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빛의 화해, 무르나우가 촬영한 가장 아름다운 용서 | MovieLAB LAB

아내는 남편에게서 달아나 전차에 오른다. 남편도 뒤따라 탄다.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함께 나들이를 즐기는 부부는 아니다. 조금 전 배 위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새벽빛의 화해, 무르나우가 촬영한 가장 아름다운 용서 | MovieLAB LAB

아내는 남편에게서 달아나 전차에 오른다. 남편도 뒤따라 탄다.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함께 나들이를 즐기는 부부는 아니다. 조금 전 배 위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도시로 향하는 전차는 두 사람을 같은 곳에 데려가면서도, 그 사이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싣고 간다.

F. 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 두 인간의 노래는 1927년 작품이다. 도시에서 온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농부가 아내를 죽일 계획까지 세웠다가 멈춘다. 그 뒤 부부가 도시에서 보내는 하루가 이어진다. 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지는 과정을 보면서도, 관객은 아내가 왜 남편을 피했는지 기억하게 된다.

갈 곳이 같아져도 두려움은 남는다

조지 오브라이언이 맡은 남편은 도시에서 온 여자와 만나고 있다. 마거릿 리빙스턴이 연기하는 이 여자는 아내를 물에 빠뜨리고 함께 도시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권한 뱃놀이는 그 계획을 숨기고 있다. 재닛 게이너의 아내는 남편과 외출한다는 생각으로 배에 오르지만, 관객은 이미 다른 의도를 알고 있다.

배 위에서 남편이 일어나 아내를 위협하면, 아내도 이 뱃놀이가 평범한 외출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아내가 몸을 움츠리는 순간에는 다가오는 남편의 몸이 위험 그 자체가 된다. 남편은 살인을 실행하지 못하고 다시 노를 젓는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무사히 뭍에 닿은 다음에도 그와 떨어져야 할 이유가 남는다.

전차의 이동을 따라 도시가 나타날 때도 이 순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변은 새로워지지만 아내는 아직 남편을 두려워한다. 카페에서 남편이 케이크를 내밀어도 아내의 울음은 터져 나온다. 함께 앉고 무언가를 건네는 행동만으로 조금 전 일이 지나간 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 장면에서 게이너의 연기는 관계의 속도를 가늠하게 한다. 남편은 뉘우치는 마음을 전하려 하지만, 아내는 눈앞의 남편이 여전히 무섭다. 남편이 무엇을 해주는가만큼 아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아야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다.

다른 부부의 결혼식 앞에서

길을 가던 두 사람은 결혼식을 보러 교회에 들어간다. 신랑에게 신부를 위험에서 지켜주라고 당부하는 말을 듣고 남편은 무너진다. 남편은 아내를 지켜주기는커녕 직접 해치려 했다. 결혼식에서 듣는 당부가 조금 전 자신의 행동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처음 결혼하는 다른 부부의 의식이 이미 결혼한 두 사람의 문제와 만나는 순간이다.

아내는 울먹이는 남편을 달랜다. 앞에서는 아내의 두려움을 달래려던 남편이 이제 위로를 받는 쪽이 된다. 남편을 피하던 아내가 그의 괴로움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의 몸짓을 보면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남편의 후회만이 아니라 그 후회를 받아들이는 아내의 마음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를 나온 두 사람은 도시 거리에서 서로에게 빠져든다. 화면은 그들을 한동안 전원 풍경 속에 있는 듯 보여준다. 두 사람은 여전히 차가 오가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겹쳐지는 전원 풍경은 주위의 소란을 잊고 서로만 바라보는 마음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주황색 바탕과 둥근 해 앞에 남녀의 상반신을 그린 그림. 뒤쪽 남성이 고개를 돌린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관객이 아내와 꼭 같은 속도로 남편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두려워하던 아내가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고, 방금 벌어진 위협이 여전히 걸릴 수도 있다. 남편의 눈물을 이해한다고 해서 아내가 겪은 공포까지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도시에서 두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 하루가 정말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시작이 될지 망설이게 된다.

도시는 두 사람이 새 사진을 찍는 곳이 된다

남편의 상상 속 도시는 다른 여자와 떠날 장소였다. 그런데 실제로 도착한 도시는 아내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된다. 이발소와 사진관, 유원지를 차례로 찾으면서 두 사람은 처음의 불안한 방문과 다른 경험을 쌓는다. 같은 공간의 의미가 바뀌는 이유를 두 사람의 달라진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진관에서는 부부가 나란히 사진을 찍는다. 전차에 오를 때 아내는 남편을 피하려 했고, 남편은 아내를 따라왔다. 이제는 함께 있는 모습을 기념으로 남기려 한다. 같은 자리에 두 사람이 있다는 점은 같아도, 곁에 머무는 이유가 달라졌다. 사진 앞의 표정과 자세를 보고 있으면 그 변화가 실감 난다.

