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내민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델은 이목구비가 닮았는지만 따지지 않는다. 자신을 보고 그린 게 맞는지 화가에게 묻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쪽…
화가가 내민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델은 이목구비가 닮았는지만 따지지 않는다. 자신을 보고 그린 게 맞는지 화가에게 묻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쪽은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다. 상대를 몰래 관찰하며 그림을 완성한 마리안느는 그 질문 앞에서 곤란해진다. 오래 쳐다보았다고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화가가 모델의 말을 듣기 시작할 때, 두 사람의 얼굴도 달리 보인다.
1770년, 브르타뉴의 외딴 저택에 화가 마리안느가 도착한다. 그녀가 맡은 일은 엘로이즈의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정작 엘로이즈는 모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마리안느는 산책을 함께할 사람으로 소개받고, 함께 걷는 동안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가 남몰래 그림을 그린다. 가까이 지내기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한쪽만 알고 있는 일이 있다.
마리안느에게는 의뢰받은 그림을 끝내야 할 사정이 있다. 그러나 그 일을 잘 해내는 것이 모델에게도 반가운 결과인지는 다른 문제다. 엘로이즈가 초상화 앞에 서면, 보는 사람도 그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화가의 실력을 보여주는 그림이 당사자에게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준비하는 물건일 수 있다. 아름답게 그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만이 그림 앞에 남는다.
노에미 메를랑의 마리안느와 아델 에넬의 엘로이즈를 한쪽은 그리는 사람, 다른 쪽은 그려지는 사람으로 나누어 보고 있었다면 이 대화가 걸린다. 엘로이즈는 자신의 모습에 관해 판단하고, 마리안느가 한 일을 평가할 수 있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따랐던 회화의 관습을 설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모델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두 사람이 함께 새 그림에 착수한다고 결혼을 둘러싼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작업하는 동안 서로에게 허락하는 일이다. 몰래 얼굴을 훔쳐보던 화가는 모델 앞에서 붓을 들고, 모델은 화가의 일을 지켜본다. 그림에 들어갈 얼굴을 둘이 함께 생각하게 된다.

얼굴을 그리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화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모델의 자리에서 그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화가의 얼굴을 보게 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버릇을 알아차리는 동안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를 관찰한다. 상대를 유심히 보았다는 사실이 두 사람 사이에서 들통난다. 직업상 필요한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시간이 조금 민망해지는 대목이다.
셀린 시아마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여자를 가리키는 ‘뮤즈’라는 말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말로 설명하고 나면 모델이 작업에 보탠 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마음대로 읽어낼 아름다운 얼굴에 머물지 않는다. 화가의 말을 듣고, 반박하고, 자신이 보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돌려준다. 사랑하는 얼굴을 그리는 일에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그림의 변화로도 확인할 수 있다. 화면 속 유화를 그린 화가 엘렌 델메르의 작업을 바탕으로, 영화는 붓이 닿고 그림이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완성된 초상화만 내보이면 보이지 않을 수고다. 같은 얼굴을 여러 번 본 뒤에도 다시 고쳐야 하는 부분이 남는다. 상대를 알아가는 일 역시 처음의 인상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두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는 사랑을 확인하는 즐거움과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긴장이 함께 있다. 눈앞의 사람이 그저 내가 기대하던 모습이라면, 그의 다음 말이 궁금할 이유도 줄어들 것이다. 엘로이즈가 말을 시작할 때 마리안느가 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점이 이 연애를 흥미롭게 만든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하녀 소피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함께 읽는다. 죽은 연인을 데리고 나오던 오르페우스는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겨 연인을 잃는 이야기는 이미 알려져 있다. 세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결말에 도착하기 직전의 선택이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돌아보라고 했을 가능성을 내놓는다. 기다리거나 잃어버려지는 사람으로 읽던 인물에게 할 말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생각을 영화 전체를 푸는 정답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두 연인이 같은 이야기를 읽고도 서로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낸다는 점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얼굴뿐 아니라 생각에도 관심을 갖는 시간을, 영화는 서둘러 연애 장면으로 넘기지 않는다.
