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차림의 여자가 방귀를 뀌면 | MovieLAB LAB

배우 엘리즈가 마릴린 먼로 차림으로 친구 집에 나타난다. 하지만 〈발코니의 여자들〉은 그 모습을 우아하게만 보존해주지 않는다. 엘리즈는 방귀도 뀐다.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여자…

마릴린 먼로 차림의 여자가 방귀를 뀌면 | MovieLAB LAB

배우 엘리즈가 마릴린 먼로 차림으로 친구 집에 나타난다. 하지만 〈발코니의 여자들〉은 그 모습을 우아하게만 보존해주지 않는다. 엘리즈는 방귀도 뀐다.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여자처럼 계속 굴 필요는 없다는 듯이. 엘리즈를 직접 연기한 감독 노에미 메를랑이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던 자유에는, 멋지지 않은 모습으로 함께 있어도 괜찮다는 안심이 들어 있다.

친구 집에서는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영화의 배경은 폭염에 휩싸인 마르세유다. 작가 지망생 니콜, 온라인 성인 방송을 하는 루비, 배우 엘리즈가 함께 있고, 발코니에서는 맞은편의 매력적인 남자를 구경한다. 니콜은 산다 코드리누, 루비는 수에일라 야쿠브가 연기한다. 이 세 사람은 이름표를 떼면 구별하기 어려운 단짝들이 아니다. 남을 대하는 태도도, 자기 몸으로 하는 일도 다르다.

메를랑은 실제로 친구들의 집에서 지낸 경험을 영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누구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긴장을 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집은 밖에서 받는 시선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경험을 알고 보면 엘리즈의 먼로 차림도 단순한 유명 배우 흉내를 넘어선다. 근사한 모습으로 등장한 여자가 친구들 앞에서까지 그 모습을 유지해야 하느냐는 장난이 된다.

방귀를 뀌는 몸은 이미지로만 남아 있기 어렵다. 엘리즈를 매혹적인 차림으로 등장시키고도 그런 우스운 행동을 허용하는 데 이 영화의 취향이 있다. 메를랑은 여성을 늘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아름답게 찍는 일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의 다른 모습을 지우지 않겠다는 쪽에 가깝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웃긴 모습도, 긴장한 모습도 함께 있을 수 있다.

푸른 하늘 아래 세 여자가 몸을 기울여 아래쪽을 바라본다. 가운데 여자의 얼굴에는 은색 장식이 붙어 있다.

창을 보는 카메라가 돌아설 때

발코니에서는 남의 집이 보인다. 동시에 맞은편에서도 이 집을 볼 수 있다. 메를랑은 첫머리에서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출발했다가, 카메라를 돌려 여자가 맞은편 남자를 보는 쪽으로 옮겼다고 설명한다. 누가 보는 사람인지 고정해두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이 여자라는 정보보다 카메라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더 유용하다.

그렇다고 남자를 구경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관계가 뒤집히지는 않는다. 창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에 들어가 상대의 요구를 듣는 것은 다른 일이다. 멀리 있을 때는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던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역시 원하는 것이 있고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있다. 발코니는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쉬운 자리다. 하지만 마주 서는 순간에는 그때까지의 구경만으로 알 수 없었던 문제가 생긴다.

루카스 브라보가 연기하는 맞은편 남자의 직업은 사진가다. 그는 남을 보고 이미지로 만드는 일에 익숙하다. 영화가 바라보는 쪽과 보이는 쪽을 오가다가 사진가를 만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누군가를 멋지게 찍어준다는 말은 친절처럼 들릴 수 있지만, 카메라 앞의 사람이 어디까지 허락했는지를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발코니에서의 구경이 사진 촬영으로 이어지면, 보는 행위에는 상대의 동의와 선택이라는 조건이 더 또렷하게 붙는다.

루비의 말을 믿는 카메라

이 절은 중반부의 사건과 연출을 다룹니다.

영화는 루비가 당하는 성폭력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메를랑은 그 일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고 루비의 말을 믿도록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반면 엘리즈가 남편에게 당하는 성폭력은 화면에 남긴다. 부부 사이라는 이유로 잘 드러나지 않는 폭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같은 문제를 다룬다고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찍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선택이다.