유원지에서는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낸다. 초반의 무서운 계획을 아는 관객에게 이런 즐거움은 뜻밖에 길게 머물 만한 장면이 된다. 교회에서 눈물을 흘린 뒤 곧장 화해를 마무리하지 않고, 둘이 함께 즐기는 시간이 이어진다. 아내가 웃고 춤추는 모습을 보아야 관객도 배 위의 공포에서 조금씩 멀어질 수 있다.

전차 승강구 손잡이 옆에 선 여성과 아래쪽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남성의 흑백 화면. 전차 안에는 제복을 입은 남성이 있고 뒤로 불 켜진 건물과 자동차가 보인다.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영화의 분위기도 여러 차례 달라진다. 위협과 울음이 있던 이야기 안으로 웃음과 흥겨움이 들어온다. 그 변화는 남편과 아내라는 같은 인물에게서 나온다. 초반과 후반의 얼굴을 따로 떼어 보기보다, 배우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자세와 표정을 어떻게 바꾸는지 따라가면 좋다.

부부의 주위까지 함께 만드는 촬영

무르나우의 첫 미국 영화에는 촬영감독 찰스 로셔와 칼 스트루스, 미술을 맡은 로후스 글리제가 참여했다. 글리제는 도시 세트에 원근을 과장하는 설계를 사용했다. 남편이 여자를 만나러 가는 습지 장면에서는 카메라를 움직이기 위한 레일을 천장에 설치했다. 걷는 사람의 동선을 따르는 화면 뒤에는 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할 공간을 만드는 일이 있었다.

도시는 인물이 들어가는 실제 장소이면서 환상이 나타나는 화면이기도 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도시를 떠올릴 때는 빠른 이미지들이 유혹을 보태고, 아내와 거리에 섰을 때는 전원 풍경이 그들 주위로 들어온다. 화면의 변화가 누구의 바람과 연결되는지 보면 촬영 기법과 인물의 이야기를 함께 따라갈 수 있다.

각진 노란 빛을 배경으로 가운데 남녀, 왼쪽에 앉은 여성, 오른쪽 위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배치한 세로형 선라이즈 포스터.

소리를 들으며 보면 화면의 움직임도 다르게 다가온다. 선라이즈에는 배우의 육성 대사가 없지만, 음악을 녹음해 화면과 맞춘 상영 방식도 마련됐다. 당시에는 극장의 설비에 따라 무성 프린트도 배급됐다. 음악과 효과음이 붙은 판본에서는 종소리처럼 장면의 전환에 들리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인물의 말을 듣지 않아도 화면에서 일어난 일에 소리가 반응한다.

지금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선라이즈에서 인상적인 것은 남편의 후회 이후에도 부부가 다시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을 충분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피해서 탄 전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케이크, 다른 사람의 결혼식, 함께 남기는 사진이 차례로 놓인다. 처음에는 남편이 다가오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웠던 아내가 그와 함께 웃고 사진을 남긴다. 그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아내의 두려움을 알고 있기에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다.

남편에게 도시는 처음에 아내를 버리고 떠날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내와 하루를 보내는 동안, 도시의 풍경도 다른 의미를 얻는다. 특히 붐비는 거리에 전원 풍경이 겹쳐질 때는 두 사람이 잠시라도 주변의 위협을 잊었으면 싶어진다. 그들의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게 시작했는지 알기 때문에, 이 평범한 외출이 더 소중해 보인다.

관련 작품

◆ 마지막 사람 (1924, F. W. 무르나우) — 나이가 들어 호텔의 현관 일을 빼앗긴 남자가 유니폼과 함께 자부심도 잃는다. 자막을 거의 쓰지 않고 인물의 행동과 카메라로 이야기를 전한다. 선라이즈의 부부처럼 몸의 자세에서 사정을 읽어볼 수 있다.

◆ 군중 (1928, 킹 비더) — 큰 도시에서 특별한 삶을 기대하던 존 심스와 아내의 일상을 따라간다. 좁은 집과 직장 생활이 부부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선라이즈에서 하루를 보낸 도시가 매일 살아야 할 곳이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비교할 만하다.

◆ 파우스트 (1926, F. W. 무르나우) — 사람들을 전염병에서 구하려던 학자가 악마의 제안과 젊음에 이끌린다. 무르나우가 유혹을 인물 주위의 빛과 그림자, 환상으로 펼치는 또 다른 작품이다. 욕망을 화면 안에 어떻게 나타내는지 이어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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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