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소에서 기우(정일우)가 낯선 사람에게 2만 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기대하며 아빠 쪽으로 다가온다. 이런 일이 기우네 가족에…
휴게소에서 기우(정일우)가 낯선 사람에게 2만 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기대하며 아빠 쪽으로 다가온다. 이런 일이 기우네 가족에게는 일상이다. 임신한 아내 지숙(김슬기), 어린 두 아이와 함께 텐트에서 자고 휴게소를 옮겨 다니며 살아간다. 그러다 돈을 빌려줬던 영선(라미란)을 다른 휴게소에서 다시 만난다. 잠시 곤란해진 가족을 도왔다고 생각했던 영선 앞에 그들의 생활이 드러난다.
기우가 먼저 부탁하고 아이들이 뒤따르는 순서는 정일우가 바꾸자고 제안한 것이다. 처음 시나리오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돈을 빌리러 갔다. 배우는 기우가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아빠이기를 바랐다. 아이들을 앞세워 동정을 얻는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도록, 그와 아이들이 움직이는 이유를 나눈 셈이다. 물론 아이들의 끼니가 아빠의 거짓말에 달려 있다는 처지는 그대로다.
기우에게는 이 생활을 설명하는 나름의 믿음도 있다. 화장실에서 세수하다 명함을 찾는 장면을 보면, 그는 돈을 빌린 사람들의 연락처를 갖고 있다. 정일우는 기우가 언젠가 돈을 갚을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명함은 아무도 다시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예상과 어긋난다. 실제로는 갚을 길이 막막해도, 자신이 받은 돈을 여전히 빌린 돈으로 여기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만난 영선이 경찰에 신고했을 때도 기우는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느낀다. 돈을 주고받은 일을 두 사람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정일우의 연기에서 살펴볼 것은 큰 감정이 터지는 순간만이 아니다. 기우가 돈을 부탁하다 예상 못 한 질문을 받으면 배를 긁는 동작도 배우가 넣었다. 반복해온 부탁이라고 해서 매번 능숙하게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짧은 몸짓으로도 그의 불안이 새어나온다.

영선의 신고로 기우가 구속되자 지숙과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영선은 이들을 자신이 운영하는 중고가구점으로 데려온다. 돈을 한 번 건네고 돌아서는 것보다 오래 책임져야 하는 만남이 시작된다. 기우에게 일상을 무너뜨린 사람이, 남은 가족에게는 머물 곳을 내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상문 감독의 〈고속도로 가족〉은 이때부터 기우가 가족의 행복이라고 믿어온 생활을 아내와 아이들도 원하는지 묻게 한다.
지숙은 자기 생각을 크게 말하는 인물이 아니다. 김슬기는 대사가 적은데도 거의 모든 화면에 지숙이 있어, 배경으로만 남지 않는 것이 연기의 과제였다고 했다. 기우가 돈을 구하고 앞장서 움직이는 동안 곁에 있던 사람에게도 판단이 쌓인다. 영선을 만난 뒤 지숙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쪽으로 선택한다. 김슬기는 이를 남편을 미워하게 된 결과로 보지 않았다. 기우를 사랑하면서도 아이들을 더 보호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해했다. 남편의 뜻을 따르지 않는 행동에 곧바로 애정이 식었다는 이유를 붙일 수 없는 까닭이다.
기우는 타인을 믿었다가 다시 다칠 것을 두려워한다. 정일우가 먹는 연기에 두려움을 담으려 한 것도 이 인물을 이해할 단서다. 휴게소 음식부터 개밥까지 먹는 음식이 바뀌는 동안, 배우는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를 달리하려 했다. 배고픔을 채우고 웃을 때조차 불안이 남는 사람으로 연기한 것이다. 가족을 곁에 두려는 절박함이 큰 만큼, 그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아갈 가능성은 기우에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된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아빠를 따라가면 먹을 것이 생겼다. 이제는 아빠가 바라는 대로 다시 떠나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선택인지 지숙이 결정해야 한다. 먹이고 싶어 했던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되었기에,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선택도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이 가족을 보고 있으면 누가 가족을 더 사랑하는지보다, 각자의 사랑이 아이들에게 어떤 생활을 주는지 궁금해진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