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레즈비언 바의 ‘명우 형’을 소개합니다 | MovieLAB LAB

술집에 갔는데 주인이 자꾸 나물 반찬을 더 내어준다. 〈홈그라운드〉를 연출한 권아람 감독이 이태원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에서 만난 윤김명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손님들에게 ‘명우 형…

이태원 레즈비언 바의 ‘명우 형’을 소개합니다 | MovieLAB LAB

술집에 갔는데 주인이 자꾸 나물 반찬을 더 내어준다. 〈홈그라운드〉를 연출한 권아람 감독이 이태원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에서 만난 윤김명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손님들에게 ‘명우 형’으로 불리는 그는 농담을 잘하고 사람을 잘 챙긴다. 한편으로는 가게를 계속 열어둘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사장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 오래된 공간을 지킨다는 말은 매일의 장사와 돌봄이다.

한국 레즈비언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건과 이름이 많을 것 같다. 〈홈그라운드〉는 사람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명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금 레스보스를 찾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함께 모여 놀던 여성들도 만나게 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장소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영화에는 그곳을 찾아낸 기쁨을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가던 날

명우도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을 맞아주는 주인은 아니었다. 1974년, 열여덟 살의 그는 명동의 샤넬다방을 찾아갔다. 여성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들어설 때 무척 긴장했다고 회상한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쉽게 마음 놓고 앉아 있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현재의 명우를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면 재미있는 차이가 생긴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이 두려웠던 사람이 이제는 처음 온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레스보스를 찾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용기 있는 과거를 배우러만 오는 것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별다른 설명 없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이 공간의 귀한 역할이다.

레스보스가 문을 연 것은 1996년이다. 이후 장소와 운영의 사정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모일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는 남았다. 영화는 1970년대의 다방과 2000년대 청소년들이 모였던 신촌공원까지 거슬러 간다. 모두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각자가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놀았는지 듣는다. 역사가 세대별로 다른 취향과 기억을 갖게 된다.

사진에 남지 않은 춤을 다시 춘다

옛 공간의 자료가 넉넉하게 남아 있지는 않았다. 감독은 당시 언론이 여성 성소수자를 주로 사건·사고의 대상으로 기록했다는 문제와 마주했다. 샤넬다방을 찾았던 사람들에게는 즐거웠던 기억이 있는데, 남아 있는 사진에서는 단속을 당해 고개를 숙인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기록만 따라가면 그곳에서 왜 함께 놀고 싶었는지를 놓치기 쉽다.

그래서 영화에는 과거 공간을 재연한 장면이 들어간다. 옛날 자료화면으로 오해하기보다, 기록이 부족한 자리를 사람들의 기억과 새 촬영으로 채운 선택으로 보는 편이 좋다. 유행하던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몸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만남을 조금 더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누구와 가까워지고 싶었는지, 남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면 어떤 표정이었을지 돌아보게 되는 장면들이다.

이 방식은 당사자의 기억을 듣는 일의 의미도 드러낸다. 밖에서 보면 이름 없는 술집이나 공원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을 찾았던 사람에게는 처음 친구가 생긴 자리일 수도, 자기 마음을 말해도 괜찮았던 장소일 수도 있다. 같은 주소를 가리키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남는다. 영화는 그 주소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를 모은다.

늘 거기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촬영 기간에 닥친 코로나19는 레스보스에도 타격을 주었다. 손님이 줄면 가게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오랫동안 운영해온 사람이라고 해서 그 고비를 능숙하게 넘길 수만은 없다. 명우는 지치고 힘들어하고, 그의 씩씩함에 익숙했던 사람들도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고충을 듣게 된다.

이 대목에서 ‘명우 형’이라는 호칭이 더 다정하게 들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버틸 힘을 주는 사람에게도 기댈 곳이 필요하다. 가게가 문을 열어두는 동안 손님은 그곳을 언제든 돌아갈 자리로 기억할 수 있지만, 주인은 내일도 그 문을 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인상 안에 가려져 있던 그 수고까지 보여준다.

그래도 영화가 명우를 고생하는 사람으로만 기억하게 하지는 않는다. 함께 웃고 어울리는 장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만남을 심각한 사명처럼 설명하지 않아도, 다시 오고 싶은 이유를 그 얼굴들에서 찾을 수 있다. 〈홈그라운드〉를 보고 나면 역사 속 중요한 장소를 하나 알았다는 만족보다 명우 형의 안부가 더 궁금해진다. 좋은 다큐멘터리가 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관련 작품

◆ 〈후회하지 않아〉 (2006, 이송희일) —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터와 생활 조건 속에서 만나는지 담은 퀴어 멜로드라마다. 관계를 허용하거나 가로막는 환경까지 함께 보는 영화라는 점에서 이어진다.

◆ 〈수라〉 (2022, 황윤) — 사람들이 오랫동안 찾아가고 지켜온 갯벌을 기록한다. 한 장소의 가치는 밖에서 정해놓은 이름이나 용도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곳을 아는 사람들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된다는 점에서 두 다큐멘터리가 만난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