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설계 프로그램으로 동아리방을 만들고, 화면 속 그 방에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게 했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남궁선이 들려준 기억이다. 카메라를 움직일 수 있는 프로그…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으로 동아리방을 만들고, 화면 속 그 방에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게 했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남궁선이 들려준 기억이다. 카메라를 움직일 수 있는 프로그램의 기능으로 건물 속 사람들의 한때를 연출하고 있었다. 설계한 공간에 들어간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궁금했던 학생은, 임신한 개발자가 의사에게 따지고 은퇴한 아이돌이 뒤늦게 수학여행을 떠나는 영화를 만들었다.
십개월의 미래에서 미래는 예상하지 못한 임신을 맞는다. 개발자인 그녀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방법이 가능한지 알고 싶다. 남궁선은 의사에게 질문하는 미래를 연기할 때 최성은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손님 같은 태도를 주문했다. 경건해지거나 얌전히 설명을 듣기 전에, 납득이 안 되는 것부터 물어보는 사람이다.
이 연기 주문에는 인물을 보는 감독의 생각이 담겨 있다. 미래에게 임신은 오류를 찾아 바로잡던 평소의 방식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성격까지 단번에 바뀔 수는 없다. 따져 묻는 태도가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답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절실하다. 감독은 임신한 인물에게 곧바로 어머니의 표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남궁선 자신도 임신했을 때 그런 간격을 느꼈다. 자신은 여전히 같은 사람인데 주변에서는 ‘엄마’라는 틀로 보기 시작했다. 이 경험은 영화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미래가 감독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인물인 것은 아니다. 남궁선은 자신의 이야기를 옮긴 자전적 영화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직접 겪은 감정을 바탕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상상한 것이다.
최성은에게서 찾은 것도 미리 완성된 어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 같기도, 어른 같기도 한 얼굴이 필요했다. 미래의 당혹감을 준비가 부족했던 한 사람의 문제로만 보면,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빨리 답을 요구하는지 놓치기 쉽다. 몸에는 이미 변화가 시작됐는데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영화는 그 두 시간이 맞지 않는 불편함을 따라간다.

힘을 낼 시간에서는 아이돌 생활을 마친 세 친구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다. 남궁선은 청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 아주 열심히 살았는데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아이돌 일을 그만둔 이들을 취재하면서는 학창 시절의 기억이 학교와 집, 소속사를 오가는 일에 치우쳐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매니저가 정해준 일정대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스스로 떠나는 여행을 구상한 이유다.
그러니 이 여행이 뒤늦은 수학여행이라는 설정은 단지 귀여운 장식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을 고르는 평범한 경험도 누구에게나 같은 시기에 찾아오지는 않는다. 이미 일해 본 어른들이 처음 해보는 일을 앞에 두고 있다. 사회생활을 오래 했으니 자기 생활도 능숙하게 꾸리리라는 기대가 이들 앞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남궁선은 이들의 아이돌 시절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일을 떠난 뒤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건을 다시 보여주는 데에는 당사자의 상처를 건드리거나 특정 인물을 떠올리게 할 우려도 있었다.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쪽을 택했다. 은퇴는 이 영화에서 사람을 다 설명하는 말이 되지 못한다.
여행하다 돈이 필요해진 세 사람이 귤을 따는 일에도 그런 관심이 이어진다. 남궁선이 이 일을 고른 이유에는 몸을 반복해서 움직이는 동안 고민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 있다. 문제를 해결할 멋진 대화가 떠오르지 않아도 손을 움직이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인물들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나 말로 깨닫게 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이 인물들의 사정만 요약하면 영화도 줄곧 심각할 것 같다. 그러나 미래의 질문에는 곤란한 상황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고집이 있고, 세 친구의 여행에는 지나고 나면 웃을 법한 시행착오가 있다. 남궁선은 사람의 불완전함을 바라볼 때 유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곤경에 빠졌다고 그 사람의 엉뚱함과 취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025년의 고백의 역사는 짝사랑하는 남학생에게 고백하기 위해 곱슬머리부터 펴려는 열아홉 살 세리의 이야기다. 임신이나 은퇴와는 전혀 다른 사정이지만, 당사자에게는 머리카락 하나도 아주 큰 일이다. 이 조건만 갖추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남궁선의 영화를 함께 볼 때 흥미로운 것은 이 불균형이다. 밖에서 보면 사소하거나 서툰 선택이 그 사람에게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인물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여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대처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여행 중인 친구가 조금 더 먼저 속마음을 말해주었으면 싶을 수도 있다. 남궁선은 그런 반응을 없애기보다, 곧바로 사람을 판단하고 넘어가지 않을 만큼 사정을 보탠다. 왜 그렇게 했는지 듣는 동안 처음의 답답함이 조금 다른 감정으로 바뀔 여지가 생긴다.