이 대화에 소피가 함께 있다는 점도 눈에 들어온다. 루아나 바이라미가 연기하는 소피에게는 두 연인의 관계와 별도로 살아내야 할 자신의 일이 있다. 저택에서 세 여자가 보내는 시간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일을 거들던 사람이 자신의 걱정을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기는 것이 반갑다. 연인 둘만 남아야 친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듣는 시간은 또 다르다. 이 영화에는 감정이 고조될 때마다 관객을 이끌어주는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음악이 들리면 등장인물 역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자주 들을 수 없었던 곡이 한 번의 만남과 이어질 수 있고, 함께 들은 소리를 혼자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이야기를 읽을 때처럼, 사랑하는 동안 들은 것에도 그 사람과 보낸 시간이 남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잘 안다는 확신은 편안하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말을 할지 안다고 생각하면 굳이 다시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이 영화의 연인들은 서로를 알아가면서도 상대의 말에 놀랄 여지를 남긴다. 그림을 거절하는 말이나 신화를 달리 읽는 의견이 두 사람을 멀어지게만 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얼굴과 풍경은 이 영화를 보는 큰 즐거움이다. 그 얼굴의 주인이 말을 시작한 뒤에는 아름다움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더해진다. 보고 싶은 모습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모르는 생각을 듣고 싶어지는 마음. 초상화를 둘러싼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면 사랑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만큼 자세하게 볼 수 있다.
① 첫 그림을 보는 엘로이즈
그림이 얼마나 잘 그려졌는지 판단하기 전에, 그 그림이 누구에게 필요한지 생각해 보면 좋다. 의뢰를 끝내려는 화가와 결혼을 앞둔 모델에게는 서로 다른 사정이 있다. 엘로이즈의 불만을 단순히 까다로운 취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두 사람의 대화가 더 분명해진다.
② 모델 앞에 앉은 화가
마리안느가 얼굴을 관찰하는 동안 엘로이즈에게 보이는 것도 있다. 화가의 얼굴과 버릇이다. 서로가 자신을 얼마나 유심히 보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대목에서는, 일을 위해 바라본다는 설명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관심을 찾아볼 수 있다.
③ 신화에 끼어드는 세 번째 사람
같은 이야기를 읽는다고 같은 인물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아니다. 세 여자가 누구의 선택을 궁금해하고 어떤 가능성을 더하는지 들어보자. 이 대화를 결말의 예고로만 읽으면, 연인이 된 두 사람 옆에서 소피도 자기 생각을 말하는 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④ 음악을 기다리는 귀
계속 음악을 듣다가 잠깐 조용해지는 영화와는 듣는 경험이 다르다. 음악이 드문 만큼 한 곡이 시작할 때 인물과 함께 귀를 기울이게 된다. 불붙은 드레스의 강렬한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그 순간 들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기억해 보자.
정말 먼 곳 (2020, 박근영)
조카를 키우며 살아가는 진우에게 연인과 쌍둥이 누이가 찾아온다. 조용히 꾸려온 생활이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부딪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무엇을 설명해야 하는지, 가족이라고 부르는 관계가 누구의 말을 받아들이는지 생각하게 한다.
코르사주 (2022, 마리 크로이처)
황후 엘리자베트에게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있다. 그 모습을 유지하는 일이 하루의 행동까지 제한한다. 초상화 앞에서 자신의 모습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는 엘로이즈가 기억에 남았다면, 아름다운 황후의 역할을 계속 수행해야 하는 인물의 피로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프렌치 수프 (2023, 트란 안 훙)
오랫동안 함께 요리한 외제니와 도댕은 서로의 솜씨를 알고 사랑하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함께 잘해 온 일이 있다고 같은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사이에 두고 가까워진 두 여자 다음으로, 요리를 함께하는 연인의 다른 속도를 볼 만하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