루비가 평소 자신의 몸과 욕망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은 피해의 진위를 가를 근거가 아니다. 영화도 그가 조심스럽고 얌전한 여자로 바뀐 뒤에야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친구들은 루비를 믿고 곁에 남는다. 관객에게 폭력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나서 그 믿음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보여주는 이미지가 없더라도, 한 사람이 겪었다고 말하는 일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이 선택은 성폭력을 전부 화면 밖에 두는 원칙과도 다르다. 엘리즈가 겪는 일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익숙한 관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드러낼지의 기준이 충격의 세기만으로 정해지지 않는 셈이다. 메를랑은 웃기고 거친 영화를 만들면서도, 피해를 어떤 방식으로 찍을지에서는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린다. 코미디와 호러를 섞는다는 장르 설명보다 이 구분이 연출을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빨래가 널린 발코니에서 두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왼쪽은 푸른 꽃무늬 상의, 오른쪽은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

다투게 만들지 않고도 이야기는 갈 수 있다

세 여자의 우정에는 이 제작 태도가 이어진다. 한 사람의 말이 의심받고 나머지가 갈라서야만 사건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서로의 편으로 남은 채 어떤 행동을 하느냐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루비를 믿는 순간이 갈등을 끝내는 마침표가 아니라, 함께 다음 일을 감당하는 출발점이 된다.

니콜은 글을 쓰는 인물이며, 익숙한 이야기의 방식을 그대로 따를 것인지 고민한다. 그를 읽는 단서로 공동 집필에 참여한 셀린 시아마와의 작업을 떠올릴 수 있다. 메를랑은 시아마가 자기 취향을 덮어쓰기보다 선택하기 어려운 부분을 함께 정리해줬다고 설명했다. 함께 글을 썼다고 영화의 코미디와 엉뚱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는 것이 내 이야기를 그 사람 방식으로 바꾼다는 뜻일 필요도 없다.

서로 다른 세 친구를 한목소리로 만들지 않는 일도 그와 닮았다. 니콜은 글을 쓰고, 루비는 자기 몸으로 표현하고, 엘리즈는 배역을 연기한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어떻게 드러낼지 사이에 각자의 문제가 있다.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똑같은 성격보다 상대의 말을 들을 여지가 있는 관계다. 먼로 차림의 친구가 방귀를 뀌어도 되는 집에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도 혼자 두지 않는 관계로 영화가 나아간다.

지금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밝은 색과 거침없는 농담으로 여는 영화가 어느 순간 무엇을 보여줄지 신중하게 고른다. 엘리즈의 우스운 몸짓과 친구를 대하는 진지함이 한 편 안에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웃음을 멈춰야만 서로의 사정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 여자가 어떤 모습으로 함께 있어도 되는지,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따라가볼 만하다.

감상 포인트

엘리즈의 먼로 차림 — 화려한 차림으로 나타난 엘리즈가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자. 겉모습이 약속하는 우아함과 몸이 실제로 하는 일 사이에 웃음이 생긴다. 그 웃음이 인물을 망신주는지, 잘 보이려 애쓰던 몸을 편하게 해주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바라보는 쪽으로 돌아서는 카메라 — 초반의 창과 발코니에서 누구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는지 살펴보자. 여자가 보이는 장면과 그 여자가 남자를 보는 장면은 역할이 다르다. 카메라가 한쪽의 구경에만 머무르지 않으면서 인물을 대하는 거리가 달라진다.

루비 곁에 있는 친구들 — 루비가 어떤 일을 겪었다고 말할 때 니콜과 엘리즈가 어떻게 대하는지 눈여겨보자. 친구의 편을 드는 일은 단지 다정한 성격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믿는 사람들이 함께 다음 일을 맞는 방식이 영화의 진행을 만든다.

글을 쓰는 니콜 — 니콜이 자기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할지 고민하는 대목을 보자. 익숙한 규칙을 따르면 글이 쉬워질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는 별개다. 영화 자체의 엉뚱한 전개와 니콜의 고민을 함께 놓고 볼 수 있다.

관련 작품

〈이창〉 (1954, 알프레드 히치콕) — 다리를 다친 사진가가 집 안에서 창 너머 이웃들을 지켜본다. 두 영화의 창은 남의 생활을 바라보는 자리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며, 바라보는 동안 무엇을 모르는지는 서로 다르게 드러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셀린 시아마) — 노에미 메를랑이 다른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연기했다. 몰래 관찰하며 시작한 그림과 관계를 함께 놓고 보면, 한 사람을 이미지로 만드는 일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두 영화가 다른 방식으로 묻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