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안 해놓고 했다고 둘러대는 남편이 있다. 출장 간 아내에게 전화해서는 밤에도 아직 일하느냐고 묻는다. 연우(박병은)와 혜린(조시내)의 대화는 이렇게 사소한 거짓말과 서로…
설거지를 안 해놓고 했다고 둘러대는 남편이 있다. 출장 간 아내에게 전화해서는 밤에도 아직 일하느냐고 묻는다. 연우(박병은)와 혜린(조시내)의 대화는 이렇게 사소한 거짓말과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질문으로 어긋난다. 안슬기 감독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이 부부에게 한 가지씩 더 큰 비밀을 준다. 남편은 외계인이고, 아내는 정부 비밀요원이다.
시인인 연우는 공무원인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며 산다. 그가 만나는 세아(장소연)는 같은 외계인이며 텔레파시가 통하는 상대다. 혜린에게도 다른 남자가 있다. 상사인 한 실장(박선우)이다. 권태기를 겪던 부부의 외도는 혜린에게 내려진 첫 암살 지령과 얽힌다. 죽여야 할 대상이 세아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연인과 아내의 임무 대상이 같은 사람이 되자, 결혼생활의 갈등에 누군가의 생사가 걸린다.
외계인끼리의 텔레파시는 자막으로 표현된다. 감독은 촬영 당시 두 사람이 있는 화면을 나누고 자막을 쓰는 방식을 정했다며, 의사소통 수단을 단순하고 건조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지구인과 다른 존재임을 드러낼 수단은 필요하되, 기술을 과시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초능력으로 주고받는 말이 관객에게는 읽어야 할 문장으로 주어진다. 텔레파시라는 대담한 설정과 자막이라는 소박한 표현법이 나란히 놓인다.
암살 임무를 재촉하는 한 실장은 혜린의 상사이면서 연인이다. 그가 개입하면 직장 명령과 사적인 관계를 떼어놓기 어렵다. 길에서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을 때, 그는 떨어진 가방을 주우라며 상대에게 욕을 하고 다그친다. 감독은 이 인물로 사회를 지배하는 부당한 힘을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낯선 우주의 절대자 대신, 자기 뜻을 따르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타인의 목숨까지 좌우한다. 한 실장의 이런 행동은 비밀조직의 위협을 길에서 마주칠 법한 횡포로 알아보게 한다.
집과 일터의 생김새도 익숙하다. 감독은 아파트 단지를 택하고 보안국을 평범한 회사 사무실처럼 그려, 외계인과 비밀요원이라는 설정을 빼면 현실의 이야기가 되게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가 밝힌 편집의 방향은 후반으로 갈수록 속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총격전과 행진곡을 넣어 세상을 향해 맞서고 싶은 기분을 만들고자 했다. 설거지나 출장 전화를 두고 어긋나던 부부의 생활이 어떻게 거기까지 번져가는지, 익숙한 공간 안에서 갈등의 규모가 달라지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