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섬에 도착한다. 의뢰는 결혼을 앞둔 여자의 초상을 그리는 일인데, 조건이 하나 붙는다.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아서는 안 된다. 낮에는 산책 상대인 척 곁을 걷고…
화가가 섬에 도착한다. 의뢰는 결혼을 앞둔 여자의 초상을 그리는 일인데, 조건이 하나 붙는다.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아서는 안 된다. 낮에는 산책 상대인 척 곁을 걷고 밤에는 기억만으로 캔버스를 채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에게 얼굴을 본다는 것은, 나중에 다시 그릴 수 있을 만큼 자세히 알아두는 일이다.
화가가 살펴야 할 얼굴을 영화는 어떻게 보여줄까. 촬영감독 클레르 마통은 두 여자의 피부에 닿는 빛을 세심하게 골랐다. 시대극의 촛불도 얼굴과 그림의 색을 모두 붉게 덮어버려서는 곤란했다. 누구의 얼굴을 보여줄지에 더해, 그 얼굴에서 무엇을 볼 수 있게 할지가 촬영의 문제였다.
노에미 메를랑이 연기하는 마리안느는 아델 에넬이 맡은 엘로이즈의 얼굴을 눈에 담는다. 그러나 얼굴을 기억하는 일과 그 기억을 그림으로 옮기는 일은 다르다. 영화에는 화가의 눈뿐 아니라 손도 필요하다. 셀린 시아마는 실제 화가 엘렌 델메르와 함께 그림을 준비했고, 메를랑은 델메르의 작업을 보며 화가의 움직임을 살폈다.
시아마는 그림이 한순간에 완성된 모습으로 바뀌는 장면을 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제작 단계를 디졸브로 이어붙이는 대신, 붓이 움직이며 그림에 무엇을 더하는지 보이게 하려 했다. 초상화는 인물의 마음을 설명하는 상징이기에 앞서 누군가 손을 써서 만드는 물건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알아가는 과정 옆에, 화면 속 그림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놓인다.
그 그림의 화풍도 미리 정해진 답은 아니었다. 감독과 촬영감독, 화가는 박물관을 다니며 마리안느가 어떤 그림을 그릴 사람인지 함께 찾았다. 특정 화가의 작품 하나를 그대로 영화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영화에 나오는 초상화와 그것을 그리는 사람의 얼굴이 서로 어울리도록, 회화와 촬영을 함께 준비한 것이다.

마통은 밤 장면을 준비하며 불빛의 따뜻함과 색의 구별을 함께 생각했다. 촛불이 켜져 있다는 이유로 피부와 그림의 색을 전부 같은 주황빛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 촬영에서는 촛불에 LED 등의 조명을 섞었고, 빛이 지나치게 깜박이지 않도록 조절했다. 화면에 보이는 불꽃과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빛이 꼭 같은 광원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한 얼굴의 빛은 한쪽에서 세게 내리쬐는 빛보다 피부를 부드럽게 감싸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얼굴을 납작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마통은 얼굴의 형태를 남기면서 빛이 어디서 오는지 쉽게 드러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화가가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 영화에서, 빛은 눈길을 끄는 효과가 되기보다 얼굴을 볼 여유를 마련한다.
작업실의 낮 장면에도 인공조명이 쓰였다. 촬영은 늦가을에 이루어졌고, 실제로 그 방의 창문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통은 창문 바깥에 조명을 놓아 실내의 빛을 만들었다. 오래된 장소와 창문이 주는 인상은 살리되, 인물이 그림을 그리고 상대를 바라볼 수 있는 밝기는 별도로 준비해야 했다.

이 영화의 그림과 얼굴을 찬찬히 보면, 아름다운 장면이 완성된 결과로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화가는 보고 기억한 것을 손으로 옮기고, 그림을 그리는 배우의 얼굴에는 다시 빛이 필요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면 그 얼굴을 실제로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함께 볼 수 있다.
◆ 완성된 그림보다 그리는 과정 — 캔버스가 보일 때 결과만 확인하지 말고, 손이 움직이면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살펴보자. 시아마가 작업 단계를 빠르게 건너뛰지 않으려 한 이유와 연결된다. 얼굴을 알아보는 일에도, 알아본 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일에도 시간이 든다. 마리안느가 관찰하는 사람인 동시에 일을 하는 화가라는 점을 놓치지 않게 한다.
◆ 촛불 옆 얼굴과 옷의 색 — 밤 장면에서 불꽃만 보지 말고 가까이 있는 피부와 천, 그림의 색을 함께 살펴볼 만하다. 불빛의 따뜻함 속에서도 각각의 색을 남겨두려 했던 촬영 선택이 있다. 얼굴을 밝게 보여주는 것과 모든 것을 똑같이 밝히는 것은 다르다. 주변의 어둠을 남기면서 두 사람의 얼굴을 얼마나 알아볼 수 있게 하는지에 관심을 두자.
◆ 창가와 방 안의 밝기 — 작업실에서는 창문과 인물이 함께 놓인 구도를 살펴보자. 실제 장소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창밖에 조명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화면이 자연스럽다는 인상과 자연광 촬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창가에서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얼굴과 캔버스가 어떻게 보이는지 살피면, 인물의 작업 공간도 더 자세히 눈에 들어온다.
◆ 말이 멈춘 동안 들리는 것 — 대사가 잠시 끊겨도 장면이 비는 것은 아니다. 바닷가나 집 안에서 인물이 움직일 때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보자. 시아마는 음악을 장면 밖에서 계속 덧씌우기보다 인물들이 실제로 음악과 만나는 순간에 두려 했다.
◆ 프렌치 수프 (2023, 트란 안 훙) — 요리사 외제니와 미식가 도댕은 오랫동안 함께 음식을 만들고 사랑해왔다. 손으로 하는 일과 두 사람의 관계를 함께 따라갈 수 있다. 그림이 완성된 뒤의 의미만 보지 않듯, 차려진 요리와 그 요리를 준비하는 사람을 나누어 살펴볼 만하다.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2003, 피터 웨버) — 베르메르의 집에 들어온 하녀 그리트는 빛과 색을 이해하며 화가의 작업에 관여한다. 그림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를 상상한 극영화다. 그림을 보는 감각이 한 사람의 일을 바꾸고, 그 일이 두 사람의 관계를 바꾸는 과정을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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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