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쓴 소설에서 실패한 화가를 만난다. 어딘가 자기와 닮았다.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의 폴 세잔이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이 썼다면 넘어…
친구가 쓴 소설에서 실패한 화가를 만난다. 어딘가 자기와 닮았다.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의 폴 세잔이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이 썼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를 이야기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책에 들어 있다. 내 그림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 친구도 속으로는 나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다니엘 톰슨은 이 의심을 두 사람의 오랜 우정 속에 놓는다. 한쪽은 먼저 부와 명성을 얻었고 다른 쪽은 여전히 자기 그림과 씨름하고 있다.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다가도, 바로 그 때문에 한마디가 더 아프게 들린다. 영화가 붙드는 것은 친구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마음만이 아니다. 가장 잘 알리라 믿었던 사람이 내 삶을 다른 이야기로 쓰는 순간의 당혹감이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같은 형편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세잔은 부유한 집안의 아이였고 졸라는 가난했다. 함께 자라며 꿈꾸던 두 소년이 어른이 된 뒤에는 처지가 달라진다. 졸라는 글로 이름을 알리고 넉넉한 생활을 누린다. 세잔에게는 그림이 좀처럼 그런 안정을 주지 않는다.
돈 이야기는 그래서 단순한 생활비 문제가 되지 못한다. 친구를 돕는 일이 고마우면서도,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면 자기 작업까지 평가받는 듯 불편해질 수 있다. 영화 속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는 그림과 소설에 대한 의견뿐 아니라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의 차이가 섞여 있다. 어린 시절의 친밀함만으로 그 차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세잔 역의 기욤 갈리엔느와 졸라 역의 기욤 카네는 친구이면서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두 사람을 맡는다. 영화는 성인이 된 이들의 만남 사이에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을 끼워 넣는다. 지금의 말다툼을 듣다가 함께 어울리던 때로 돌아가면, 저 사람과 왜 계속 만나는지 이해할 시간이 생긴다.
톰슨은 두 사람이 대화할 때마다 과거가 떠오르는 구성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관계를 처음부터 차례로 따라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어긋난 말을 들은 뒤, 한때는 같은 꿈을 이야기하던 모습을 본다. 다투는 두 사람과 가까웠던 두 사람을 함께 알고 나면 한쪽 편을 드는 일도 쉽지 않다.
소설을 둘러싼 갈등에는 친밀함의 곤란한 점이 들어 있다. 친구는 함께 겪은 일뿐 아니라 내가 부끄러워하던 순간도 알고 있다. 그 기억이 작품에 쓰이면, 당사자는 허구의 인물에게서 자기를 찾아내기 쉽다. 영화 속 세잔에게 소설은 남의 작품인 동시에 자신을 향한 평가처럼 다가온다.
이때 상처는 내용이 사실과 얼마나 같은지만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이름과 사정이 달라도 자기와 닮은 실패를 읽으며, 친구가 내 미래까지 포기한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잔이 알고 싶은 것은 소설의 재료가 어디서 왔느냐에 그치지 않는다. 그 글을 쓴 사람이 지금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걸려 있다.
졸라의 자리에서도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과 나눈 시간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풍부한 재료가 된다. 그러나 그 시간을 작품에 옮길 권리와, 함께 시간을 보낸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는 어긋날 수 있다. 이 영화의 싸움은 한 사람이 기억을 작품으로 만들었을 때 다른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남는지 묻게 한다.
두 사람은 작업의 성과를 다르게 경험하고 있다. 졸라의 글에는 이미 독자의 호응이 따르지만, 세잔은 자기 그림이 언제 인정받을지 알 수 없다. 지금의 성과를 놓고 나눈 말이 앞으로 가능할 일까지 단정하는 말로 들릴 위험이 있다. 친구의 현재를 잘 아는 것과 그가 무엇이 될지 아는 것은 다른 일이다.
영화 속 대립을 실제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톰슨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메당의 재회를 자신이 상상했다고 밝혔다. 소설을 계기로 친구가 완전히 갈라섰다는 오래된 설명에도 다시 살필 여지가 있다. 세잔은 《작품》 출간 다음 해인 1887년에도 졸라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 소설을 보내줘 고맙다고 하고, 돌아오면 찾아가겠다는 뜻을 적었다.
그 편지가 실제 만남의 대화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소설 한 권으로 관계가 곧바로 끝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진다. 톰슨의 영화는 남아 있는 기록 사이에 대화와 기억을 채워 넣은 이야기다. 친구의 삶을 소설로 옮기는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다시 그 두 친구의 삶을 상상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 상상을 가까이 느끼게 하는 것은 두 사람이 머문 장소다. 톰슨은 세잔이 그림을 그리던 비베뮈스의 야외와 졸라의 메당 집 정원에서 촬영했다. 화면의 빛을 세잔의 그림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인물들이 살던 시대의 여러 그림과 풍경을 참고했다고 했다. 화가가 서서 캔버스를 보는 자리와 작가가 손님을 맞는 정원은 서로 다른 생활의 크기를 보여준다.
친구의 일을 진심으로 응원해도, 그가 하는 작업을 끝까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영화의 두 사람에게도 함께한 시간과 지금 내리는 평가는 늘 일치하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이 관계를 붙들어주면서 동시에 상처를 더 깊게 하는 과정을 볼 만하다. 상대를 잘 안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아직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을 좁혀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된다.

성공 전후에 달라진 말
어릴 적의 세잔과 졸라,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다르다. 돈과 작품 이야기가 같은 대화에 들어올 때 조언을 주고받는 자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들어보자. 도움을 주는 마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부담을 함께 볼 수 있다.
말다툼 사이에 돌아오는 과거
영화는 성인이 된 두 사람의 만남에서 여러 시절로 건너간다. 막 들은 거친 말 뒤에 예전의 친밀함을 보게 될 때 그 인물의 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자. 회상은 경력을 설명하는 동시에 이 관계를 계속 붙들고 싶은 이유를 보여준다.
소설을 평가하는 말과 친구를 평가하는 말
《작품》을 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두 사람은 같은 대상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들어볼 만하다. 한쪽이 작품의 허구를 말할 때 다른 쪽은 자신의 삶을 읽고 있을 수 있다. 사실과 닮은 부분을 찾는 일에 더해, 무엇 때문에 그 닮음이 아픈지도 생각해보자.
그림 앞에 함께 선 두 사람
작업하는 화가 곁에 친구가 있을 때, 그 자리는 작품을 보여주는 자리이자 평가를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세잔과 졸라가 예술에 관해 말하는 장면에서 서로에게 어떤 답을 원하는지 주목해보자. 오랜 친분이 있어도 듣고 싶은 말이 같지는 않을 수 있다.
토니 에드만 (2016)
아버지가 바쁘게 일하는 딸의 직장 생활에 불쑥 끼어든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지금 내 생활을 이해하는가라는 문제가 부녀 사이에서 벌어진다. 가까운 사람의 관심과 간섭을 가르는 선이 어디인지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프로페서 앤 매드맨 (2019)
사전 편찬에 힘을 모으게 된 두 남자의 관계를 그린다. 글을 향한 몰두가 이들을 연결하지만, 각자 살아온 사정까지 쉽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세잔과 졸라의 오래된 우정과 나란히 두면 작업을 이해하는 일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어떻게 얽히는지 볼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