 있다. 우리 안에는 갇힌 일행이 있고, 바깥에는 마이라와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반이 있다. 창살 밖이라고 모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서 있는 위치만 보면 이반이 일행보다 나은 처지인 듯하지만, 자기 뜻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탈출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이 차이가 계속 남는다. 섬 밖으로 나가는 길만 찾으면 되는지, 자기 몸을 지킬 방법까지 찾아야 하는지. 〈Teenage Zombies〉는 좀비를 이미 완성된 괴물로만 내놓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먼저 놓는다. 피해자가 괴물의 재료가 되는 이야기다.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는 사람을 먹는 시체들이 농가를 에워싼다. 〈Teenage Zombies〉에서는 의지를 잃은 사람들 뒤에 그들을 조종하려는 인간이 서 있다. 두 영화에 같은 ‘좀비’라는 이름을 붙여 보더라도 위험의 주체는 다르다. 한쪽에서는 다가오는 무리를 막아야 하고,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일을 막아야 한다.
이 오래된 영화의 흥미는 그 차이에 있다. 고릴라가 여성을 안고 있는 포스터는 거친 괴물 영화를 약속하지만, 실험실에서는 살아 있는 몸을 어떻게 부릴 것인가를 의논한다. 괴물을 보고 놀라는 것과 괴물이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 겹친다.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몸을 보여준다.
◆ 마이라가 말하는 실패
약물이 사람을 죽였다는 설명에서 그가 무엇을 문제 삼는지 들어보자. 실험 대상의 삶을 걱정해서인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서인지에 따라 같은 설명이 다르게 들린다. 치료를 연상시키는 흰 가운과 실험 기구가 곁에 있어도, 그가 회복시키려는 것은 환자의 자유가 아니다.
◆ 지시가 오가는 실험실
요원들이 마이라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이라가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일을 함께 보자. 지휘하는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는 재촉을 받는다. 악당 한 명의 기괴한 취미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을 조종하는 실험이 더 큰 목적에 쓰이려 한다는 사실이 대화에 드러난다.
◆ 철망의 안과 밖
일행은 우리 안에 있지만 탈출할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이반은 밖에서 움직이지만 다른 사람의 명령을 수행한다. 몸을 둘러싼 장애물과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을 나누어 보면 같은 감금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창살이 없는 쪽을 곧바로 자유로운 쪽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 포스터가 앞세운 괴물
노란 포스터에서는 거대한 고릴라와 그 팔에 안긴 여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철창과 실험 기구는 그 뒤에 작게 놓였다. 영화를 본 뒤 이 배치를 돌아보면 광고가 강조한 위험과 이야기를 움직인 실험의 비중을 비교할 수 있다. 포스터 한 장이 영화의 관심사를 전부 알려주지는 않는다.
◆ Voodoo Man (1944) — 윌리엄 보딘 감독. 의사가 아내를 돕겠다며 여성들을 실험실로 유인한다. 사람의 몸을 다른 목적에 쓰려는 의사라는 점에서 마이라와 이어진다. 피해자의 의사보다 실험하는 사람의 목적이 앞서는 두 실험실을 비교할 수 있다.
◆ White Zombie (1932) — 빅터 핼퍼린 감독. 좀비를 부리는 제당소 주인과, 원하는 여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그의 도움을 구하는 남자가 나온다. 상대의 선택을 없애서라도 소유하려는 욕심을 다룬다. 이 영화의 주술적 설정과 〈Teenage Zombies〉의 약물이 어떻게 비슷한 지배 욕망에 쓰이는지 볼 만하다.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1968) — 조지 A. 로메로 감독. 시체들의 공격을 피해 농가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대립이 벌어진다. 명령을 내리는 박사를 찾을 수 있었던 앞선 영화와 달리, 밀려오는 무리와 집 안의 갈등을 함께 견뎌야 한다. 두 영화의 인물들이 어떤 위험에 대응하는지 비교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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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