설계한 동아리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는 기억은 지금의 작업과 잘 어울린다. 임신을 했거나 일을 그만뒀다는 설명을 들은 뒤에도 궁금한 것이 남는다. 그 사람은 무엇을 물어보고, 누구와 함께 있고 싶고, 오늘 무슨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주변 사람에게 새로운 일이 생기면, 그 일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말을 먼저 건네기 쉽다. 임신 소식에는 축하를, 일을 그만둔 사람에게는 다음 계획에 관한 질문을 한다. 당사자에게는 그 말에 대답하기 전에 자기 마음부터 확인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남궁선의 인물들은 그 대답이 늦어지는 동안에도 계속 살아간다.
연출가를 알아가는 재미는 이런 관심이 실제로 어떤 선택을 낳는지 보는 데 있다. 임신한 개발자의 질문을 까다롭게 만들고, 무대에서 내려온 아이돌을 여행지에 세우고, 머리카락을 펴겠다는 소녀의 계획을 진지하게 따라간다. 크게 보이는 사건만으로는 한 사람의 하루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① 미래가 의사에게 묻는 방식
답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 어떤 질문을 이어가는지 들어보자. 불만을 제기하는 손님처럼 연기해 달라는 주문을 알고 보면, 장면의 웃음과 미래의 절박함이 함께 보인다. 임신했다는 사실만으로 성격까지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는 인물이다.
② 같은 배우가 맞는 다른 변화
최성은은 미래에 이어 힘을 낼 시간의 수민을 연기했다. 한 사람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고, 다른 사람에게는 오래 해온 일이 끝난 뒤의 시간이 찾아온다. 두 역할을 곧바로 ‘성장한 여성’으로 묶기 전에, 각각 무엇을 정하기 어려워하는지 살펴볼 만하다.
③ 여행 도중 시작하는 일
세 친구가 귤을 따는 장면에서는 이 노동이 여행을 방해하는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따라가 보자. 반복해서 몸을 움직일 때와 서로 말을 나눌 때 인물들이 보내는 시간이 다르다. 말로 위로받는 장면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④ 남에게는 작은 계획
고백의 역사에서 세리에게 머리카락을 펴는 일이 왜 중요한지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이 쉽게 웃어넘길 수 있는 고민도 당사자의 다음 행동을 막을 수 있다. 인물의 계획이 우스워 보일 때 감독이 그 계획을 얼마나 진지하게 따라가는지도 재미있는 관찰 대상이다.
정말 먼 곳 (2020, 박근영)
조카와 함께 살던 진우에게 연인과 쌍둥이 누이가 찾아온다. 익숙하게 유지하던 생활에 다른 사람이 바라는 삶이 들어선다. 이미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이에서도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같지는 않다는 점에서 미래가 만나는 기대들과 이어 볼 만하다.
홈리스 (2020, 임승현)
어린 부부는 아기를 돌보며 일하지만 머물 집을 구하기 어렵다. 찜질방을 전전하던 이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서 사정은 더 복잡해진다. 부모가 되었다는 이름과 실제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생활 사이에 무엇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묻는다.
태어나길 잘했어 (2020, 최진영)
어른이 된 춘희 앞에 어린 시절의 자신이 나타난다. 세월이 지났다고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닌 자기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겪은 일을 잘 정리해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야기를 시작할 방법이 있다는 점이 반갑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